미국에 있는 경쟁자로부터 영감을 받아 태어난 레인지로버는 30년 전 영국에 진출한 지프 체로키를 마주치자 깜짝 놀랐다
사진 존 브레드쇼(John Bradshaw)
랜드로버와 지프는 오프로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름들이지만, 직접적으로 경쟁한 적은 거의 없었다. 영국에서는 특히 그랬다. 1993년 XJ 세대의 지프 체로키가 크라이슬러 전시장을 통해 영국 시장에 데뷔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체로키는 판매에서도 맹위를 떨쳤다. 1995년 라인업에 추가된 그랜드 체로키의 도움과 함께 지프는 5년이 지나지 않아 44000대를 판매했다. 영국은 빠르게 지프 브랜드의 가장 큰 수출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판매대수와 같은 불온한 가치들은 미국적인 것으로 제쳐두고, 오늘날 영국 마니아들이 흠모하는 것은 바로 레인지로버이다. 1990년대 초에 이들이 서로 마주쳤을 때는 둘 다 상당히 나이든 상태였다. 하지만 이 각지고 역량 있는 4리터 오프로더들을 오늘날 비교하면 어떨까?
영국 시장에 체로키들이 들어올 수 있었던 데에는 ‘사커맘’들의 공이 크다. 지프는 이전에도 영국에서 판매되긴 했지만 비공식 업체를 통한 소규모였고, 실패를 거두었다. 1993년 크라이슬러는 영국 수출을 제대로 해보고자 발동을 걸었다. 당시 새로운 포드 익스플로러가 등장했는데, 도로 사용 환경에 편향된 특징을 바탕으로 미국 중산층 가족들 사이에서 꽤 호응을 얻으면서 체로키 패밀리의 본토 시장을 잠식하고 있었다.
지프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유럽에서 판매되었고, 르노와 AMC는 1980년대에 파트너십을 맺기도 했다. 하지만,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차의 개발 비용을 부담하기로 한 것은 본토에서 새로운 경쟁에 직면하면서다. US포스탈서비스가 사용하는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지프의 오랜 역사에 체로키가 합류한 것은 이러한 결정의 흥미로운 부작용이다. 그중 일부는 특히 시골 지역에서 아직도 우편물을 배달한다.
대서양 반대쪽으로 돌아와서, 레인지로버가 최초의 럭셔리 오프로드 차량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거의 신성모독적인 일이지만, 지프는 1963년의 오리지널 왜고니어에서 그 개념을 정확하게 먼저 보여줬다. 랜드로버가 지프를 보고 배운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모리스 윌크스의 오리지널 랜드로버는 윌리스 MB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최초의 프로토타입도 그 차의 섀시를 바탕으로 했다. 미래의 오프로더는 더 가볍고 콤팩트해야 한다고 판단한 지프는 XJ 체로키와 함께 다시 한 번 선구자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두 차의 가장 극명한 차이는 크기이다. 하지만 실내에서는 그러한 인상이 지속되지 않는다. 체로키가 당시 오프로더로서는 생소하게도 모노코크 섀시를 채용해 이점을 얻었기 때문이다. 체로키는 레인지로버보다 215mm 짧고 152mm 낮으며 무려 469kg이나 가벼운 데도 불구하고 레인지로버와 동일한 화물 용량, 더 넓은 앞좌석 및 뒷좌석 머리 공간, 다리 공간 등을 갖췄다.
제원상의 수치를 모른다 하더라도, 레인지로버의 내부를 보면 실내가 프레임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앞좌석 사이에 돌출된 트랜스미션 터널이 있고, 놀라울 정도로 작은 의자들은 섀시 위로 높여진 바닥의 플랫폼에 결합됐다.
어쨌든 이러한 특징은 레인지로버의 트레이드마크인 낮은 윈도 라인과 함께 운전자에게 탁월한 시야를 확보해준다.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것은 오만함을 부추긴다. 이것이 커다란 영국차에게 유명한 우월감을 주는 것이다. 이는 자동차가 거친 환경에서 사용될 때도 도움이 된다.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면 앞바퀴가 정확히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레인지로버가 별도의 섀시를 고집한 데에는 몇 가지 타당한 공학적 이유도 있다. 왜냐하면 차축 움직임에 있어서는 지프가 레인지로버를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비슷한 타이어를 끼운다면 트랙션 측면에서는 두 차간의 차이가 크지 않다. 우리 시승차로 빌려온 한정판 체로키는 중앙 디퍼렌셜을 통해 4륜구동을 선택할 수 있으며, 상시 4WD 방식의 레인지로버와 마찬가지로 로우 레인지 모드가 있어서 어지간하면 레인지로버를 따라갈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심각한 오프로드 조건이라면 레인지로버가 통과한 곳에서 체로키는 포기할 수 있다. 브레이크오버 각도와 바퀴 상하 움직임 한계가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이다.
