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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프렌즈] 강아지와 산책을 하며 알게 된 것들

제작을 맡긴 제품을 확인하러 거래처를 찾았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에 내 얼굴을 확인한 거래처 사장님이 곧바로 내 정강이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이전에도 비슷한 제스처를 보인 사람들이 생각나 슬며시 웃음이 터졌다. 상대의 아쉬워하는 눈빛에, 묻기도 전에 대답했다. “오늘 같이 안 왔어요. 다음에는 꼭 같이 올게요!”

늘 내 정강이 정도의 높이에 서 있는 작은 개, 베라를 찾는 것이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베라를 반기지 않은 곳이 없었고, 그래서인지 베라와 함께 어딘가를 향할 때, 사람들의 부드러운 표정과 다양한 목소리를 보고 듣는 일이 조금 재밌어졌다. 그 사이에서 나의 일은 내 개만이 가진 언어를 조금씩 알려주며, 편안한 만남에 필요한 거리감을 조정해 주는 것이었다. 함께 다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개 역시 사람과 상황에 더 노련해졌다. 예를 들어 공연이 시작돼 주위가 시끄러워지거나, 많은 사람이 다니더라도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 한자리에서 내 일이 끝나길 기다리는 식이었다.

가까이에서 나를 지켜보고 기다리는 존재가 있는 세상을 다시 시작하는 일은 살짝 버겁고 두려웠다. 고양이 두 마리를 차례로 노환으로 보내고, 적막함에 사로잡혀 잠 못 이루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잠자리에 누워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켰다. 반려동물과 반려인을 연결해 주는 ‘포인핸드’였다. 도움이 필요한 개와 고양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잠들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해맑게 웃고 있는 어떤 개의 얼굴을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너는 웃고 있구나. 성격이 참 좋은가 봐.’ 실은 목이 말라 혀를 쭉 빼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친구들에게 그 개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리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기다렸다. “뭘 고민해? 어서 가서 데려와!”라는 말.

“불편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개를 생각해서 여쭙는 거니 답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싱글 여성으로 언젠가 결혼하게 된다면, 또 임신해서 아이를 낳는 등 여러 가지 상황에 처한다면 그럴 때 어떻게 대비하실 수 있나요?” 입양 인터뷰를 담당하는 봉사자가 전화 너머로 물었다. “글쎄요. 아직 결혼 생각은 없지만 결혼한 사람도 헤어지기도 해요. 경제적 상황이 갑자기 나빠질 수도 있고, 누구나 미래는 몰라요. 다만 16년 동안 어떤 상황에서도 두 마리의 고양이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했기 때문에 상황의 변화가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삶을 포기하게 놔두지 않으리란 확신은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입양을 결정하시겠어요? 아니면 오셔서 보고 결정하시겠어요?” 잠시 마음 한곳에 숨겨둔 깊은 그리움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래, 우리가 인연이라면 서로 알아볼 거야’라는 마음과 왠지 두려워서 유예하고 싶은 마음이 번갈아 찾아드는 걸 감지하며 대답했다. “가서 만나고 결정할게요”라고.

아침 일찍 한달음에 달려온 친구 두 명과 순천으로 향했다. 차가 공터에 도착하자마자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꼬리를 흔들며 짖는 개를 보면서 살짝 겁이 났다. 내가 온전히 책임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를 인터뷰했던 봉사자는 내가 준비한 하네스와 켄넬, 간식을 보고 “바로 데려가실 거죠?”라고 물었다. 이미 친구 옆에 앉은 개는 살짝 떨고 있었다. 혹시 내가 일을 크게 저지른 걸까? 적어도 이 친구에게 나의 15년이 들어갈 텐데! 이왕 15년을 같이 지낼 거라면 이렇게 지나칠 정도로 귀여운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눈을 떴을 때, 킁킁거리며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작은 개의 얼굴이 보였다. ‘이 사람은 누굴까? 여기는 어딜까?’ 개 역시 어리둥절한가 보다.

우리는 함께 출퇴근했다. ‘피곤한 개가 행복한 개’라는 말을 상기하며 좋아하던 자전거 타기보다 베라와 같이 매일 열심히 걸었다. 거리 두기가 한창이던 팬데믹으로 사람과 사람의 거리는 멀어졌지만 개와 나의 사이는 좁혀졌다. 예전에 했던 행사 음식 준비를 할 수 없었고, 사업장에서 음식으로 사람을 맞이하는 데도 제약이 생겨 앞날이 막막하던 시기였다. 그때도 개는 차분했고, 사람들에게 친절했다. 덕분에 나까지 덩달아 이른 아침 함께 동네 산을 누빌 동네 친구도 생겼다. 그 친구와 매 계절 숲길을 걸으며 길 위에서 개의 신나는 몸짓을 지켜봤다. 아름다운 숲을 신나게 누비는 개를 보며 인생에서 마주하는 예기치 못한 사건에 크게 흔들릴 수 있지만 여전히 고개만 돌리면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아름다움 또한 있음을 기억했다. 개와 막막했던 시간을 통과했고, 함께 걸으면서 달라진 내 마음을 들여다봤다. 얻은 것에도, 잃은 것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매일을 들여다보는 것. 어쩌면 그것이 개로부터 터득한 삶의 자세인지도 모른다.

개와 함께 사는 일은 고양이와 살 때와 활동량이 사뭇 달랐다. 그러나 변함없는 것도 있다. 내가 반려동물을 책임진다기보다 오히려 그들이 나를 기른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내가 일과 음식을 통해 편안하게 타인과 관계를 맺은 것처럼 베라는 내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개는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도 교류할 줄 알았다. 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존재를 분별해서 반응했다. 그러면서 ‘베라와 내가 함께 아는 존재’라는 관계의 울타리가 생겼다. 개는 내가 아는 사람에게 꼬리를 흔들며 매번 더 기억에 남을 순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남과 나’를 구분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끔 개로 인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야 했고, 원치 않는 간섭을 받을 때도 있었으며, 더러는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이 어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는 그걸 알 턱이 없다. 자신이 느끼기에 기분 좋은 시간을 나눴던 사람이라면, 곧바로 꼬리를 흔든다. 개는 만남을 번민하지 않는다. 이것이 개와 나의 가장 큰 차이였다. 개의 솔직하고 즉각적인 반응은 내게도 서서히 옮겨왔다. 개의 관계 맺기 방식을 말하자면 ‘다른 이의 일은 다른 이의 몫으로,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각별히’ 정도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개는 현재만 사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상황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숨기지 않을 것. 내게 중심을 둘 것. 지금에 충실할 것.’ 나와 베라는 함께 길을 걸으며 사는 방법에 대해, 또 서로에 대해 매일 배운다. 개도 고양이들처럼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날 것이다. 그때는 이미 떠난 고양이들이 가르쳐준 것을 다시금 떠올릴 것이다. 점점 기운이 사라져 마지막 숨을 뱉을 때까지 곁에서 체온을 나눌 것이다. 존재의 오고 갊에 대한 이치를 여러 우연이 겹쳐 만나게 된 보물 같은 작은 생명이 매일 다정히 가르쳐준다고 생각하면 오늘도 좀 더 열심히 살게 된다. 개와 나의 공통의 세상을 넓히며.

Writer 안아라

푸드 디자인 스튜디오이자 델리 숍인 홈그라운드(@ara_home_ground)대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이후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요리사의 꿈을 품게 됐다. 고양이 이안 · 이몬과 함께 했던 기억을 토대로 현재 2021년 3월부터 순천의 쉼터에서 발견된 작은 강아지 베라와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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