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수소에 베팅하는데…한국만 ‘역주행’, 에너지 위기 자초하나


중동 전쟁으로 촉발된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위기가 장기화하면서 수소가 화석연료를 대체할 전략 자산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와 수소위원회(Hydrogen Council) 등 글로벌 기관들은 앞다퉈 수소의 에너지 안보 역할을 강조하고, 중국·일본·유럽연합(EU)은 수조 원에서 수십조 원 규모의 재정을 수소 산업에 집중 투입하고 있다. 하지만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3.7%에 달하는 한국은 반대 방향을 택했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 93.7%…국민 세금으로 메우는 유가 충격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의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93.7%로, 30년 넘게 90%대 상단에 고착된 상태다. 이 구조적 취약성은 중동 분쟁이 장기화하면서 숫자가 아닌 현실로 국민 앞에 드러나고 있다.
산업통상부는 지난 18일 석유 최고가격제를 또다시 연장했다. 1997년 유가 자유화 이후 29년 만에 도입된 비상조치로, 올해 3월 13일 시행 이후 이번이 열 번째 최고가격 결정이다. 정유업계가 추산한 누적 손실은 지난 6월 중순 이미 5조 원에 달해 정부가 확보한 예비비 4조 2000억 원을 훌쩍 넘어섰다. 정부와 정유사 간 이견으로 3월 13일부터 6월 30일까지 발생한 1차 손실 정산조차 완료되지 못한 상태다.
IEA “수소, 한국·독일·일본의 공급망 다변화 핵심 수단”

IEA는 올해 6월 발간한 ‘글로벌 하이드로젠 리뷰 2026’에서 “수소가 화석연료 수입 의존도를 낮춤으로써 에너지 안보를 강화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특히 에너지의 70% 이상을 해외에서 조달하고 특정 국가 수입 비중이 25%를 넘는 취약 구조를 가진 국가로 한국·독일·일본을 지목하며, 재생에너지 기반 수소가 에너지 수입 일부를 대체하고 공급망 다변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수소의 가장 큰 강점은 ‘국내 생산 가능성’이다. 석유·가스는 특정 지역에 매장량이 집중돼 있지만, 수소는 재생에너지나 원자력 발전 전력으로 물을 전기분해하는 방식으로 만들 수 있다. 음식물 폐기물, 하수 슬러지, 가축 분뇨 같은 유기성 폐기물도 수소 생산 원료로 활용할 수 있어 자원 빈국에게 실질적인 에너지 자립 수단이 된다.
수소위원회가 이달 발간한 ‘글로벌 하이드로젠 컴퍼스 2026’은 수소를 “탈탄소 수단을 넘어 에너지 안보, 회복탄력성,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전략적 자산”으로 규정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청정수소 관련 누적 확정 투자 규모는 1300억 달러를 넘어섰고, 최종투자결정(FID)을 통과한 프로젝트도 570개 이상으로 늘었다. 가동 중인 청정수소 생산능력은 연간 약 170만 톤으로 전년 대비 70% 증가했다.
中 80억 위안·日 3조 엔·EU 5억 유로…글로벌 수소 레이스 ‘실행 단계’
글로벌 수소 정책은 선언적 단계를 넘어 실행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국가 차원의 수소 전략을 보유한 국가는 2021년 23개국에서 2026년 66개국으로 3배 가까이 늘었다.
중국은 수소 산업 전반을 대상으로 5개 도시군에 4년간 최대 80억 위안을 지원하는 2차 시범사업을 추진 중이다. 일본은 3조 엔 규모 재원을 투입해 저탄소 수소와 화석연료 간 가격 차액을 최장 15년간 보전하는 장기 차액 보조 정책을 운용하고 있다. EU도 유럽수소은행을 통해 재생 수소 생산자에게 최장 10년간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올해 7월 4차 경매 초안을 발표하며 5억 유로 규모 공모를 예고했다.
한국, 세계 최초 수소법·입찰시장 만들고 스스로 발목 잡다

한국은 수소 분야에서 상당한 선도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2020년 2월 세계 최초로 수소법을 제정했고, 2024년 5월 청정수소 발전 입찰 시장을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개설했다. 연료전지와 수전해 분야에서도 높은 기술력을 인정받아 왔다.
하지만 2026년 들어 정책 방향이 급격히 선회했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이달 초 공개한 2027년 예산안에 따르면 수소전기차 보조금은 5762억 원에서 4457억 원으로 23% 삭감되고, 수소충전소 보조금은 1897억 원에서 1197억 원으로 37% 줄었다. 세제 혜택도 줄줄이 종료된다. 승용 수소전기차 개별소비세 감면은 2027년부터 단계적으로 축소돼 2028년 말 완전히 사라지고, 취득세 감면은 2027년 말 일몰을 앞두고 있다. 시내·마을·농어촌버스에 적용하던 수소전기버스 부가가치세 면세는 당초 계획보다 2년 앞당겨 올해 말 조기 종료된다.
수소 발전 입찰 시장도 위축됐다. 일반수소 발전 입찰 물량은 1300GWh에서 930GWh로 줄었고, 청정수소 발전은 500GWh에 그쳤다. 더 큰 문제는 예측 가능성의 상실이다. 수년 치 입찰 물량을 사전에 공개하던 관행과 달리, 올해는 2026년 물량만 확정하고 2027년 물량은 내년에 결정하기로 했다. 기업들이 1년 후 시장 규모조차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업계에서는 “정책 불확실성이 지속될 경우 정부의 수소 로드맵을 믿고 투자해 온 기업들이 진퇴양난에 놓이고, 한국의 수소 리더십은 물론 산업 생태계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수소 연료전지, 수전해 설비, 수소충전 인프라, 수소 모빌리티 관련 기업들은 보조금·세제 혜택 축소와 입찰 물량 감소가 맞물리면서 투자 회수 기간이 길어지고 신규 투자 결정이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에 직면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