지프는 일체형 프레임 레일로 보강을 하긴 했어도 모노코크 설계를 채용한 것이 위험을 감수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홍보용 보여주기 목적이 아닌 다음에는 럭셔리 4×4를 타고 다리엔 갭(Darién Gap, 파나마와 콜롬비아 국경에 있는 늪지대로 극한의 오지로 알려진 열대 정글)을 통과할 일이 없다는 자체 시장 조사 결과를 따랐다. 대부분의 소유자들이 씨름하고 있었던 환경은 미끄러운 풀밭, 얼어붙은 도로, 진흙투성이의 오르막길 정도였다. 그 정도 조건이라면 이런 차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포장도로 주행 성능을 덜 양보하더라도 해결할 수 있었다. 아울러 체로키의 체중 감량 덕분에, 그것은 다른 리그에 속하게 됐다.
우리 시승차에 장착된 것과 같은 직렬 6기통 4.0L의 ‘고출력’ 변형은 1993년 지프에게 세계에서 가장 빠른 대량 생산 오프로더 타이틀을 주었다. 체로키의 스로틀을 쿡 찌르면 레인지로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인다. 레인지로버의 변속기는 상대적으로 말을 듣지 않는 느낌이고, 엔진은 원래의 3.5리터에서 3.9리터로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차에 비해 작게 느껴진다. 그나마 사운드는 더 좋다. 고회전에서 제대로 된 V8의 으르렁거림을 들려준다. 인상적으로 높은 항속 주행 속도에서도 편안함을 유지한다. 단지 거기까지 다다르려면 시간이 한참 더 걸리고 회전수를 많이 높여야 한다.
그럼에도 이들을 비교하는 것은 오프로더와 소프트로더의 대결이 아니다. 두 차 모두 심각한 험로를 주파할 수 있도록 설계된 서스펜션 설정을 가졌고, 앞 차축과 뒤 차축 모두에 라이브 액슬을 채용했다. 이로 인해 요철을 넘을 때는 다소 흔들거리고, 둘 다 섀시가 말 그대로 탑승자 아래에서 울퉁불퉁한 지면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나마 더 가볍고 낮은 체로키에서는 그 영향이 덜 부각된다.
체로키에서는 스포츠에 가까운 맛을 느낄 수 있다. 차체가 콤팩트하고 시야가 훌륭해 좁은 영국 도로에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평상시 좋은 연비를 얻기 위해 체로키를 뒷바퀴굴림 상태로 유지할 것이다. 이 경우 험로를 달릴 수 있는 스포츠 왜건에 가깝다. 미끄러운 노면이나 진흙탕을 달릴 때 아주 재미있다.
레인지로버의 유일한 장점은 운전 자세가 높아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굽잇길에서 이리저리 기울어지는 차가 보장할 수 있는 것보다 큰 자신감이다. 레인지로버는 체로키가 영국에 상륙할 무렵 안티롤 바 개량을 거쳤지만 시승차는 1990년식이라 아슬아슬하게 그걸 놓쳤다. 하지만 그렇게 강화된 차들도 코너를 돌 때 기우뚱거리긴 마찬가지이다.
좀 더 온화한 주행에서는 레인지로버가 장점을 더 잘 보여준다. 여전히 무겁게 느껴지지만, 일반적인 탑승자가 느끼는 승차감 면에서는 지프가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의 편안함을 제공한다. 그렇긴 해도, 체로키 역시 거의 불편하지 않다. 체로키의 스티어링은 고속에서 직진할 때는 불안할 정도로 모호하긴 하지만 레인지로버보다 더 빠르고 더 느낌이 있다.
레인지로버는 속도를 높였을 때 더욱 안정감을 주는 순항 능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1992년 롱 휠베이스 LSE 버전이 라인업에 합류하면서 리무진으로서의 이 차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졌고, 향후 수십 년 동안 이 모델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에 대한 신호가 되었다. 그 사실을 통해 여기 나온 두 차 모두 뒤쪽 공간이 특별히 넓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차들의 뒷좌석은 현대적인 SUV의 기준으로 볼 때 매우 비좁다.
두 차의 실내는 더 구형, 더 기본형의 것을 단장한 버전들이다. 체로키는 영국에 상륙했을 때 9년차였고, 레인지로버는 더 오래되었다. 지프의 내부는 온통 플라스틱과 직각으로 도배됐다. 관계는 없지만 1980년대 제너럴 모터스 자동차의 실내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대시보드의 가짜 나무 장식은 약간… 미국식이지만, 패드 처리된 대시 상단과 스티어링 휠 등 일부 품목들은 정말로 고급스럽게 느껴진다. 영국 시장용 주름장식 가죽 옵션이 적용된 시트는 지프가 영국 시장에서 체로키에 부여하고자 했던 고급차 느낌을 반영한다. 미국에서는 이보다 기본적인 버전이 제공됐다.
