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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메티의 조각이 가구가 된다면

디에디트에서 열린 개인전을 위해 직접 설치한 ‘코너 벤치(Corner Bench)’.

디에디트에서 열린 개인전을 위해 직접 설치한 ‘코너 벤치(Corner Bench)’.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조각들이 현실 속 인물로 깨어나 일상을 살아간다면 그들이 사용할 가구는 아마 발렌틴 로엘만의 작품이지 않을까. 불에 그을려 만든 짙은 고동빛 목재, 상판을 받치고 있는 앙상하지만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는 금속 다리가 자코메티 조각 작품의 분위기와 어딘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발렌틴 로엘만은 따뜻한 온기를 지닌 나무와 차가운 금속이라는 상반된 재료를 결합해 살아 숨 쉬는 유기적 형태의 가구를 만들어낸다. 1983년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도예가인 아버지 밑에서 어릴 적부터 재료와 형태에 대한 호기심을 키웠다.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예술대학을 졸업한 후 2015년 ‘스튜디오 발렌틴 로엘만’을 설립하고, 오래된 공장 한구석에 작은 아틀리에를 열었다. 그로부터 몇 해 지나지 않아 아트 바젤, 디자인 마이애미, PAD 파리와 PAD 런던 등 세계적 전시에서 작품을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그의 빠른 성공 비결은 가구를 자유로운 예술로 구현한 데 있다. 로엘만은 창작의 순간에 일어나는 자신의 감정을 오브제에 융합한다. 그의 모든 작품은 재료가 로엘만의 손에 닿는 순간부터 즉흥적으로 만들어진다. 로엘만의 작업은 계획된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우연히 맞닥뜨리는 순간의 미학과 예술적 실험을 향해 있다. 서울 디에디트 쇼룸에서 새로운 키친과 코너 벤치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 한국을 찾은 발렌틴 로엘만과의 대화.

디에디트의 공간을 위해 디자인한 ‘2 피스(piece)’ 테이블과 ‘체어 하이 백(chair high back)’ 의자.

디에디트의 공간을 위해 디자인한 ‘2 피스(piece)’ 테이블과 ‘체어 하이 백(chair high back)’ 의자.

발렌틴 로엘만의 초기 작업에는 숲에서 찾은 나뭇가지로 만든 의자가 있습니다. 당시 날것 그대로 재료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 시절에는 자금이 부족해 재료를 살 수도 없었고, 기계도 없었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재료가 나뭇가지였죠. 복잡한 형태를 만들 지식과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에 존재하는, 이미 아름다운 곡선과 선을 가진 나뭇가지를 활용하게 됐어요. 그때 내게 필요한 건 작은 톱뿐이었죠. 숲에서 마음에 드는 나뭇가지를 찾아 조립해서 간단한 작품을 완성했어요. 제가 한 일은 그저 나뭇가지를 약간 변형하고 새로운 구조로 연결하는 것이었죠. 매우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중요한 출발점이었어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 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첫 경험이었으니까요.

초기 경험이 당신만의 디자인 언어를 발전시키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그때의 영감은 제 작업 전반에 스며들었어요. 모든 작품에 그 흔적이 남아 있죠. 첫 작품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과정’을 상징하기 때문이에요. 저는 자연의 형태를 빌리는 것 대신 저만의 방식으로 자연을 재해석하기 시작했어요. 자연 그대로의 재료가 아닌, 제가 의도한 형태로 가공해야 유기적인 모습을 완성할 수 있는 재료를 선택합니다.

한국에서 처음 선보이는 ‘키친’은 발렌틴 로엘만의 아틀리에에서 영감을 받았다

한국에서 처음 선보이는 ‘키친’은 발렌틴 로엘만의 아틀리에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래서 구리, 황동, 강철 소재를 나무와 결합하기 시작했군요
작업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불가능해 보이는 재료를 다루고 싶었습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거나 결합할 수 없는 재료를 함께 사용해 자연스러운 선과 형태를 창조하고 싶었거든요. 어떤 재료를 어떻게 조합해야 그것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서로 잘 융합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구리나 황동 같은 재료는 열을 가해 부드럽게 만들 수 있죠. 하지만 단순히 나무 위에 구리와 황동을 얹는 방식이 아닌, 두 재료가 서로 녹아들어 조화를 이루게 하고 싶었어요. 나무를 태우고 금속을 녹이는 과정은 강한 힘과 긴장을 동반하는데, 그 강렬한 힘과 긴장이 결국 부드러운 조화로 완성되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구리나 황동, 금속 자체는 제가 표현하려는 느낌을 구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해요.

사전 스케치 없이 작품을 제작합니다. 손으로 직접 재료를 다루며 형태를 완성한다죠. 즉흥적 과정이지만 당신만의 규칙이나 원칙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작업하는 순간의 에너지를 작품에 담는 것이 중요해요. 작업할 때 균형을 잃으면 그 불균형이 작품에도 드러납니다. 많은 사람이 제 테이블을 보고 ‘그저 테이블일 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저에겐 그 이상의 의미가 있어요. 제품에는 제가 추구해 온 동기와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작업은 판매 혹은 어떤 브랜드를 염두에 두지 않고 개인적인 동기에서 출발해요. 작품 자체는 제가 하는 일의 아주 작은 부분이고, 그 뒤에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한 작품이 완성되면 그 경험이 다음 작품에 영향을 미치죠.

