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나, 해초로 만든 조각 작품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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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 박물관 해조류학과에 설치된 조각 ‘Oki Naganode’.

V&A 박물관 해조류학과에 설치된 조각 ‘Oki Naganode’.

바닷가를 거닐다 보면 축축하게 흐트러진 채 모래 위에 널려 있는 해초 더미를 발견한다. 파도에 휩쓸려 버려진 바다의 잔해물처럼 보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소재로서 거대한 조각이 되기도 하고 디자인 언어가 되기도 한다. 디자이너 율리아 로만은 2013년 V&A 박물관에서 ‘해조류학과(Department of Seaweed)’를 창설해 해조류를 디자인 소재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 왔다. 그 방법에는 인간이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아니라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우선시하는 전제가 뒤따른다. 즉 인간 중심이 아닌, 목소리 없는 이해관계자들의 안위가 주체가 되는 것. 율리아에게 해초는 영감의 원천이자 사고의 도구로 현시대의 디자인 사고와 제작방식에서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질문하게 만든다. 그녀는 해조류를 통해 배운 지속 가능성의 원칙을 더 넓은 물질 흐름에 적용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새롭게 정의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생태계를 돌보고 회복시키는 재생 관리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핀란드 ‘샤프 아트 하우스(Chappe Art House)’에 설치된 조각 작품 ‘Corpus Maris II’.

핀란드 ‘샤프 아트 하우스(Chappe Art House)’에 설치된 조각 작품 ‘Corpus Maris II’.

핀란드 ‘샤프 아트 하우스(Chappe Art House)’에 설치된 조각 작품 ‘Corpus Maris II’.

핀란드 ‘샤프 아트 하우스(Chappe Art House)’에 설치된 조각 작품 ‘Corpus Maris II’.

해조류를 활용한 디자인 작업은 어떻게 이뤄지나요

해조류가 어디서 왔는지, 그 기원을 이야기하기 위해 어떤 가공 없이 자연 그대로의 잎 모양을 사용해요. 해조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색이 변하는데, 짙은 녹색이 자외선을 받으면 몇 주 만에 노란색이나 갈색으로 변해요. 이 색의 변화는 해조류가 가진 색소 때문인데, 엽록소는 빛에 의해 쉽게 분해되는 반면 푸코잔틴 같은 색소는 더 안정적으로 남아 갈색으로 변합니다. 또 어떤 해조류는 푸코잔틴이 없어 옅은 노란색으로 변하며, 때때로 투명하거나 반투명한 느낌을 주기도 하죠. 이런 색감을 활용해 해조류의 물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다른 재료와 결합하기도 합니다. 등나무 프레임에 부착하면 건조 과정에서 수축하면서 자연스럽게 볼록한 형태가 만들어지는데, 이를 통해 재료의 특성과 강도를 직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죠.

거대한 해초 조각품이 의미하는 것은

해조류의 본질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이에요. 작품을 인간보다 큰 스케일로 제작하는 이유는 전시공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예요. 의도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듯한 형태를 만들었어요. 작품의 형태와 구조는 해조류의 강도와 크기에 의해 결정되지만, 사람들이 이를 바라보고 경험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관람자에게 특별히 전달하고 싶은 경험이 있다면

스노클링으로 수중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을 하길 바라요.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바다 냄새를 맡게 된다면 그 순간 사람들은 과거의 바다 경험을 떠올리고, 그 후에는 거대한 해조류 구조물과 마주하게 되죠. 이 작품은 단순한 미적 경험을 넘어 인간 중심적 관점을 흔들고, 해조류를 독립적 존재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지구의 중심이 아니라, 그저 많은 생명체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하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해초에 감싸인 율리아 로만에게서 위트가 느껴진다.

해초에 감싸인 율리아 로만에게서 위트가 느껴진다.

작업 초기에는 양의 위장, 냉동된 새끼 쥐 등 평범하지 않은 실험적 소재를 사용했어요

윤리적·물질적 가치에 관심이 많아요. 우리는 특정 재료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다른 재료를 하찮게 여기기도 합니다. 디자인 과정에서 이런 고정관념을 깨고 싶습니다. 저평가된 재료를 새로운 맥락에서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간과했던 재료와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양의 몸속에 있는 장기는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도축 후 일부는 식재료나 의류로 변하고 나머지는 폐기물이 되잖아요. 모든 재료에 가치를 부여할 책임이 있다고 봐요.

동물성 소재 탐구에서 해조류로 시선을 돌리게 된 계기는

일본에서 창작 활동을 하다가 해조류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일본에서는 해조류가 식재료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소재로 활용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해조류를 가죽처럼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물을 해치지 않고 재료를 얻을 수 있는 데다 바닷속 다른 생물에게 서식지를 제공하고, 해양 생태계를 균형 있게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해조류는 인간이 활용할수록 바다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재료 중 하나예요. 기후 변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에 인간은 더 이상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라 이로운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변해야 합니다.

해초로 만든 깃 작품, ‘Seaweed Collar’.

해초로 만든 깃 작품, ‘Seaweed Collar’.

해조류의 어떤 순환구조가 생태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나요

해조류 양식장은 주로 물고기 양식장 주변에 배치돼 물고기 배설물에서 나온 과잉 영양소를 흡수하고 자연스럽게 정화작용을 합니다. 생명이 살기 어려운 심해 지역에 해조류 양식장을 조성하면 그곳을 새로운 생태계로 전환할 수도 있죠. 해조류는 강을 통해 바다로 유입된 토양과 비료를 흡수하면서 성장하는데, 이를 수확하면 다시 육지로 영양분을 되돌릴 수 있어요. 이전 생태계에 해로운 영향을 주었던 자원을 다시 활용하는 순환구조를 만드는 방식이죠. 해조류는 비료와 항생제 없이 생산이 가능하며, 많은 양의 담수를 소비하지 않기 때문에 지속 가능한 자원이에요. 그러나 기존의 착취적이고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으로 해조류를 무분별하게 재배하고, 야생 해조류를 수확하면서 환경에 악영향을 미칠 위험도 있어요.