전형적인 미국 스타일에 비추어 이 차의 장비 수준은 지프치고 가장 푸짐한 편이다. 리미티드에는 에어컨과 크루즈 컨트롤이 기본으로 제공되었다. 레인지로버는 플래그십 버전인 보그 SE를 선택하지 않는 이상 두 가지 사양 모두 가격이 비싼 옵션 품목이었다. 그런데 1993년 레인지로버 보그 SE는 체로키의 거의 두 배 가격인 3만5419파운드(약 5650만 원)에 판매되었다.
지프가 등장한 후, 레인지로버는 더 상위 시장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이는 랜드로버가 가격 면에서 미국 차와 싸울 야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적어도 최상위 모델은 그랬다.
레인지로버에 크루즈 컨트롤이 빠졌다고 해서 분개하는 마니아는 거의 없을 것이지만, 대시보드의 당혹스러운 디자인을 눈감아줄 수는 없다. 높은 바닥과 낮은 윈도 라인이 합쳐져 페시아를 압박하니 제어 장치를 위한 공간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스티어링 휠 뒤로 숨겨진 버튼들, 낯선 곳에 있는 표시되지 않은 스위치들, 비좁은 히터 컨트롤 박스 등은 설계한 사람만이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실내가 로버 SD1과 얼마나 비슷한지를 보면 이 차가 1970년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모습과 느낌 모두 지프의 것보다 덜 튼튼해 보인다.
그러나 레인지로버를 욕할 때마다 이 차가 제공하는 특별한 주행 경험을 상기시키는 것들이 있다. 에어컨이 없는 상태라서(그리고 히터 컨트롤들이 여전히 정신없어서) 더워지는 실내를 환기시키기 위해 모든 창문을 내렸다. 그리고 짜잔. 창문 면적이 넓다는 것은 창들을 모두 열었을 때 컨버터블에 가까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실내에 온통 바람이 통하면서 운전자는 뻥 뚫린 사파리 자동차를 모는 기분이 든다.
아래에서는 부드러운 V8이 보각보각 울리고, 서스펜션이 도로 위를 미끄러지며, 높은 운전 위치가 독특하게 내려다보는 시야를 주는 가운데 레인지로버의 가치가 갑자기 살아난다.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핸들링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단지 성능에 대한 막연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자동차가 자신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에 의해서만 판단할 것이다. 레인지로버는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른 느낌을 준다.
하지만 예리한 운전자라면 심각한 오프로드 주파 능력을 제외하고는 체로키가 모든 객관적인 기준에서 훨씬 더 나은 차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제대로 안 할 거면 하지도 말아’라는 접근 방식을 들이대면서 지프를 무시하기 쉽다. 즉, 오프로드에 가려면 최고의 오프로더를 선택하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런 2진 논리로 따지자면 캐이터햄 세븐만이 유일한 스포츠카다. 그리고 랜드로버 디펜더나 토요타 랜드크루저와 비교하면 레인지로버도 버려질 것이다.
영국인들이 레인지로버를 세계 최고의 자동차로 생각하는 것처럼, XJ 체로키는 자동차 개발 과정에서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닌 더욱 혁신적인 자동차였다. 모노코크 XJ는 승용차와 4×4의 융합에서 커다란 도약이었고 1990년대에 일어난 최초의 SUV붐을 이끈 선구자였다. 레인지로버는 왜고니어가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을 개선하여 영국에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더 짧은 수명 동안 레인지로버 1대당 거의 9대의 체로키가 생산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아마도 이제 체로키가 더 인정받을 때가 된 것 같다. 이것은 스포티, 럭셔리, 일상적인 실용성, 오프로드 기능까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동차이다. 좀 더 일찍부터 영국에서 판매되어 더 많은 수가 판매되었더라면 지금에 와서는 미국에서 그런 것처럼, 그리고 레인지로버가 즐기고 있는 것과 같은 향수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한편, 익숙함과 애국심이 레인지로버에게 과장된 평판을 주긴 했지만, 이 차가 특정한 미지의 요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때로 그것은 대부분의 운전자들이 결코 깊이 파고들지 않을 오프로드 재능의 깊이와 함께 불필요한 과도함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실용성이나 이성적인 혜택에 비추었을 때의 이러한 낭비적인 능력은 레인지로버의 사치스러운 감각을 더할 뿐이다. 그것은 여전히 독특한 운전 경험과 함께 음미할 수 있는 것으로 남아 있다.
글·찰리 칼더우드(Charlie Calderw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