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에 이어 또 한 번 반가운 소식이 들려올 전망이다. ‘한국의 장(醬)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지난 5일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 평가에서 ‘등재 권고’를 받았으며, 최종 결정은 12월 2~7일 파라과이에서 열리는 제19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이루어진다. 등재 권고 판결이 번복된 사례가 거의 없는 만큼 사실상 등재가 확실하다.
최근 넷플릭스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에 주재료로 등장해 세계인의 관심을 받은 장 트리오(간장·된장·고추장)는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장이 들어가지 않는 음식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 그러나 정작 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과거와 달리 집에서 장을 담그는 일이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장 문화를 알리고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기원하기 위해 코레일관광개발이 장 담그기 체험 관광 상품을 출시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하고 한식진흥원이 주관하는 ‘K-미식벨트’ 사업의 첫 주자, ‘K-미식 장 벨트’(이하 장 벨트 투어)다. K-미식벨트란 지역별 농업 자원과 식품 명인, 향토 음식 등을 결합한 미식 관광 상품이다.
지난 20일부터 상품 판매를 시작한 장 벨트 투어는 1박 2일간 담양과 순창에서 장을 직접 만들고 장과 관련한 관광지를 둘러볼 수 있는 체험형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여행플러스가 먼저 체험한 장 벨트 투어의 생생한 후기를 전한다.
01. 간장과 된장이 하나라고? 놀라움의 연속 ‘장 가르기’ 체험
“메주를 소금물에 넣어 숙성한 후 거르면
액체는 간장이 되고 건더기는 된장이 됩니다.”
기순도 명인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35호 기순도 명인에게 간장과 된장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전남 담양에 위치한 고려전통식품을 찾았다. 기 명인의 설명을 듣던 중 간장과 된장이 동시에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참가자 대부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걸 아셨으니 이제 한국인이 되신 겁니다.” 기 명인이 웃으며 시범을 보였다.
하나의 메주로 간장과 된장을 만드는 방식은 한국만의 고유한 전통이다. 기 명인에 따르면 메주가 없는 중국이나 일본은 ‘된장은 된장대로, 간장은 간장대로’ 만든다. 그래서 한국에서 간장과 된장을 만들 때는 장을 ‘가른다’고 표현한다.
장 가르기 체험에 앞서 기 명인이 직접 만든 간장과 조청, 된장과 고추장을 시식했다. 기 명인의 장은 천일염 대신 죽염을 사용해 짠맛이 덜하고 감칠맛이 풍부하다. 짜지 않으면서 맛이 좋아 함께 제공된 오이와 가래떡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중에서도 딸기를 넣어 만든 딸기 고추장은 아이들과 외국인에게 인기다.
시식 후 본격적으로 장 가르기 체험이 시작된다. 기 명인이 손수 메주를 발효시키고 죽염으로 염지한 장물을 깔때기로 걸러 유리병에 옮겨 담으면 순식간에 간장 한 통이 완성된다. 남은 메줏덩이를 꺼내 그릇에 담아 으깨면 그게 바로 된장이다.
이렇게 가른 간장과 된장은 용기에 담아 이름을 적어 집에 가져갈 수 있다. 이미 메주를 오래 숙성했기 때문에 바로 먹어도 되지만 2~3개월 숙성하면 더욱 깊은 맛이 난다. 이후 간장 김치와 된장국 요리 체험도 진행한다.
고려전통식품의 마당에는 1200여 개의 옹기가 오와 열을 맞춰 늘어선 장관이 펼쳐진다. 52년 동안 장을 만들어온 기 명인의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곳에서 숙성된 간장은 숙성 기간에 따라 청장(1년 미만), 중간장(3~5년), 진장(5년 이상)으로 나뉜다. 기 명인이 칠흑처럼 검은 진장이 담긴 옹기를 열어 그 맛을 직접 보여준다.
마당에는 전통 장 체험에 참여한 수강생들의 장이 담긴 옹기도 놓여있다. 각자의 이름과 염원을 버선 모양 종이에 적어 옹기에 걸어 뒀는데, 유독 외국어가 눈에 많이 띈다.
최근 한국의 발효식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전 세계 레스토랑에서 기 명인을 찾아와 장 담그기를 배운다. 현재까지 미국, 일본, 칠레, 인도 등 16개국 30여 개의 레스토랑과 단체가 찾아와 장을 만들고, 그 장을 이용해 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02. 옹기에 버선을 왜 거꾸로 매달까? 버선 모빌 만들기
고려전통식품 마당의 옹기에는 왜 버선 모양의 종이가 걸려 있을까? 그 답은 삼다리 내다마을에서 찾을 수 있었다. 과거 선인들을 장을 담근 후 장이 맛있게 익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장독에 금줄을 둘렀다.
금줄에는 숯(검게 푹 익으라는 의미), 고추(잡귀를 쫓는 의미), 대추(달게 익으라는 의미)를 걸었다. 또 장맛이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처럼 오래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솔잎을 달기도 했다. 그러고는 장독에 버선을 거꾸로 붙였다. 장독을 타고 올라오는 나쁜 잡귀를 버선에 빠지게 해 장맛을 지키려는 염원을 담은 문화다.
장 벨트 투어에서는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버선 모빌 만들기 체험을 진행한다. 먼저 버선 모양의 한지에 소원을 적은 종이를 솜과 함께 넣어 봉인한다. 그 후 금줄을 의미하는 끈에 구슬, 대나무, 맑은 소리가 나는 풍경을 함께 엮는다. 중요한 점은 버선을 거꾸로 매달기다. “기원의 의미를 지켜야 하니 꼭 거꾸로 걸어주세요” 체험을 진행한 김미선 운영자가 거듭 강조했다.
