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의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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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주변 여자애들 대부분은 신에게 사랑을 묻곤 했다. “나는 그런 거 안 믿어”라며 절레절레하는 애들 몇 명과 독실한 부모님의 만류로 ‘못’ 보는 애들을 제외하면 거의 다. 궁합과 타로, 사주, 신점까지 장르는 다양했고 모든 점사를 ‘그랜드슬램’한 뒤 늦은 밤에는 분신사바까지 끝마쳐야 직성이 풀리는 애들도 있었다. 내 주종목은 타로. 학교 정문 앞 빨간 천막에 자리한 타로 언니의 나긋한 목소리는 귀를 타고 들어와 심장을 지배했다. “언니는 조바심 내면 안 될 것 같아. 그 남자에게는 다른 카드가 하나 더 보이거든.”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을 듣는 동시에 내 조바심은 대폭발했다. 전보다 더 미친 망아지처럼 서두르기 시작했고, 당연히 그 사랑의 끝은 실패였다. 그리고 나의 반복된 실패담에 질려 귀를 틀어막은 친구들을 뒤로한 채 나는 분리불안처럼 언니의 빨간 천막을 다시 젖히길 반복했다. 그러니 아마 짝사랑 건당 10만 원은 족히 썼을 거다.

우리는 왜 사랑을 점에 의탁할까? 길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저 내 두뇌로 알지 못하는 영역, 그 너머가 궁금해서.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 점술가의 발언에 정확도를 따질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저 듣고 싶은 말을 해주길, 틀렸다고 짐작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고 해주길 바라는 것 같다. 가이드를 줘도 따르지 않기도 한다. ‘그’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니 내버려두라고 해도(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에 혼자 분노해) 기어코 전화해서 울고불고하거나 곁에 다른 이성의 얼굴이 보인다는 말에 몰래(증거를 잡으려고) 휴대폰을 뒤지다가 신뢰를 잃고 헤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였으니까. 결국 점괘와는 상관없이 이별할 사람은 이별하고, 선을 넘는 사람은 넘고, 잡히는 사람은 잡힌다.

본인의 점을 치는 점술가라면 좀 다를까? 무속의 땅에 호기롭게 등장한 SBS 연애 프로그램 〈신들린 연애〉에 참가한 8인의 점술가는 타로 카드부터 가검, 오방기, 방울까지 각자의 점사 도구로 자신의 연애운을 점치며 운명의 상대를 찾는다. 작두 타듯 스케이트를 타고 ‘라면 먹고 가자’라는 말 대신 ‘우리 신할머니 뵈러 신당 가자’고 꼬시는 이들. 가장 잘하는 음식은 제수 음식, 데이트 신청은 부적으로 전달한다. 하지만 뛰어난 점술가인 이들도 사랑 앞에서는 답이 없나 보다. 연출을 맡은 이은솔 PD는 이 콘텐츠도 그 질문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말한다. “내 연애든 남의 연애든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만큼 어려운데,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현명한 연애를 할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남의 연애운을 점쳐주고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연애를 잘할 수 있을지 호기심도 있었고요.” 현재까지는, 글쎄다. 타로 마스터 조한나 출연자는 “자점을 보는 건 좌절이 아닌 팁을 얻기 위함”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운명을 자주 점치는데, 정작 마음에 드는 이성과 친해질 절호의 기회에서는 그 이성을 경쟁자와 남겨두고 자리를 비운다. 전화 상담으로 그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그는 문만 열면 눈앞에 있는데 말이다. 또 한 명의 타로 마스터 최한나는 운명처럼 느껴지는 상대와 종일 설레는 데이트를 마친 뒤 그 상대의 깃발 앞에 자신의 연애운을 봐달라며 무릎 꿇는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자 설레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신의 뜻’을 운운하며 마음을 힘겹게 단념하려 한다. 상대는 의아해하고. 사주 역술가들은 생년월일과 띠를 보고 운명이 될 상대를 미리 점지하지만 결국 다른 이를 선택하게 되는데, 한 역술가는 자신이 점친 것과 현실에서 흘러가는 사랑의 방향이 다르다는 걸 깨닫자 직업적 고뇌와 책임감, 그로 인한 혼란으로 울며 퇴소하기까지 한다.