하나의 작품이 다음 작업에 영감을 주는 흐름이란 무엇인가요
삶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돼 있는 것처럼 작업도 자연스럽게 흐르는 과정 속에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 자유롭고 직관적인 흐름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만든 의자들을 시간 순서대로 놓아본다면 매달 조금씩 다르게 이뤄지는 변형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때그때의 경험과 느낀 감정이 작업에 반영되기 때문이죠. 물론 이 과정은 저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라 팀원들과 함께합니다. 갤러리와 협업을 통해 새로운 영감과 동기도 생겨나죠. 그렇게 한 작품이 완성되면 다음 작품을 위한 여정이 자연스럽게 시작돼요.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의 흐름 속에 있다고 봅니다. 그 과정에서 성장이 이뤄지죠.

레드 트래버틴과 철을 결합해 만든 ‘레드소파(Redsofa)’와 ‘마블 테이블(Marble Table)’.

레드 트래버틴과 철을 결합해 만든 ‘레드소파(Redsofa)’와 ‘마블 테이블(Marble Table)’.

창작 과정 중 때때로 예상치 못한 결과나 실수를 마주하면 어떻게 대처하나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실수나 잘못도 작업의 일부가 돼요. 이번에 디에디트에서 선보인 ‘키친’ 작업 중에도 수납 부분이 맞지 않아 다시 만들어 전체적인 조화를 세밀하게 맞췄어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맞지 않았던 그 요소를 따로 떼어 보면 하나의 멋진 작품처럼 보일 때가 있다는 거예요. 다른 작업들도 마찬가지예요. 예기치 않은 실수가 오히려 새로운 영감을 주기도 해요.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계획하고 규칙에 따라 작업하면 이렇게 우연한 순간을 놓칠 수 있어요. 실수는 제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때때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지난 9월 디에디트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선보인 ‘키친’ 작품을 ‘삶과 시간의 중심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주방은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을 연결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어느 문화권이든 사람들이 주방에 모여 음식을 나누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뤄지죠. 그런 점에서 주방은 자유롭고 직관적인 장소예요. 하지만 현대식 주방들은 점점 기능에만 집중한 공간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기술적으로는 잘 설계됐지만 따뜻함이나 창의성이 부족한 느낌이 들 때가 있죠. 때로는 주방을 디자인한 사람이 실제로 요리하지 않는 사람일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해요. 저는 주방이 주방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믿어요.

실제로 당신에게 주방은 어떤 의미인지
‘키친’ 작품은 제 스튜디오에서 얻은 영감을 담고 있어요. 작업실에서 주방은 중요한 공간이에요. 동료들과 함께 요리하고 식사하며, 시간을 공유하는 장소입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주방은 제 삶에서도 타인과 연결되는 장소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번 ‘키친’ 작품도 이런 생각에서 출발했어요. 물론 ‘키친’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그 공간이 꼭 전통적 의미의 주방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이 공간이 사람에게 주는 느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소통과 감정의 흐름입니다. 이런 요소들이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길 바랐어요.

1910년에 지어진 오래된 폐공장을 인수해 창조적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발렌틴 로엘만의 스튜디오 ‘팩토리’ 공간의 일부.

1910년에 지어진 오래된 폐공장을 인수해 창조적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발렌틴 로엘만의 스튜디오 ‘팩토리’ 공간의 일부.

당신의 작품은 대부분 묵직한 컬러 팔레트가 있습니다. 진중하고 강인해 보이는 색채는 당신의 성향을 반영한 걸까요
제 작업에서 컬러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만, 제 성격이 반영된 측면은 분명히 있어요. 내성적인 저에겐 화려하거나 과장된 표현보다 차분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잘 어울리죠. 흙·나무·돌 등 사용하는 재료는 모두 자연에서 오며, 이들은 모두 시간의 흔적을 품은 색을 띠고 있어요. 깨끗하고 반짝이는 것보다는 녹슬고 세월을 머금은 재료들이 저에게 더 큰 영감을 줍니다. 제 작품이 세월이 흘러 더욱 자연스럽고 깊이 있는 모습으로 변하길 바라요. 시간의 흔적을 입으며 더욱 가치 있게 변하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예술적 표현과 조형적 의미를 담은 ‘아트 퍼니처’는 일반적인 가구와 달리 공간에서 또는 사용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해야 할까요
작품은 스스로의 힘으로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그 작품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죠. 제 작품이 사람들에게 특정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기대는 품지 않습니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제 역할은 끝났다고 봐요. 그 이후에는 작품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전혀 개입하지 않으려고 해요. 작품이 단순한 물건이 아닌, 더 깊은 층위의 예술로서 가치를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제 작품이 지속적 가치를 지니며 사람들에게 새로운 감정과 경험을 계속해서 제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작품에 숨겨진 이야기와 과정들이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발렌틴 로엘만의 스튜디오인 ‘팩토리’는 4년 전 오래된 폐공장과 부지를 인수해 창조적인 공간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제가 이곳을 ‘팩토리(Factory)’로 부르는 이유는 실제로 1910년에 지어진 공장이기 때문이에요. 이 건물은 건축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최대한 원형을 보존하면서 제 작업방식과 결합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스튜디오의 레너베이션 자체가 하나의 창작 활동처럼 느껴져요. 시간을 들여 공들여야 하고, 완성된 후엔 또 다른 공간이나 작업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이죠.

앞으로 또 어떤 것에 몰두하게 될까요
미래를 예측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인생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에요. 미래에 대한 확답은 어렵고, 다만 저는 가능하면 외부 영향에서 벗어나 내면을 성찰하고 구축하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제가 원하는 건 작품의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그 에너지를 통해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전달하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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