모든 재료를 엮은 후 마지막으로 빨간 리본을 버선에 묶어 마무리한다. 이 리본은 한복 저고리 고름 매는 방식으로 묶는다. 요즘 사람들은 저고리를 매는 기회가 적어 일부러 고안했다는 김 운영자의 말에서 전통을 알리려는 마음이 묻어난다. 완성한 버선 모빌을 힘차게 흔들어 종소리를 내니 나쁜 기운이 전부 달아나는 듯하다.
버선 모빌 체험을 진행하는 삼다리 내다 마을에서는 담양 전통 장의 핵심인 죽염이 만들어지는 대나무밭을 거닌다. 이어 대나무 이슬을 먹고 자란 찻잎으로 만든 죽로차 시음도 즐길 수 있다.
03. 에드워드 리가 반한 고추장 버터 … 그 맛은
담양에서 차로 20분만 가면 전북 순창에 도착한다. 순창하면 떠오르는 것은 단연 고추장이다. 순창에서는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64호 강순옥 명인과 함께 고추장을 만들어볼 수 있다.
순창장본가의 명인본가체험장으로 들어서면 메주가 잔뜩 매달린 벽과 크고 작은 옹기들이 반겨준다. 준비된 앞치마와 두건을 두르기만 해도 벌써 명인의 수제자가 된 기분이 들어 마음이 들뜬다.
고추장을 만드는 과정은 간장과 된장보다 조금 더 극적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재료 하나씩 섞을 때마다 ‘내가 아는 그 고추장’의 모습이 점점 나타나기 때문이다. 먼저 찹쌀가루를 물과 섞어 끓인 후 점도가 생기면 열을 식힌다. 여기에 조청, 메줏가루, 소금, 고춧가루를 순서대로 넣고 섞는다.
고춧가루를 넣기 전까지는 아리송하던 표정의 참가자들이 고춧가루를 넣고 나서야 “아!” 하고 웃는다. 그전까지는 묽던 혼합물이 고춧가루의 성분으로 점성이 생겨 비로소 고추장의 모습을 띄기 때문이다. 고추장은 숙성 환경에 따라 맛이 쉽게 변해 만든 고추장을 집에 가져가진 못하지만 참가자들에게는 강 명인이 만든 고추장을 제공한다.
순창장본가에서는 고추장 버터 만들기 체험도 진행한다. 넷플릭스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의 준우승자 에드워드 리 셰프가 스테이크와 함께 구워 호평을 받았던 그 고추장 버터다. 버터 30g에 찹쌀고추장과 꿀, 쪽파, 마늘 플레이크를 원하는 만큼 넣어 만든다.
말로 들었을 때는 상상이 가지 않던 고추장 버터를 실제로 먹어보니 예상보다 맵지 않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채소나 쌈에 곁들여도 좋지만 바싹하게 구운 빵에 발라 먹으면 어디서도 맛 본 적 없는 새로운 맛을 경험할 수 있다. 계량에 따라 맛이 달라져 다른 참가자와 고추장 버터의 맛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04. “옹기는 자연물” 장의 맛을 책임지는 옹기 만들기
장 벨트 투어는 순창옹기체험관에서 옹기 체험을 하며 유종의 미를 거둔다. 장을 완성하는 것은 다른 어떤 재료도 아닌 ‘시간’이다. 장이 좋은 맛을 내기 위해선 적정 기간 숙성이 필요하고,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옹기다. 장이 썩지 않고 잘 발효되려면 산소가 공급되어야 하는데, 옹기는 미세한 구멍을 가지고 있어 이를 가능하게 한다. 옹기를 두고 ‘숨 쉰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청자무형문화제 기능 보유자인 권운주 도예가가 옹기의 특징과 가치에 대해 설명하며 물레 체험을 진행한다.
“옹기는 자연물과 똑같다고 보면 돼요.
인체에 해가 될 리가 없죠.”
권운주 도예가
권 도예가가 말처럼 옹기는 흙과 물, 불로만 이뤄졌다. 흙에 화학 물질을 첨가하지 않은 점토를 물을 묻혀 빚고 불에 구워 만들기 때문이다. 옹기는 단순한 저장 용기가 아니라 맛을 최상으로 끌어 올리는 자연 친화적인 발효기인 셈이다.
수백 년 전부터 옹기를 사용해 온 조상들의 지혜에 경외감이 든다. 옹기 체험에서는 물레를 활용해 자기만의 그릇을 만들 수 있다. 직접 만든 그릇은 권 도예가가 구워 한 달 후 자택으로 배송해 준다.
장 만들기, 옹기 체험, 버선 모빌 체험까지, 1박 2일 일정에 장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이 녹아 있다. 이뿐만 아니라 장의 근본이 되는 깨끗한 물과 환경을 따라 담양의 죽녹원과 순창의 강천산을 탐방한다. 전 일정 동안 미식 해설사가 동행하며 장에 대한 유래와 장소 설명을 해주기 때문에 여행을 다 마치고 나면 저절로 ‘장 마스터’가 되어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장 문화를 체험 해보니 매일 식탁에 올라오던 장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장 한 숟갈에 담긴 정성을 음미해 본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장 벨트를 시작으로 2032년까지 김치벨트, 비빔밥벨트, K-치킨벨트 등 30개의 테마로 K-미식 벨트 사업을 조성할 계획이다. 코레일관광개발은 ‘K-미식 장 벨트’ 상품 출시를 기념해 12월 13일~14일 운영에 한해 정가의 60% 이상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한다.
글=김지은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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