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말론 브란도는
영화 <대부>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함
하지만 상을 받으러 무대로 올라간 사람은
다름아닌 원주민 옷을 입은 한 원주민 여성
사친 리틀페더라는 이름의 이 여성 행동가는
말론 브란도가 직접 작성한 연설 원고를 낭독하여
“그는 이 상을 거부한다고 말했습니다.”
“할리우드가 원주민을 인종차별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함
대배우 말론 브란도는 왜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이콧했으며
대리인으로 참석한 사친 리틀페더는 누구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80여년 전인 19세기
미국에서 벌어지던 인디언 전쟁의 끝무렵에 있었던
운디드니 학살 사건부터 설명해야 함
운디드니 학살은
미 연방정부가 원주민에 벌인 만행으로 손꼽히는 사건으로
원주민 보호구역 인근의 운디드니 언덕에서 벌어진 대학살임
연방군에 항복한 원주민들이 부상자들의 치료를 요구하자
미군은 기다리라고 하면서 원주민들의 무기를 수거하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부족 전사들과 다툼이 있었고
추정하기로는 귀가 들리지 않는 원주민 한 명이 이에 저항하다가
연방군들이 총을 쏜 원주민, 쉬고 있던 원주민들
어린아이들, 노인들, 도망치는 원주민들을 포함해
약 300여명의 원주민들을 살육한 사건임
해당 지역에 붙은 표지판
과거 이 표지판에는 학살을 의미하는 MASSACRE가 아닌
전투를 의미하는 BATTLE 이 붙어있었음
위 표지판의 문구가 변경된 것으로 알 수 있듯,
이 학살극은 미국내에서 긴 시간동안
영웅 미국인들이 야만인들과 결사항전을 치룬 끝에
승리를 거머쥐고 평화를 되찾은 것으로 묘사되어왔음
과거 이 학살사건을 묘사한 일러스트인데
병사들을 원주민들에게서 승리한 영웅들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 희생자 대부분은
저항능력이 없는 노약자들이었고 일방적인 살육이었으며
미군 사상자 대다수는 아군끼리의 오인사격에 의한 사상이었음.
현대에 이르러 이 사건은 학살로 불리게 되지만,
군인들이 받은 명예 훈장은 지금까지도 취소되지 않았음…
아무튼 다시 1973년으로 돌아와
2월 27일
오스카 시상식이 열리기 한달 전
원주민 활동가 연합은 운디드니 마을을 점거하면서
보호구역의 부정부패를 조사하고 원주민을 차별하는 것을 멈춰달라고 정부에 호소했음
연방정부는 이를 거부하며 소탕 작전을 벌임
이 사건에 충격받은 말론 브란도는
원주민들을 대놓고 차별하는 정부와
원주민을 야만적으로 묘사하는 할리우드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그 해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이콧 하고
배우이자 젊은 원주민 협회 대표인
사친 리틀페더에게 연설할 발언권을 주어
대리인으로 참석시킨 것임
당시 실제 영상
실제 분량은 더 길었으나 위에서 강력하게 압박을 넣어서
극히 일부만 발언할 수 있었고
이마저도 아예 출연하지 못할 뻔함
참고로 이게 아카데미 최초의 정치적 발언임
여튼 이 연설로 객장은 야유와 박수로 가득했고
서부극 스타인 존 웨인은 급습시도를 했다가 경비원에게 제지당했으며
[존 웨인은 인종차별자로 유명하며
‘흑인들이 멍청해서 백인우월주의는 필요하다’
‘인디언들이 미대륙을 이기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라는 발언 한 적 있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시상 순서에서
“나도 영화에서 원주민들을 많이 죽였는데 유감임ㅋㅋ”이라는
최악의 농담을 날리기도 했음
참고로 말론 브란도는
그때 수상 보이콧한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음
이후 약 50년뒤
아카데미측은 사친 리틀페더에게 그 날 있었던 소동에 대해 사과함
이후 몇달뒤 원주민 운동가였던 그녀는 사망함…
사친 리틀페더가 죽고 난뒤
그녀의 자매들을 인터뷰했는데
사친 리틀페더는 히스패닉 혈통일뿐 원주민 혈통이 아니었음…
자매들의 말에 따르면
사친은 히스패닉으로 사는것보다 원주민이라고 구라치는게 명망있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살았다고함…
인터뷰한 기자가 족보부터 관련 기록들 다 찾아봤는데도
사친은 그냥 평범한 히스패닉이었음…
이에 대해 원주민 활동가들은 사친이 한 사회운동은 고마운데 사기친것에 대해 분노했음…
출처: 상업영화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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