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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담아, 예술을 담아

KIM WHANKI

©WHANKI FOUNDATION · WHANKI MUSEUM

©WHANKI FOUNDATION · WHANKI MUSEUM

“1955년 멀리 파리에서 처음 성탄절을 맞이하는 나의 향안에게. 행복과 기쁨이 있기를 마음으로 바라며 진눈깨비 날리는 성북동 산 아래에서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아준다. 너를. 나의 사랑 동림이.” 자신보다 1년 앞서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 아내 김향안에게 보낸 김환기 화백의 서신 일부. 말미에 남긴 ‘동림’은 김향안의 본명(변동림)을 가리킨다. 자신의 예술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다며 고민하던 김환기의 말을 듣고 “내가 먼저 나가보겠다”며 다음날 프랑스영사관을 찾아갈 정도로 당찼던 사람이 김향안이다. 1950년대, 낯선 사람과 언어 틈에서 어렵사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을 아내에게 김환기는 두 사람이 손수 지은 집 ‘수향산방’을 그려서 보냈다. 편지 속 한옥의 대문은 살포시 열려 있고, 왼편에는 두 사람이 함께 수집하던 달항아리가 놓였다. “오늘은 하두 심2(심심)해서 이런 것 사다 먹었지. 그러나 맛이 없어.” “지금 2시. 일하다 쉬며 이런 것 하다 생각해 봤어. 밖은 꽤 추운데 방안은 짤2(짤짤) 끌어요.” 김환기는 편지에 자화상을 그려놓고 “이 수염 난 친구 누군 줄 아나? 아주 호남이지?”라며 능청을 떤 적도 있었다. 때론 절절하게, 때론 장난스럽게. 종이 위에 꾹꾹 눌러쓴 글자와 러프한 스케치는 일견 가벼워 보이지만, 얇은 종이 아래 서로를 향한 지속적인 사랑의 표현이 묵직하게 깔려 있다.

GIO PONTI
COURTESY OF ARCHIVES OF AMERICAN ART, SMITHSONIAN institution

COURTESY OF ARCHIVES OF AMERICAN ART, SMITHSONIAN institution

그를 빼고 20세기 디자인을 논할 수 있을까? 건축과 인테리어, 가구, 의상, 무대, 출판 등 전방위 분야에서 활약한 ‘아티스트 중의 아티스트’ 지오 폰티 얘기다. 그가 이룩한 수많은 업적 중엔 ‘편지’도 있었다. 지오 폰티는 살아생전 수만 장의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지오 폰티 아카이브가 보유하고 있는 문서만 무려 9만6000장에 달한다. 전화가 있었지만 다양한 국가를 오가며 작업한 데다가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되는 디자인을 수도 없이 남겼으니, 왜 그가 주고받은 편지가 그토록 많았는지 조금은 수긍이 된다. 하지만 그의 편지가 특별한 건 단순히 방대한 양 때문은 아니다. 편지 하나도 허투루 쓰고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리에서 빠져나와 길게 길게 뻗어나가는 선, 그 선을 따라 쓴 글자들. 사진 속 편지의 주인공은 건축 역사가 에스터 매코이(Esther McCoy)다. 캘리포니아의 현대 건축을 세계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미국의 작가이자 건축 역사가로, 지오 폰티는 그를 미아 카라 아미카(Mia Cara Amica)라고 부르며 애정 어린 편지를 쓰곤 했다. 이 편지는 지오 폰티가 1966년 10월에 보낸 편지로 추측되는데, 폰티는 11월 13일 UCLA 미술관(현 라이트 갤러리)에서 개인전 〈The Expression of Gio Ponti〉 개막을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할 예정이라고 언급한다.

ALEXANDER CALDER
COURTESY OF ARCHIVES OF AMERICAN ART, SMITHSONIAN institution

COURTESY OF ARCHIVES OF AMERICAN ART, SMITHSONIAN institution

언뜻 수학 공식이나 암호부터 떠오르는 이것. 알렉산더 칼더가 뉴욕에서 온 화가 벤 샨(Ben Shahn)에게 쓴 편지다. 평소 알렉산더 칼더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다면 종이 위에 그려진 드로잉과 그 위의 숫자들이 그리 낯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모빌의 창시자이자 키네틱 아트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알렉산더 칼더는 조각가이기 이전에 공대생이었다. 1930년대, 그가 천장에 매달린 채 흔들리는 조각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순간은 그야말로 예술계에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조각가로 전향한 칼더는 자신의 공학도적 특성을 살려 매우 디테일하게 설계한 모빌을 선보였는데, 그런 경향이 이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편지의 용도는 초대장이다. 목적은 자신의 집으로 오는 길을 알려주는 데 있었다. 칼더는 워싱턴에서 출발해 메리트 파크웨이(Merritt Parkway) 46번 출구로 나오는 경로를 벤에게 손수 그려 보냈다. “당신이 주말이든 주중이든, 언제든 여기로 오면 무척 좋을 것 같아요. 물론 당신이 편한 때에 말이죠. 보통 손님이 오면 다락방에 모시는데, 이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성적 면모 가득한 앞장과 달리 뒷장엔 동료를 향한 애정 어린 메모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LUCIAN FREUD