해조류 기반 소재가 포장재부터 섬유, 플라스틱 대체재까지 확장되면서 식품과 에너지, 의약품 산업에서도 주목받고 있는데, 그만큼 오남용 가능성도 커지겠죠

일부 대기업은 자연 해조류 숲을 광범위하게 채취하며, 필요한 부분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바다에 버려요. 지속 가능한 방식이 아닌, 특정 기업만 이익을 얻는 구조입니다. 해조류 사용이 확대된다면 반드시 환경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생산된 ‘양식된 해조류’를 활용해야 해요. 또 단순한 자원 ‘채취’가 아니라 ‘생태계와의 공존’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해조류를 생산하는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 이 생태계에서 줄여야 할 해조류는 무엇이고, 보호해야 할 해조류는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이 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초점을 맞춰야 하죠.

해양 생태 실험실 같은 V&A 박물관 해조류학과 스튜디오.

해양 생태 실험실 같은 V&A 박물관 해조류학과 스튜디오.

디자인은 보통 인간을 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당신은 생태계의 필요와 이익을 중심에 둔 디자인을 하고 있군요

디자인은 본질적으로 ‘관계’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해요. 특정 맥락과 존재들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작업이니까요. 여기서 중요한 건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도 디자인의 이해당사자로 포함시키는 거예요. 직접적인 목소리는 없지만 디자인으로 인해 영향을 받을 존재들까지 고려하는 것이죠. 단순히 ‘이걸로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가 아니라 ‘무엇을 만드는 것이 이 생태계에 이롭고 의미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그런 질문을 통해 얻은 답이 디자인 작업 시 아이디어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겠어요

맞아요. 저는 핀란드 알토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데, 학생들과 해양연구소를 방문할 때마다 각자 한 종의 해양생물을 연구하도록 합니다. 그 생물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위협을 받고 있는지 조사한 뒤 그 종의 입장에서 디자인 아이디어를 반추하게 하는 거죠. “네가 계획한 디자인이 이 홍합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같은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이처럼 인간이 아닌 존재의 시선에서 디자인을 바라보는 연습을 통해 학생들이 더 공감하고 배려하는 디자이너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디자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인식하고, 그 영향을 깊이 고려하는 태도를 기르는 게 중요하니까요.

2007년 일본 삿포로에 설치된 파도 모양의 설치미술 작품 ‘The Catch’. 생선 상자 300개를 사용해 과도한 어획과 무분별한 해양생물 소비 문제를 강조했다.

2007년 일본 삿포로에 설치된 파도 모양의 설치미술 작품 ‘The Catch’. 생선 상자 300개를 사용해 과도한 어획과 무분별한 해양생물 소비 문제를 강조했다.

당신의 작업은 디자인보다 개념 예술에 더 가까운 듯합니다

디자인 방법론을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방식을 익혀왔어요. 제 작업의 본질은 개인 경험을 되새기고, 그 경험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내는 것이죠. 물론 개념 예술과 유사한 점이 있지만, 그 이유는 우리가 같은 목표를 공유하기 때문이에요.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 개념으로 나누지 않고, 기존의 프레임을 확장해 여전히 유효한지 질문하는 과정인 거죠. 비판적 디자인이나 개념 예술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 “어떻게 지구에 덜 해로운 방식으로 살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며 작품이 철학적 사고를 유도하는 동시에 실용적으로 기능하도록 만들고자 해요. ‘디자인’과 ‘예술’을 구분하는 이분법 자체도 인간이 만들어낸 또 다른 프레임일지도 모릅니다.

겉보기엔 가죽같지만 다양한 해조류를 말려 제작한 마스크와 날개 그리고 깃 ‘Kelp Collar Lit’. 독특한 형태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겉보기엔 가죽같지만 다양한 해조류를 말려 제작한 마스크와 날개 그리고 깃 ‘Kelp Collar Lit’. 독특한 형태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겉보기엔 가죽같지만 다양한 해조류를 말려 제작한 마스크와 날개 그리고 깃 ‘Kelp Collar Lit’. 독특한 형태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겉보기엔 가죽같지만 다양한 해조류를 말려 제작한 마스크와 날개 그리고 깃 ‘Kelp Collar Lit’. 독특한 형태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초기의 해조류 작업과 지금의 접근방식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처음에는 해조류로 무엇이든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형태를 실험하고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는 데 집중했죠. 하지만 점점 해조류의 가능성이 단순한 소재 개발을 넘어선다는 걸 깨달았어요.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의 경계를 고민하게 됐죠. 이제는 해조류를 활용을 넘어 이를 둘러싼 사고방식을 바꾸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생체 기반 소재를 개발하면서도 환경을 해치지 않고,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과 공존하는 방식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자문하면서 말이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이 여정의 궁극적 목표는

더 친절한 인간이 되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생태계를 이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생명체가 번성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책임이 있어요. 흔히 ‘생태계 서비스’는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혜택을 의미하지만, 저는 그 질문을 반대로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비인간 존재에게 어떤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까요?” 생태계 안에서 우리가 맺는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겉보기엔 가죽같지만 다양한 해조류를 말려 제작한 마스크와 날개 그리고 깃 ‘Kelp Collar Lit’. 독특한 형태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겉보기엔 가죽같지만 다양한 해조류를 말려 제작한 마스크와 날개 그리고 깃 ‘Kelp Collar Lit’. 독특한 형태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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