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안경’으로 칸영화제 초청된 정유미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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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톱과 블랙 팬츠는 모두 Cos.

화이트 톱과 블랙 팬츠는 모두 Cos.

단편 애니메이션 〈안경〉으로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받았다. 당신의 작업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을 넓혀주었을 텐데, 이런 경험은 어떤 영감과 세상을 안겨줬나

15년 전에 만들었던 단편 〈먼지 아이〉(2009)로 처음 갔던 영화제가 칸이었고, 그때부터 언젠가 다시 한 번 더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꽤 의미 있는 일이었다.

〈안경〉은 대사가 없지만 그 안에 많은 의미가 숨어 있다. 여자는 시력검사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스스로를 사랑하기로 결심한 듯한데

이 작품의 컨셉트는 시력검사대에서 출발한다. 시력검사기에 눈을 대면 보이는 작은 집을 보며 ‘저 안에 들어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게 재미있는 소재로 느껴졌다. 아마 많은 분이 비슷한 상상을 해봤을 거다. 그런 상상력이 지금 작업과 연결되는 것 같다. 저 집 안에 뭐가 있을지, 그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에 대한 호기심이 작품의 출발점이었다.

작품 안의 시력검사기 속에서 보인 ‘집’에 매료된 이유는

시력검사하러 가면 보는 집이 마치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 같지 않나. 오래된 수영장이나 문 닫은 백화점처럼 우리 기억에 익숙하게 자리하고 있지만 지금은 쓰이지 않아 이상하고 불편한 감각을 주는 공간을 뜻한다. 그런 장소들은 묘하게 ‘언캐니(Uncanny)’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그런 미묘한 감정이 정말 매력적이라고 느낀다. 완전히 새롭지는 않지만 생경한, 그 감정이 작품의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거든.

작품의 제목이자 중심 오브제인 ‘안경’은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하거나, 반대로 거리를 두게 만드는 도구이기도 하다. 안경은 어떤 상징으로 다가왔나

안경을 ‘프레임’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투명한 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 각자 자신만의 왜곡된 프레임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프레임은 결국 무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고, 개인의 무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프레임도 바뀌기 어렵다. 그래서 첫 장면에서 깨진 안경을 낀 인물이 새로운 안경을 맞추러 가는 장면은 일종의 액자 구조처럼 구성됐다. 어떤 과정을 통해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되는지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 처음 시력검사대에서 깨지는 글자가 ‘변신(Metamorphosis)’이잖나. 미운 오리 새끼가 사랑을 받으면 나비가 되듯 수용 과정에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시력검사를 받으러 간 곳의 분위기는 묘하다. 정체 모를 기구들이 커튼과 베일에 싸여 있고, 그 사이에서 여자는 새로운 안경을 맞추는데 그 공간은 단순한 안경점이 아닌 것 같다

처음엔 안경점으로 설정했지만 점점 그 공간이 어느 특정한 기능의 장소로 한정되는 게 싫었다. 그래서 더 유연하고 상징적인 공간으로 풀고 싶었다. 그 커튼 너머의 공간은 누가 들어오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일종의 가상공간이다. 주인공에게 필요한 프레임이 나타나는 공간이랄까. 어떻게 보면 ‘신’ 같은 존재가 나에게 맞는 시야를 처방해 주는 장소라고 상상했다.

이 작품은 세 가지 챕터로 나뉜다. 여자는 세 개의 방으로 들어서며 각각의 형상과 상황을 바라보게 되는데, 첫 번째 방에서 괴물 같은 털북숭이 아이의 머리를 잘라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털북숭이는 과자를 계속 입에 집어넣으며 어두운 방에서 TV만 보고 있다

그렇다. 털북숭이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버려지고 관리되지 않은 존재로, 의도적으로 설정한 캐릭터다. 머리를 오랫동안 자르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TV를 보면서 계속 과자를 먹고 있는 괴물의 모습은 마치 스스로를 방치한 채 살아가는 내면의 자아처럼 느껴졌다. 아무 생각 없이 TV를 온종일 보다가 껐을 때, 갑자기 밀려오는 적막이 무서울 때가 있거든. 멈춤 없이 무언가를 보고 먹는 행위는 내면을 들여다보기 싫어하는 도피와 마찬가지다.