“사랑하는 마이클, 내가 부유한 사람이라면 우편으로 입술과 가슴, 허벅지 두 개를 보냈을 거야.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갑상샘이 악화된 당뇨병 환자의 필체로 네게 진심 어린 위로의 글을 쓰는 것뿐이지. 식탁보의 패턴과 텍스처에 대해 이야기해 줄래? 곧 보자. 책 나오면 한 권 보내줘! 사랑을 담아, 루치안.”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내용의 편지. 영국 사실주의 화가 루치안 프로이트가 친구 마이클 넬슨에게 보낸 것이다. 거침없는 언행에 복잡한 사생활을 가졌던 그는 작품에서도 위선을 떨지 않았다. 또 루치안은 초상만 그리는 화가로 유명한데, 다만 문제는 그 초상이 그를 닮아 지나치게 솔직했다는 것. 얼마나 거침없었냐면 영국 여왕의 초상도 어딘가 언짢아 보이게 그렸을 정도다. 사진 속 편지에 검은 분필로 그린 얼굴 역시 어딘가 불안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누구의 얼굴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20대의 루치안이 남긴 스케치에서 특유의 화풍이 느껴진다. 루치안은 학창시절부터 친구나 연인, 부모님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특유의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한 재치와 애정, 심지어 무례한 말도 가득하다. 그의 편지는 템스 앤 허드슨에서 펴낸 서신집 〈Love Lucian〉에서 더 만날 수 있다.

EDITH SCHLOSS
COURTESY OF ARCHIVES OF AMERICAN ART, SMITHSONIAN INSTITUTION

COURTESY OF ARCHIVES OF AMERICAN ART, SMITHSONIAN INSTITUTION

“1981년 3월 25일, 대서양 한가운데, 자정, TWA항공 840편. 이본(Yvonne), 요시코(Yoshiko), 루디(Rudy), 락스트로(Rackstraw), 필립(Philip), 무티(Mutti), 매리앤(Maryanne), 마틴(Martin), 루이스(Louis), (중략) 미국에 머무는 동안 나를 도와주고 격려해 준 모두에게 사랑을 전하며 감사드립니다.” 독일 화가 에디트 슐로스가 비행 중 보낸 편지. 그는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도움을 준 동료 예술가 도러시 펄스타인(Dorothy Pearlsteins)과 그의 남편 필립(Philip)에게 보내는 편지를 이렇게 썼다. 아니, 그렸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나선을 따라 자음과 모음의 방향을 바꾸고, 글 주변에 코끼리와 사자, 야자수를 수채로 그렸다. 어린아이의 솜씨처럼 어딘가 엉성하고도 귀여운 그림에서 에디트 슐로스 특유의 화풍이 드러난다. 실수로 물감을 떨어뜨린 것처럼 보이는 색색의 점(역시 에디트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도 의도된 것이었다. 그래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에디트는 뒷장에 이런 말을 남겼다. “한밤중 비행기에서 감정의 발작을 느꼈어요. 짐을 정리하느라 바쁘네요. 내 모든 잡동사니와 일기장을 둘 보관소가 있으면 좋겠어요. 나는 버리는 데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말하자면 여전히 뉴욕에서의 시간을 되새기고 있어요.”

MOSES SOYER
COURTESY OF ARCHIVES OF AMERICAN ART, SMITHSONIAN INSTITUTION/ART DESIGNER · LEE YU MI

COURTESY OF ARCHIVES OF AMERICAN ART, SMITHSONIAN INSTITUTION/ART DESIGNER · LEE YU MI

이렇게 사랑스러운 할아버지가 있을까? 1964년, 미국 화가 모지스 소이어(Moses Soyer)는 손자 대니얼 소이어에게 다섯 마리의 강아지를 그린 편지를 보냈다. 한 마리 한 마리 특징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형태와 색을 구별해 그린 흔적이 역력하다. “이 중에 누가 마사(Martha)인지 맞추고, 붉은색 연필로 이렇게 동그라미를 그려봐. 엄마랑 낸시에게 뽀뽀해 주고 아빠에게 안부 전해줘!” 아마도 마사는 모지스 자신 또는 가까운 이웃이 키우던 강아지가 아닐까? 대니얼은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강아지에 대한 이야기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을 테고, 보는 순간 바로 마사를 알아봤을 것이다. 편지 오른쪽 아래, 푸들처럼 보이는 강아지 위로 희미한 동그라미가 그려진 데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한편 1970년 소이어가 대니얼에게 쓴 또 다른 편지에는 크리스마스 인사와 새해 덕담, 편지 말미에 마사가 그려져 있다. 이 다정다감한 편지는 20여 년 전에도 있었다. 모지스는 그의 아들 데이비드가 여름 캠프를 떠났을 때도 편지를 보냈다. 그것도 그림이 잔뜩 그려진 편지 말이다. 아내와 함께 데이비드가 준 편지를 읽는 자신의 모습, 키우는 개와 고양이, 야구선수 디지 딘(Dizzy Dean)이 볼을 던지는 모습 등을 한데 모아 그렸다. 역시 다정함이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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