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점심을 먹는 엄마로 살아온 지 10여 년이 됐다. 첫아이의 나이만큼 엄마 경력 연차도 쌓였지만 10년째 달고 있는 엄마라는 이름표는 아직도 어색하고 쑥스럽다. 엄마 혹은 주부로서 능력의 부족함이 느껴지는 날엔 나를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조차 부담스러운데, 문득 ‘나만 이렇게 못나게 살고 있나? 나만 이 역할이 여전히 어려운 건가. 또는 이대로 그냥 살아도 정말 괜찮은 걸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올라왔다. 분명 옆집, 아랫집, 뒷동의 친구, 아이의 학교 친구 엄마까지도 나처럼 혼자 점심 먹는 날이 대부분일 것임을 알고 있다. 나와 똑같이 혼자인 그녀들이지만, 멀리서 보았을 땐 나와 달리 능숙하고 안정감 있어 보였다. 함께 만나면 좋겠지만 의외로 엄마들의 모임이란 생각보다 성사되기 쉽지 않다. 아이가 아파서, 집안일이 많아서, 본인의 업무가 있어서, 자기계발을 해야 해서, 휴식이 필요해서 엄마들은 함께이길 포기하고 내가 가진 에너지를 오후에 쓰기 위해 대충 점심을 혼자 먹고 만다.
그런 나날을 묵묵히 버텨가던 어느 날, 어떤 연락을 받았다. 그녀의 기자 시절 연을 맺었던, 지금은 4학년 아들을 키우고 있는 엄마이자 아동심리 상담사로 활약 중인 지인으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그녀는 엄마, 여성들에게도 엄살을 부릴 수 있는 안전기지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 이야기에 나는 공감을 넘어 환호했다. 서로가 엄살도 받아주고, 상처에 밴드도 붙여주며 힘들고 지치면 쉬어 갈 수 있는 곳을 우리가 만들자! 순간 학창시절의 ‘양호실’ ‘보건실’이 떠올랐다. 양호 선생님께서 덮어주던 톡톡한 이불, 덮고 있으면 나른하게 긴장이 풀리던 그곳의 이불이 떠올랐다. 문밖은 소란스러웠지만 복도와 교실에서 벗어나 잠시 편히 누워 있을 때는 그 소란함조차 새롭게 느껴지곤 했으니까. 일상과 거리 두기가 필요한 우리들, 나아가 일상에선 실체하지 않는 불안을 이불처럼 덮고 있는 우리들. ‘이불안 여자들’ 프로젝트는 이런 생각에서 출발했다. 특히 여성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 중 ‘불안’을 다루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그 까닭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 중 가장 두렵고 외면하고 싶은 감정이 바로 ‘불안’이기 때문이다. 불안은 여성의 삶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능력’이자 ‘본능’이다. 그 사실을 이젠 많은 여성이 알고 있지만, 내가 지닌 불안을 꺼내 살펴보고 그 기원을 탐색하고 공감받고 지지받는 경험을 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난관이 트리거가 되어 내면에 차곡차곡 쌓아둔 불안이 터져나오는 경험은 안타깝게도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오고야 만다.
집단 상담의 성격을 지닐 수 있는 프로젝트인 만큼 안원을 최소화 한 결과 여섯 명이 8주 동안 함께하게 됐다. 신청서에 연령 항목도 만들까 고민했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서로의 나이가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역할과 감정에 집중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모인 우리 여섯 명은 휴직 중이기도, 회사의 대표이기도, 아르바이트 중이기도, 아이가 하나이기도, 쌍둥이이기도 했다. 매주 수요일 두 시간씩 준비한 프로그램을 수행했고, 일주일 동안 수행할 리추얼을 단톡방을 통해 진행했다. 불안의 조각, 나의 조각, ‘내면아이’의 조각을 모으고 불안을 잘 다루기 위한 레서피를 함께 만들어보기도 했다. 불안이라는 이불의 빨래를 마치면 서로가 가진 볕에 기대어 각자의 그늘을 꺼내 말렸다. 그중 가장 의미 있었던 활동은 내면아이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지금의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싫어하고 불안해하는 것의 탄생, 부정적 감정의 기원이 내면아이에게 숨어 있기 때문에 때론 잊고 지나간 감정을 다시 흙탕물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 했다. 어린 나에게 편지를 쓰고 참여자와 리더가 함께 돌아가면서 자신이 쓴 편지를 소리 내 읽었다. 내 삶에서 가장 아팠던 시절에 멈춰 서 있는 나에게 쓰는 위로와 응원하는 글쓰기는 무척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모두가 용기 있게 이야기를 써주었다. 서로의 고백을 듣는 한 시간 내내 울음바다가 됐지만,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서로의 엄마가 돼주었다. 항상 뭐가 그렇게 급하냐는 말을 듣는다는 한 참여자 분은 알고 보니 연년생인 예쁘고 공부 잘하는 동생 때문에 평생 쫓기는 맘으로 살아왔다는 걸 자각했고, 어떤 분은 새어머니에게 혹독한 학대를 당했지만 가해자의 삶 또한 불쌍하게 여겨 용서하고 싶은 본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자신의 아픔을 이젠 더 크게 인정하고 안아주게 됐다. 어머니의 인정을 위해 평생을 공부 잘하는 아이로 살아온 누군가는 이젠 인정받는 것보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스스로 써 내려가기도 했다. 아버지의 외도와 암이란 위기 앞에서 잘 버텨낸 자신을 더 이상 나약하게 여기지 않고 칭찬하고 사랑해 주겠노라 고백한 이도 있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우리가 다 함께 치유 과정을 잘 밟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부족하면 죄책감과 불안이 동반된다는 사실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한 이불안 우리의 삶은 분명히 조금씩 변화할 것이다.
얼마 전 오일장에서 고등어를 샀다. 생선가게 할머니께서 소량의 생선을 사는 나를 보시곤 말씀하셨다. “엄마가 잘 먹어야 합니다. 아이들 핑계로 좋은 거 많이 사 먹어둬요!”라고. 순간 너무 감사해서 고무장갑 낀 손을 꼭 잡아드리고 싶었다. 돌아보면 여성이라서, 엄마라서, 직면하게 된 육아의 경험들로 인한 다양한 감정을 다시 마주하고 해결해 나가야 하는 일의 반복이다. 경력이 단절되기도, 무기한 꿈을 미루게 되기도 하지만 나 또한 우리 어린이들 덕분에 재미난 이력을 쌓아가고 사람들을 쉽게 사귈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이 시절을 핑계로 야무지게 노는 것을 택한 여자! 오늘도 나는 온종일 아이들에게 빼앗긴 기운과 집중력 때문에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많이 쓰지 못했다. 그러나 나와 같이 휘청거릴 당신에게 씩씩하게 인사를 건넬 수는 있을 것 같다. “불안하게 혼자 먹지 말고, 이젠 같이 밥 먹어요!”라고 .
전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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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에코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그린마인드〉 편집장. 여성과 엄마로서 지속 가능한 삶을 고민하는 내용을 담은 〈육아가 한 편의 시라면 좋겠지만〉을 펴냈다. 새로운 프로젝트 ‘이불안 여자들’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