두 번째 방에서는 시선과 시간에 대한 강박이 느껴졌다. 특히 창밖에서 깜빡이는 눈, 양쪽에 울리는 궤도 시계 때문에

그 방은 조금 더 ‘한국적 강박’을 표현한 공간이다. 수험생처럼 늘 무언가에 쫓기고, 시간 압박에 시달리는 느낌이지 않나.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리며 작업했다. 창밖에서 주인공을 지켜보는 눈은 외부의 시선일 수도 있고, 스스로를 바라보는 내면의 눈일 수도 있다. 사우론의 눈처럼 끊임없이 관찰하고 비판하는 시선이 우리 안에 늘 존재하니까.

세 번째 방에서는 이불 속에 숨어 있는 존재가 나온다. 실체가 보이지 않다가 주인공이 그 이불 속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데

감정적으로 힘들어질 때 잠을 많이 자는 편인데, 일종의 과수면이자 도피이기도 하다. 숨고 싶을 때 자연스럽게 이불 속으로 들어가게 되지 않나. 그런데 그 안에 있는 존재는 스스로 나오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내면 깊숙이 들어가는 걸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 공간을 너무 오래 외면해서 낯설고 무섭게 느껴지기 때문인데, 만약 그 존재를 미워하지 않고 계속 보듬어왔다면 그 어둠도 그렇게 두려운 공간은 아니었을 거다. 결국 그 장면은 ‘내가 나를 만나러 가는’ 여정이자 용기의 서사다.

〈안경〉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말한다면

“당신의 시야는 당신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을 때만 분명해진다. 바깥을 보는 자는 꿈을 꾸지만, 내면을 바라보는 자는 깨어 있다.” 칼 융의 말이다. 우리는 늘 외부를 바라보며 그것을 바꾸려 하잖나.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나도 서울에서 살 때는 내면보다 외면 중심으로 살았는데, 어느 순간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더라. 그 후로 점점 내면을 바라보는 일이 재미있어졌고, 내면이 바뀌면 외면도 바뀐다는 걸 알게 됐다.

내면을 사랑하게 되는 서사를 이번 작품에서 다뤄야겠다고 생각한 시점은

작업을 시작할 때 늘 ‘어떤 이야기를 할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한다. 그림을 그리고, 애니메이션으로 풀어내면서 이야기까지 함께 만들어야 하니까. 그런데 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내적 고통이다. 왜 이런 고통이 생기는지 들여다보면 결국 내가 수용하지 못한 감정이나 존재에서 비롯된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 최근 들어 그 감각이 더 또렷해졌다. 나의 작업은 그런 ‘수용하지 못한 나의 일부’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려는 시도인 것 같다.

이 작품의 구상은 언제쯤 시작했나

한 3년 전쯤이었다. 브랜드 ‘KIMHE⁻KIM(김해김)’의 협업 제안이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캠페인 영상을 구현할 계획이었는데 브랜드 쪽에서 내 작업을 있는 그대로 해도 좋다고 해서 이미 구상해 둔 이야기를 바탕으로 풀어나갈 수 있었다. 스폰도 받았고, 저만의 해석도 담으면서 재미있게 작업했던 기억이 난다.

작품에서는 ‘집’ ‘안경’처럼 특정 공간이나 사물이 감정을 걸러내거나 품는 느낌을 준다. 사물은 감정을 드러내는 도구일까, 아니면 숨기는 매개체일까

어릴 때부터 물건의 형태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오래된 물건들, 빈티지 소품을 좋아했다. 벼룩시장도 자주 다녔고. 사물은 그 자체로는 아무 감정이 없지만, 사람의 기억이나 감정과 맞닿는 지점이 있으면 의미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어떤 물건이 내 기억과 연결돼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가 된다. 그래서 작업에 그런 ‘기억이 걸쳐 있는 물건’을 자주 사용한다. 지금은 미니멀하게 살고 있지만, 여전히 재미있는 형태나 이미지를 모으고 있다. 그게 작업의 영감이 되니까.

