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가수 겸 작곡가 김용만이 27일 오전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김용만은 1950~6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기를 이끌며 ‘남원의 애수’, ‘청춘의 꿈’, ‘회전의자’ 등 다수의 히트곡을 남겼다.
김용만은 1935년 경기민요를 하던 국악인 김대근 선생의 3남으로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그의 동생 김용남 또한 대금 연주와 악기 제작을 통해 국악계에서 이름을 알렸다. 김용만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열정을 품고 성장했으며 악기점에서 일하던 친구 덕분에 작곡가 김화영을 만나게 됐다.
이 인연은 그가 1953년 ‘남원의 애수’로 데뷔하는 계기가 됐다. 이 곡은 춘향전을 모티브로 한 애틋한 가사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의 데뷔곡의 성공은 김용만을 신신레코드사의 전속가수로 발탁하게 했다.
이후 그는 ‘청산유수’, ‘효녀 심청’, ‘청춘의 꿈’, ‘생일 없는 소년’, ‘회전의자’, ‘무적자’ 등 다양한 곡을 발표하며 인기를 끌었다.
특히 그의 노래는 서민의 애환을 담고 있어, 당시의 시대상과 해학이 녹아들어 청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무대에서 독특한 발음으로 ‘아침’을 ‘아츰’으로, ‘수고합니다’를 ‘수고합네다’로 부르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변신도 놓칠 수 없다.
1960년대부터 그는 ‘명동 부르스’와 ‘후라이 맘보’ 같은 곡을 발표하며 자신의 작사·작곡 능력을 보여주었다. 당시 직접 곡을 쓰는 가수가 드물던 시기에, 그는 지방 무대를 다니며 노래를 만드는 열정을 보였다.
또한 가수 백야성과 콤비를 이루어 ‘잘 있거라 부산항’, ‘항구의 영번지’, ‘못난 내 청춘’, ‘마도로스 도돔바’ 등 백야성의 대표곡들을 작곡했다.
김용만은 생전 여러 차례 KBS1의 ‘가요무대’ 등 방송에 출연하며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히트곡들을 열창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지난 7월에는 ‘청춘의 꿈’으로 엔딩 무대를 장식하며 박수 갈채를 받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세대를 초월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에 따르면 “김용만의 노래는 지극히 서민적이며, 삶의 애환이 해학적으로 담겨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그는 ‘무영탑’, ‘삼국지’, ‘놀부와 흥부’, ‘한양 가는 방자’ 등 고전 인물과 전래동화를 소재로 한 노래를 많이 발표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고 덧붙였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장례식장 특7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29일 오전 8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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