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E CHAN HYO
독특한 스타일의 셀프 포트레이트 작업으로 우리를 둘러싼 보편적 인식과 가치에 의문을 제기해 온 배찬효 작가.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서로 다른 정체성이 만나 만들어내는 ‘충돌의 미학’을 이야기한다.
불가리와 함께한 이번 전시 주제는 ‘영원한 재탄생’이다. 작가 배찬효에게 잊지 못할 재탄생의 순간은
2006년 포토 저널리스트에서 아티스트가 되기로 마음먹은 때인 것 같다. 본래 내 전공은 포토 저널리즘이었다. 한국에서 보도사진학 석사를 마치고 게티 이미지 본사에 취업하기 위해 영국 유학을 떠났는데, 선배의 소개로 존 힐리어드 교수를 만나 런던대 슬레이드 예술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하게 됐다. 당시만 해도 나는 예술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는데 커리큘럼은 무척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했다. 경제 논리나 효율성에서 벗어나 실험적 시도를 하는 학생들을 보며 적잖은 충격을 받고 예술에 호기심을 갖게 됐다. 이후 사진과 순수예술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아티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셀프 포트레이트로 관심이 이동한 계기는
작업의 방향성이 부재했던 시절, 학교 과제로 무얼 내야 할지 몰라 대형 카메라를 들고 막연히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날은 춥고 종일 돌아다녔는데 별다른 진전이 없어 무척 힘들었다. 그러다 늦은 밤 우연히 지하철 역 앞 과일 가게에서 발길을 멈췄다. 장사를 마친 가게 앞엔 박스 등의 쓰레기가 쌓여 있었는데, 문득 이곳에서 나를 찍고 싶었다. 이방인으로서 소외감을 느끼던 내게 ‘버려짐’은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다. 그 감정에 솔직히 뛰어들고자 그 자리에서 탈의하고 주저앉은 내 모습을 촬영했다. 내 첫 번째 자화상 작업이었다.
중세 서양화 또는 동화 속 인물의 복식을 직접 입고 촬영한 ‘의상 속 존재’ 연작을 선보여왔다. 유학 시절에 느낀 소외감과 편견, 영국 속에서 동양인 남성의 사회적 위치를 시각화한 작업으로 안다. 서양 문화와 사상의 중심으로 들어가 그것을 비틀고 역으로 타자화한 시도가 인상적이다
동양인 남성으로서 마주한 차별과 오해, 개인적 콤플렉스를 직면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서양인이 느끼는 문화적 우월감에 의문을 제기하고 오랜 편견의 역사에 대한 탐구로 작업의 주제를 발전시켰다. 그렇게 ‘자화상’ ‘동화책’ ‘형벌’ ‘마녀사냥’ 프로젝트를 2006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진행하며 ‘의상 속 존재’ 연작으로 엮었다.
작품 속 당신은 주로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다소 번거로운 분장과 연출을 택한 이유는
여장을 했지만 여성성을 표방한 건 아니다. 개개인의 정체성을 성으로 구분하는 것이 어색하다. 생물학적으로 남녀를 구분하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또 다른 성’을 표현하려고 했다. 시대별 복식 변화를 충분히 이해하고 정확히 고증한 이유는 ‘과정으로서의 사진’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적절한 공간과 소품을 구해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일련의 행위가 중요했다. 다만 연출 자체에 목적이 있지는 않았으므로 ‘마녀사냥’ 프로젝트부터는 합성을 시도했다.
이후 당신의 화두는 종교와 신화, 절대적 믿음 같은 주제로 뻗어 나갔다. 또 사진과 설치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으로 보다 확장된 시각예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2017년부터 동서양 문화 갈등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은 내려놓고, 내 무의식에 집중하기로 했다. 템스 강 근처를 산책하다 우연히 그곳에 뛰어드는 상상을 계기로 ‘서양화에 뛰어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종교화나 신화 속 장면을 그린 명화들을 복사 촬영한 다음, 포토숍으로 일부를 지우고 내 모습을 합성했다. 이를 동물 가죽 위에 전사해 본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훼손했다. 이를 통해 인간이 만든 보편적 기준과 절대적 믿음에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2019년 인도 비엔날레에서는 힌두교 신 가네샤 석상을 도장(stamp)으로 만드는 설치미술 작업을 선보이며 표현법을 발전시켰다.
이번 전시 작품 역시 사진을 이용한 설치미술 작업에 가깝다. ‘영원한 재탄생’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해석했나
작품 구상에 앞서 공간을 살폈다. ‘영원한 재탄생’이라는 주제를 사진 미술관이라는 장소적 특성과 결합해 하나의 결과물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불가리로부터 협업을 제안받기 전, 서양을 향한 화해의 제스처로서 영국 피카딜리 서커스에서 한풀이 굿을 진행하려고 했다. 유독 그 공간에 끌린 이유를 생각해 봤다.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인 채 7~8갈래의 길과 연결된 장소로, 그와 같은 핵심공간에서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더라. 이런 내 욕구를 전시 주제와 연계해 생명의 근원으로서 자궁을 생각해 냈고, 전시공간 자체를 작품화하기로 했다. 여기에 나무와 돌, 가죽 등의 자연물에 이미지를 프린트함으로써 사진에 입체성을 부여하고 매체가 갖는 물질적 한계에 도전했다.
내게 불가리는 중성적인 여성성, 특유의 세련됨과 아이코닉한 디자인, 과거 유산에 대한 대담한 재해석을 감성적으로 선보여온 브랜드다. 여기에 이성적이고 인문학적 접근법을 토대로 전개해 온 내 작업을 나란히 병치하고, 서로 다른 두 정체성이 부딪힘으로써 만들어지는 혼종의 결과를 관람자에게 공감각적 방식으로 전달하고 싶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내 작업이 새롭게 해석되고 불가리가 관람자에게 새롭게 다가가길 기대한다. 이런 충돌의 순간이야 말로 무언가 태동하는 순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