<연애놀이〉(2012)의 인물들도 자기 감정을 다 알지 못한 채 품고 있었고, 〈안경〉의 주인공도 자기 마음을 해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이 바라보는 ‘관계 속 자아’는

사실 사람과의 관계에 조금 서툰 편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고, 지금도 긴장을 많이 한다. 그래서 더 마음이 편한 작업을 선택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살면서 느끼는 건 타인과의 관계보다 내가 나와 맺는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거다. 내가 나를 편안하게 대할 수 있어야 타인과도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더라. 예전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나를 억누르고 배려했는데, 그게 꼭 행복한 방식은 아니었다. 결국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다른 사람의 부족함도 인정할 수 있는 것 같다.

컬러 없이 흑백 드로잉을 선보여 왔다. 이러한 톤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정말 많이 받는다. 회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한때는 아주 컬러플한 작업도 많이 했다. 그런데 영화학교에 들어가 애니메이션을 처음 배우면서 연필 드로잉으로 작업을 시작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흑백 작업으로 이어졌다.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컬러 작업은 공정이 복잡하고 수정이 어렵거든. 중간중간 이미지나 구도를 자주 바꾸는 편이라, 보다 유연하게 작업할 수 있는 흑백이 나에게 맞더라. 애니메이션은 수많은 그림을 그려야 하니까 움직이는 캐릭터는 단순하게, 대신 배경이나 소품에는 밀도를 담는 방식으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

흑백이 주는 미학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맞다. 기능적 이유 외에도 흑백이 주는 감수성이 있다. 흑백 이미지는 빈티지하고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고, 시간의 감각도 흐리다. 현재인지 과거인지 혹은 미래인지 명확하지 않게 만드는 무시간성이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들도 대체로 어두운 구석이 있는 이가 많았다. 고딕적 분위기, 음영 있는 이미지에 더 끌렸던 것 같다. 애니메이션을 시작하게 된 것도 퀘이 형제(Quay Brothers)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등학생 때 그들의 퍼핏 애니메이션을 처음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다. 낡은 오브제들을 모아 인형과 배경을 만든 뒤 그걸로 서늘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정말 아름답다. 그 작업을 보고 나도 언젠가 저런 걸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궁금하다. 다음 작품에서는 어떤 온도와 감정을 담고 싶나

내가 점점 더 자유로워지는 과정을 담고 싶다. 어릴 땐 시야가 정말 좁았던 것 같다. 그런데 자기 수용, 자기 사랑을 조금씩 해나가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을 계속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만약 내가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그냥 혼자 생각하고 지나쳤을 것들을 지금은 작업으로 남길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나중에 예전 작업과 지금 작업을 비교해 보면 분명 닮은 부분도 있겠지만, 주제가 조금씩 변형되기도 하고 감정의 결도 달라져 있을 거다. 그게 내면의 변화고, 그 변화가 계속 이어진다면 작업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도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림 전시와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장편은 단편과 완전히 다른 작업이더라. 단편이 시처럼 여운을 남긴다면, 장편은 구조와 인물과 사건이 있는, 좀 더 소설 같은 세계이니까. 은유적이고 시적인 표현을 더 좋아하는 편이라 장편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다.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당신의 시선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걸까. 가장 그리운 과거는 언제인가

어릴 때 정말 많이 놀았다. 흙을 파고, 상상 놀이를 하고,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놀고. 〈연애놀이〉도 그런 ‘놀이’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어릴 때 시체 놀이 같은 걸 하잖나. 장례식 흉내도 내고, 죽은 척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그게 다 상상력이 만든 놀이였다. 작업이라는 것도 결국 놀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뭔가 재미를 찾아내는 것. 만약 그 시절에 그런 놀이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창작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 물론 지금도 과정이 힘들고 결과가 마음에 안 들 때도 있지만, 그 안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으면 계속할 수 있다. 창작은 결국 ‘재미를 찾는 고문’ 같은 것이니까.

정유미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 〈나의 작은 인형 상자〉(2006)로 데뷔 후, 〈먼지아이〉(2009)로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되며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이후 〈연애놀이〉(2015)로 24회 자그레브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꾸준히 흑백의 단편 애니메이션과 그림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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