점괘와 실제 감정 사이의 딜레마로 혼란을 느끼는 점술가들의 모습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당연히 더 진지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고뇌를 곁에서 지켜본 이은솔 PD는 “점술이 업이기에 점괘에 대한 확신이 강할 수밖에 없다. 직업 특성상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믿고, 그 순리대로 살아가려는 성향이 일반인보다 강할 수밖에 없으니까”라며 “특히 신내림을 받은 무당의 경우 자의와 상관없이 업을 받아들여야 하므로 ‘운명은 절대 거스를 수 없다’는 걸 본인의 인생으로 겪어온 케이스다. 그렇기에 자신이 느끼는 본연의 감정과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점괘 사이의 딜레마가 클 수밖에 없고, 그 고민의 깊이 역시 남다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니 그 고민의 결을 잘 따라가면 운명과 연애의 관계성이 전하는 본질적인 메시지에 닿을 수 있을 거라는 얘기다. 한편 퇴귀사이자 무당 박이율은 이 문제로 혼란스러워하는 출연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또렷이 전한다. “우리는 절대로 신이 아니잖아요. 한낱 인간이잖아요. 저는 여기 있으면서 ‘신령님, 신령님’ 이러지 않았고, 이곳에 하루하루 충실하고, 그 순간에 충실했어요. 그걸로 끝이에요. 근데 본인은 뭔가에 너무 많이 얽매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힘들지.” 과연 이 ‘연프’의 승자는 누가 될까? 신령님의 말을 따르는 사람일까 혹은 자신의 마음을 더 따르는 사람일까?

점술가들마저 고뇌하는 모습을 보며 깨달은 건 박이율의 말처럼 우리는 한낱 인간이라는 것이다. 알면서도 선택하고, 모르면서도 직진하고, 맞는 길을 알려줘도 다른 길로 향하게 된다. 확실한 건 바로 옆방 문을 두드리며 말을 건네는 사람, 미래보단 외로운 상대의 마음을 보는 사람, 사탕 한 뭉치라도 손에 쥐여주는 사람이 승산 있지 않을까? 승산을 떠나 적어도 사랑할 목적으로 왔지만 혼란에 빠져 그 기회마저 잃은 퇴소자와 그 순간에 충실하는 박이율 중 사랑의 기쁨은 후자의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점술가들마저 마냥 점사대로 가지 않는 걸 보면 정답을 안다고 해서 그대로 흘러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인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이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정답을 미리 알고 현명한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고, 정반대로 완전히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출연자 중 본인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리라는 걸 처음부터 점사를 통해 알고 있었음에도 자신의 신념대로 한 방향을 선택해 밀고 나간 친구도 있었어요. 저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고, 한편으로는 점술가로서 그런 선택을 한다는 게 무거운 일이라는 걸 알기에 감동하기도 했어요.” 점을 보는 이는 누구보다 절실히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 사랑을 점치는 일은 그것이 신통방통하든 허무맹랑하든 그 사랑을 이어가려는 일. 그렇다면 그 절절한 고백을 점술가보다 눈 앞의 상대에게 털어놓는 편이 낫다. 신들이 내민 손을 잡되, 걷는 건 자신의 두 발로 하라는 것이 바로 진정한 ‘신의 뜻’이다.

그렇다면 점사가 소용없냐고? 아니다. 내 고민을 대충 흘려듣는 친구보다 1000배쯤 나을지도 모르는 든든한 지원군이자 완벽한 파트너다. 이은솔 PD는 말한다. “사랑을 점치는 일의 의미는 사람 간의 인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정해진 운명이 실제로 있든 없든, 그걸 믿든 안 믿든, 다른 사람과 인연을 바라고 그 인연의 끝이 좋길 바라는 마음으로 점을 볼 테니까요. 프로그램을 만들며 느꼈던 건 이들이 운명을 믿기에 그만큼 인연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절절한 마음을 가까이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과분한 기회를 얻어 참 행운이죠.” 점사로 상대의 특성을 반추하고 관계를 되돌아보며 구해야 할 답은 상대의 속마음이 아닌 자신의 속마음. ‘그 사람의 마음이 어때요?’보다 ‘그를 사랑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하면 좋을까요?’에 가까운 화법으로 내면의 진솔한 에너지를 확장시키면 상대는 분명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신들린 연애〉 출연자들은 점사 문의 중 연애 관련이 80% 이상을 차지한다고 밝혔다. 점술로 확인하고 싶은 게 돈도 명예도 아닌 사랑이라니 이 얼마나 로맨틱한가. 그러니 당신에게는 ‘낭만’이 점지됐다. 자신을 믿고 승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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