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에세이집 〈나를 키운 여자들〉을 내고 어느 독립서점에서 열었던 북토크. 고운 인상의 한 중년 여성이 손을 들더니 질문했다. 〈나를 키운 여자들〉은 영화와 드라마 속 여성들의 서사를 통해 이상하고 모순적인 ‘진짜 나’를 내밀하게 들여다본 책이다. 이 책에서 독자들이 특히 공감을 표시했던 것은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챕터였다. 이날 북토크에서 나는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하며 애정을 갈구했던 시간을 지나 엄마를 이해하는 과정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들려줬다. 질문을 했던 독자는 대학생 딸이 엄마인 자신을 원망한다고 했다.
책을 읽은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엄마에 대한 뿌리 깊은 애증이 절절하게 적혀 있는 딸의 책을 읽고 과연 엄마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엄마가 보내온 메시지는 ‘읽기 쉽게 잘 썼네’, 그게 다였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쿨하고 단순한 사람. 복잡하고 예민한 나와는 주파수가 다른 사람. 하지만 더 이상 엄마의 메시지를 보고 ‘우리 엄마는 대체 왜 이럴까’, ‘엄마는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라고 생각하며 상처받지 않았다. 엄마를 엄마인 채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아주 오랜 시간 끝에.
10대와 20대 아니 30대까지도 엄마는 내 인생의 화두였다. 엄마에게서 탈출하고 싶다가 엄마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가 엄마에게 날선 말을 퍼붓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세상 모든 딸들이 그렇듯 엄마에게 어떤 말이 상처가 되는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그러다가도 가장 힘든 순간에는 어김없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후에 인정받고 싶은 사람은 늘 엄마였다.
어떤 날은 나의 모든 못난 모습이 엄마 때문인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자꾸만 의식하고 비교하게 되는 것도, 타인에게 품 넓은 사랑을 주지 못하는 것도, 나 자신에게 높은 기준을 요구하며 가혹해지는 것도. 언제든 푹신하게 기댈 수 있는 엄마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안정감과 천진함을 나는 남몰래 부러워했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서 내가 왜 그렇게 엄마에게 질척댔는지 알게 됐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너무나 친밀하고 서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모유수유를 하는 동안 내가 입에 넣는 것 하나하나가 아이의 몸과 연결된다고 생각하자 숨이 턱 막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평생 고치고 싶었던 습관이나 기질을 아이에게서 발견할 때면 화가 나고 미안했다. 적어도 아이는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내가 엄마에게 받지 못했던 것들을 아이에게 해주고 싶었다. 남들은 엄마가 되면 엄마를 이해한다는데 엄마에 대한 애증은 더욱 깊어졌다.
엄마를 미워하지 않게 된 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느꼈던 감정만큼은 또렷하다. 부끄러움. 여기저기 아픈 곳은 늘어나는데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면서 외할머니까지 챙겨야 하는 엄마를 보면서 ‘내가 이 늙고 작고 약한 여자에게 대체 뭘 더 바라는 것일까’ 자각했던 순간. 엄마는 내게 더 내어줄 것이 없었다. 이미 엄마가 줄 수 있는 것은 엄마의 한계 안에서 다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엄마가 처음으로 안쓰러워 보였다. 엄마도 나처럼 지랄맞은 딸을 만나 참 고생이 많았겠구나. 엄마를 그저 한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나는 엄마에게서 독립할 수 있었다. 이제 그만 다음 챕터로 넘어갈 시간이었다.
얼마 전 정문정 작가와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가 쓴 〈다정하지만 만만하지 않습니다〉를 읽었다. 부드럽지만 명확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에서 내 마음에 유독 와 닿은 것은 부모님에 대한 대목이었다. 작가는 “부모와 다른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가 20대에 했던 거의 모든 행동의 원동력”이었다고 고백한다.
부모의 태도에 상처 받았다가, 속절 없이 기대를 품었다가, 절망했다가, 내 안에도 혹시나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태도가 새겨져 있을까 몸서리치고 경계하는 마음. “더 날카로운 표현을 찾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턱이 얼얼해”지는 것을 꾹 참으며 부모와 다른 내가 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마음. 자기연민 없이 담담한 어조로 써 내려간 단정한 글 속에서 작가의 그간의 고민과 노력이 읽혔다.
정문정 〈다정하지만 만만하지 않습니다〉 중에서
“잘 아는 뾰족함을 뛰어넘어 직접 꾸며낸 자립의 공간에서”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관계에서만큼은 실패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부모를 부모인 채로 바라본 채 나만의 길을 뚜벅뚜벅 개척해 가면서 우리는 어른이 된다. 엄마는 변하지 않았다. 엄마를 대하는 내 마음이 변했을 뿐이다. 가끔 생각한다. 엄마를 미워했을 때의 내가, 엄마를 이해하는 지금의 나보다 엄마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고. 그런데 나는 지금의 사랑이 훨씬 좋다. 벗어나야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는 이 건조한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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