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철의 시선에 비친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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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GAP CHUL

1980년대부터 한국의 정서를 담아온 사진작가 이갑철은 피사체의 형태보다 그 안의 에너지와 감정에 주목한 순간을 포착한다.

동양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국의 정서와 ‘한’을 담아온 당신에게 불가리와의 협업은 이전 작업과 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다. 로마에서의 작업은 어떤 경험이었나
서양 문화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 특히 로마를 담아내는 일은 내 작업을 확장시킨 동시에 매우 흥미로운 경험으로 남았다.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풍경은 비록 형태는 달랐지만, 한국과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피사체의 형태보다 내면의 침묵과 사유에서 오는 감정을 포착하는 일이다. 로마에서도 이 점은 변함없었다.
로마와 불가리에 관한 스토리텔링이 담긴 사진 작업은 어떻게 이뤄졌나? 당신의 예술적 비전을 브랜드와 어떻게 조율하면서 작품을 완성했는지 궁금하다
작품 제작 과정이 자유로웠다. 중요한 건 한국 사진작가 ‘이갑철’의 시선으로 로마를 담아내는 일이었다. 열흘 동안 도시를 조사하고 분석하는 게 불가능할 뿐 아니라 내 스타일과도 맞지 않았다. 로마를 그대로 맞닥뜨리고, 내 작업의 핵심인 직관과 무의식에 따라 작업을 진행했다. 로마의 아우라와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피사체에 대해 생각하거나 의미를 주지도 않았다. 물론 불가리 주얼리 세계의 영감이 된 콜로세움과 판테온 같은 상징적인 건축물을 유심히 관찰했지만 사진에 억지로 끌어들이지 않았다. 대신 압도적인 건축물에서 느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교차를 자연스럽게 담았다.
 ‘로마’(2024)

‘로마’(2024)

낯선 땅, 로마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 정서를 담기 위해 당신이 선택한 방식은
특별한 방법은 없다. 매일 아침을 먹고 거리를 나서, 해가 질 때까지 배회했다. 뚜렷이 뭔가를 찾으려 하지 않고,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마음속 침묵의 상태가 될 때까지 계속 걷다가, 셔터를 누를 수 있는 상태가 되면 피사체와 마주한다. 그 순간 사진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 계획하거나 이성적으로 판단해서는 나올 수 없는 사진들이다. 오직 내 감각으로 작업했다.
사진을 찍기 전에 고행하듯 피사체를 찾아다니며 대상에서 번져 나오는 정서를 포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행’이라는 표현은 불교에서 명상과 자기 수양, 해탈을 위해 수련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내게 있어 이 과정은 마음의 때를 씻어내고, 세상을 편견과 선입견 없이 바라보기 위한 노력이다. 이런 ‘고행’을 통해 세상을 좀 더 자유롭게 만나기 위해 오랫동안 애써왔다. 이것이 내겐 중요한 과정이다.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정돈된 상태에서만 순간을 낚아챌 수 있다.
 ‘로마’(2024)

‘로마’(2024)

 ‘로마’(2024)

‘로마’(2024)

생생한 현장 에너지를 전달하려면 컬러가 더 효과적일 텐데 특별히 흑백사진을 고수하는 이유는
형상에 집중하지 않기 위해 흑백을 선택한다. 흑백은 최소한의 표현 방식으로, 대상의 본질을 담아내는 데 적합하다. 컬러 사진에서는 색에 집중할 수 있어서 내면의 이야기가 사라지기 쉽다. 흑백사진이 형상보다 내면의 가치 그리고 삶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카메라라는 ‘인식 도구’를 통해 잡아내는 느낌과 정신, 감성에는 어떤 무의식적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무언가, 그것이 내가 사진으로 전하려는 메시지다. 피사체는 흐릿하게 표현되거나 수평 · 수직이 맞지 않아 흐트러지고 아웃 포커싱으로 형태가 왜곡된다. 이는 명확한 형태를 포착하는 것보다 사유와 추상을 표현하는 일이 내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사물 자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관람자가 로마 풍경을 바라보며 설정된 개념을 이해하기보다 사진과 처음 마주했을 때 전달되는 기운을 오롯이 느끼길 바란다.
당신에게 ‘영원한 재탄생’의 순간이 있다면
20대에는 지식에 의존한 사진 작업을 했지만, 어느 시점에서 정신적 자각을 하게 된 순간이 있었다. 지식이 지혜로 변하는 과정에서 대상의 핵심만 파악하고, 그 이상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고 깨달은 것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카메라를 들면 피사체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고, 오롯이 그것이 지닌 느낌만 다가온다. 이때 인간 이갑철로, 사진작가로서 재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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