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에서 태동한 로마 퍼블리케이션스(Roma Publications)는 그래픽 디자이너 로허르 빌럼스(Roger Willems)와 아티스트 마르크 나흐참(Marc Nagtzaam), 마르크 만더르스(Mark Manders)가 설립한 독립 출판사다. 이들은 책을 기록 도구가 아닌, 예술을 담아내고 탐구하는 무대로 변모시켜 왔다. 고유한 형태와 감각을 지닌 책은 하나의 작품이 돼 예술가와 독자 사이에서 깊은 교감을 불러일으켰다.
1998년, 두 명의 아티스트와 함께 출발한 로마 퍼블리케이션스는 어떤 비전을 품었나
처음부터 어떤 사명이나 목표를 두고 시작한 건 아니었다. 예전 미술학교에서 함께 복사기로 잡지를 만들었던 친구 마르크 나흐참을 위해 얇은 책 「(Some)」을 디자인한 순간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인쇄를 준비하던 마지막 순간에 ‘Roma Publication No. 1’이라는 문구를 책에 추가하면서 언젠가 두 번째 책을 만들 수 있길 바랐다. ‘로마’라는 이름은 내 이름의 앞 글자 ‘Ro’와 마크의 이름 ‘Ma’에서 따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크 만더르스를 만났고, 이후 함께 더 많은 작업을 했다. 그의 이름도 ‘Ma’로 시작해서 이름을 그대로 쓸 수 있었다. 예술가 친구들과 진행했던 프로젝트의 자율적 정신이 지금 로마 퍼블리케이션스의 중요한 방향이 됐다.
지금까지 476권의 책을 펴냈다. 26년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나
부업으로 시작한 로마 퍼블리케이션스는 이제 내 전업이 됐다. 처음부터 사업으로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초기와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출간된 책이 많아지면서 관리와 체계적 운영이 필요해졌고, 모든 책에 일련번호를 부여해 정리하고 있다.
로마 퍼블리케이션스 홈페이지에도 번호와 함께 출간 순서별로 나열한 책 목록이 인상적이더라
홈페이지는 단순히 홍보 목적이 아니라 로마 퍼블리케이션스 전체 프로젝트를 기록하는 공간이다. 우리의 모든 책을 한데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고.
첫 출판물로 거슬러 올라가 보니 마르크 나흐참이 로마 미술상 ‘프리 드 로마’ 후보로 올랐을 때 그의 작품을 기록한 「(Some)」이 있더라. 책 내용을 손글씨로 완성했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전시 작품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마르크의 작업세계에 포함되는 또 다른 예술 작품으로 확장하고 싶었다. 손글씨와 그림을 사용해 그의 예술적 실천의 일환이자 그 자체로 독립된 출판물로 기능하도록 말이다. 단순한 카탈로그가 아니라 작품으로서 책을 만든 첫 시도였다.
책이 예술가의 또 다른 작품이라는 개념은 이후 로마 퍼블리케이션스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이 방식은 마르크 만더르스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에게 큰 관심을 받았다. 우리는 아티스트의 작품에 가까운 개념적 출판물을 만드는 데 집중했고, 가능하면 최소한의 디자인과 형식적 제한만 적용해 작품 본연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다양한 예술가들과의 협업, 그 시작은 언제나 순조로웠는지
함께 책을 만들고 싶은 진정한 열망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실제로 많은 아티스트가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길 때마다 다시 로마 퍼블리케이션스로 찾아와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 작업 과정을 돌아보며, 새로운 접근방식을 시도하고 계속해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책마다 다른 디자인과 배포 방식을 선택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각 프로젝트의 주어진 환경에 맞춰 최적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 방식이다. 초기엔 서점 배포 대신 다른 유통 방식을 찾았다. 108부로 한정한 책이 있는가 하면, 로테르담에선 신문 형태로 만든 책을 15만 부 인쇄해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다. 지금은 ‘서점용 책’을 더 많이 만들지만, 여전히 실험적인 프로젝트와 새로운 예술가들과의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예술과 책이 맞닿은 지점이 있다면
예술가에게 책은 여전히 소중한 매체다. 예술가의 책을 만드는 일은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지만, 그 안에 담긴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예술 작품이 전시장이나 갤러리에 한정되는 대신 책은 훨씬 더 많은 이에게 다가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책이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훌륭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 자체로 물성을 지니고 있는 예술품이니까.
로마 퍼블리케이션스를 찾는 독자들은 어떤 이들인가
각 책의 해당 아티스트를 알고 있거나 로마 퍼블리케이션스를 팔로하는 독자. 또 책 박람회, 독립서점, 미술관 숍 등에서 우리 책을 우연히 접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 중 다수는 미술과 디자인, 사진 등 창의적인 분야와 관련 있는 이들이다. 홈페이지와 소셜 미디어를 약간 활용하고 가끔씩 출간 행사나 전시회를 열지만, 처음부터 강요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우리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형 출판사나 아마존처럼 규모가 큰 디지털 플랫폼이 여전히 강세다. 이 가운데 독립출판사의 위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종이 책은 그 자체로 개성 있고 존재감을 가지며, 오래도록 아름답게 보관할 수 있다. 그리고 독립출판사는 대형 기업보다 훨씬 유연하고 상업적 목적이 덜하므로 더 감성적이고 창의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독립음악 레이블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창의적인 사람들이 책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한 독립출판은 계속해서 실험적이고 비주류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남을 것이다.
로마 퍼블리케이션스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든다면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를 무엇으로 채우고 싶은가
아마도 비워둘 것 같다. 침묵이 있어야 비로소 그 안의 목소리가 잘 들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