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22일, ‘창세기전 1·2’의 합본 리메이크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이 정식 출시됐습니다. 개발을 맡은 레그스튜디오의 말처럼, 정식판은 논란이 됐던 체험판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여줬죠. MS-DOS에서 실행됐던 20여 년 전 원작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이들은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에 나름 만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의 출시를 기다렸던 사람들 모두 원작을 알고, 해본 사람들은 아닙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전의 리메이크는 이름만 아는 사람들도 설레게 하니까요. 저도 사촌형의 플레이를 어깨 너머로 구경한게 ‘창세기전’에 대한 기억의 전부지만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 출시를 적잖이 기다렸습니다.
그럼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이 원작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만족감을 선사하는 게임일지, 직접 플레이해본 바를 토대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이야기는 재밌는데…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95년작 ‘창세기전’, 그리고 이듬해 나온 ‘창세기전 2’의 합본 리메이크입니다. 타일로 구분된 맵 위에서 상대와 턴을 주고 받으며 유닛을 조종하는 턴제 SRPG로, 90년대 초~2000년대 초반 크게 유행했던 장르죠. 당시 출시된 게임 중 현재까지 신작이 나오는 작품으론 ‘파이어 엠블렘’과 ‘슈퍼로봇대전’ 등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의 스토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안타리아 대륙’으로 다양한 국가, 세력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곳이죠. 비프로스트 공국에서의 영문을 알 수 없는 게이시르 제국군의 출현, 게이시르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도모하는 팬드래건 유민들의 저항활동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이올린, G.S 등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이 얽히고설키며 스케일이 점차 커져갑니다.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에는 국가·세력 단위의 정치적 암투, 외교 및 군사적 마찰과 등장인물 개개인간 시기, 질투, 사랑과 복수 등 다채롭고 매력적인 소재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또, 십 수 권에 달하는 대하소설을 방불케 할만큼 장대한 스케일을 자랑하죠. 전개와 대사가 다소 고전적이긴 하지만, 가벼운 이야기나 클리셰 비틀기가 많은 최근 경향을 고려하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양한 세력·국가·등장인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세계관 고유용어 등은 ‘안타리아의 서’를 통해 게임 중 수시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치를 통해 원작을 모르는 이들도 ‘창세기전’ 세계관에 대해 이해하고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죠.
단, 안타리아 대륙 전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과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행적들을 일일이 조명하는 만큼, 이야기 전개가 다소 산만하다는 감상도 듭니다. 덧붙여 이야기 전개의 속도 역시 절대 빠른 편은 아닙니다. 그래서 플레이어의 집중력을 유지시킬 게임 플레이의 재미가 중요한데, 이 부분의 완성도가 아쉽습니다.
전투,
기승전초필살기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 게임 플레이는 크게 월드맵, 모험 모드, 전술 전투 모드 등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월드맵은 안타리아 대륙 전역을 구현한 곳으로 챕터 진행 중 거점간 이동을 수행하며, 각종 상점 콘텐츠를 통해 아이템을 사고팔수 있죠. 다음으로 모험 모드에선 캐릭터를 조작해 거점 내 필드를 돌아다니며 간단한 전투를 치르거나 각종 수집품을 모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술 전투 모드에선 대규모 전투를 치르게 되죠.
이 중 모험 모드는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을 하면서 가장 자주, 많이 플레이하게 되죠. 그리고 게임에 대한 집중력을 가장 크게 떨어뜨리는 콘텐츠이기도 합니다. 필드 면적이 넓은 편은 아니지만, 캐릭터의 이동 속도가 느린 편인데다 보물상자 및 유실물 등을 전부 수집하기 위해선 맵 구석구석 빠짐없이 수색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동선이 억지스러울 정도로 복잡한 편이죠. 한편, 간단한 등장인물간 대화마저도 부대 편성 후 모험 모드를 거쳐야 한다는 점도 게임의 진행 속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입니다.
또, 모험 모드 필드에선 적들이 배회하는데요. 적과 조우하면 필드 상에 그리드가 형성되며 전투가 진행되는데 소수의 적, 매우 좁은 공간, 존재하지 않는 타일별 지형 특성 등으로 매 전투마다 전개가 비슷합니다. 조우시 선공으로 적의 체력을 깎아놓은 다음 적 캐릭터의 좌·우측 또는 후면으로 각종 스킬을 욱여넣어 1~2턴만에 전투를 마무리하는 식으로요. 참고로 적과 조우시 배후에서 선공하면 전투를 훨씬 유리하게 시작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선 캐릭터가 ‘걷기’까지 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동속도가 느린데, 걷기까지 하면 훨씬 더 답답해지죠.
전술 전투 모드에선 모험 모드와 비교했을때 큰 규모의 전투가 펼쳐지지만, 진짜 ‘대규모 전투’라 불리기엔 다소 아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특정 전장은 그 어떤 전략도 무용지물이 될만큼 일방적으로 아군에게 불리하게 구성되어 있기도 하고, 앞서 언급한 타일별 지형 특성이 없다는 특징도 이어지지요. 결국 이올린 같은 캐릭터를 온전히 보전해 전장 한가운데서 초필살기를 날려 전투를 끝내는 패턴의 반복입니다.
전투에 투입되는 캐릭터들의 육성 역시 즐거움보단 지루함·답답함이라는 감정이 먼저 다가옵니다. 일단 적잖은 수의 캐릭터가 전직을 한 상태로 합류해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키운다’라는 느낌을 받기 어렵게 합니다. 여기에 1차 전직 요구 레벨은 25, 초반부터 부대에 합류해 있는 초필살기 미보유 캐릭터에게 경험치를 꽤 몰아준다고 해도 10챕터쯤 돼서야 전직이 가능했는데요.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한꺼번에 다수의 적을 제거해 다량의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는 초필살기 보유 캐릭터만 실컷 레벨업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전반적인 비주얼 완성도 및 기술적인 부분은 체험판보다는 훨씬 나아졌지만, 그래도 요즘 나오는 게임과 비교하면 많이 처지는 편입니다. 여기에 끊김, 프레임 드랍, 느린 텍스쳐 로딩 및 뭉개짐 등도 초필살기 연출, 스토리 컷씬, 전투 돌입, 화면 전환 등 다양한 지점에서 자주 발생해 게임에 대한 몰입을 해치죠.
‘창세기전’,
진정한 부활은 아직…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의 의의는 ‘창세기전 1·2’의 매력적인 스토리를 풀보이스 및 3D 컷씬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로 갈무리할 수 있습니다. 원작이 현재 플레이하기 어려운 게임인만큼, 원작팬 입장에선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워 할만하죠. 그러나 ‘창세기전’의 진정한 부활, 그러니까 앞서 언급한 ‘파이어 엠블렘’이나 ‘슈퍼로봇대전’처럼 지금도 살아 숨쉬는 IP로 되살리는 것까지는 역부족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요즘 게임에 견줄 수 있는 기술적 완성도와 게임 플레이 시스템을 갖춰야 가능한데,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은 이 기준에는 다소 부족한 게임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창세기전’ 플레이를 어깨 너머로 보기만 했거나, 이름만 들어봤던 이들이라면 실망할 수 밖에 없죠. SPRG가 보기드문 시대다 보니, SRPG 팬 입장에선 아쉬움이 더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모습을 드러낸 결과물로서는 아쉽습니다만, 라인게임즈의 ‘창세기전’ 부활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는 점에서는 희망을 걸어볼 만 합니다. 그렇기에 다음 리메이크에선 발전된 모습으로 원작팬은 물론, 신규 유입 유저들에게도 만족감을 선사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