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드는 일의 소소한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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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희

책 때문에 거북목이 된 사람들을 위한 ‘터틀넥프레스’ 대표. 〈첫 책 만드는 법〉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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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동인천에서 열리는 마켓에 참여하기 위해 책과 굿즈 등을 잔뜩 넣어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1호선 급행열차를 탔다. 다행히도 열차는 한적했다. 자리를 잡고 캐리어를 고정시킨 후 ‘휴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앞 좌석 뒤편 창밖으로 가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장시간 지하철을 타는 날은 여행에 동행할 친구를 찾듯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선택한다. 오늘의 동행은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이 책은 뭐랄까, 분명 소설가라는 직업과 글 쓰는 일에 대해 요리조리 방향을 바꿔가며 이야기하는데, 읽다 보면 편집자라는 직업과 포개지는 부분이 많아서 아무 데서나 펼쳐 읽기를 반복하는 베이스캠프 같은 책이다. 페이지를 ‘촤르르륵’ 넘기자 한없이 개인적이고 피지컬한 파트가 펼쳐졌다. 몇 달 전 마지막으로 읽었을 때 너무나 공감한 나머지 책의 배를 쫙쫙 눌러놓고 필사했더니 그 펼침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이 파트에서 그가 하려는 이야기는 간단하다. 소설가가 날마다 대여섯 시간씩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 집중해서 이야기를 만들려면 피지컬이 중요하다. 정신적 힘과 육체적 힘은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그러면서 소설가를 야구 투수와 비교하며 소설가는 불펜에 대기 선수도 없고, 연장전 15회든 18회든 시합이 결판 날 때까지 혼자 던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책 만드는 일도 비슷하다. 기획안을 쓰다가, 교정지를 보다가, 보도자료를 작성하다가 ‘자, 저는 힘을 다 썼으니 뒷일은 구원투수에게 맡깁니다’ 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올 수 없으니까. 어떻게 됐든 자신이 맡은 책을 끝끝내 책임져야 한다. 매번 완투 경기를 치러야 하는 투수인 셈이다. 책 한 권을 만드는 데는 집필 기간을 제외하고 최소 3개월에서 길게는 1년여가 걸린다. 기간이 줄어든다고 해서 만드는 과정이 간소화되는 것도 아니고, 짧든 길든 모든 과정을 거쳐야 하니 빠르게 고강도로 경기를 치르느냐, 장기전으로 가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게다가 편집자 한 명이 각기 다른 과정에 놓인 책 두세 권을 동시에 진행하는 경우도 흔하니 여러 경기장을 오가며 여기서는 1회 말 안정적인 스타트를 다지기 위해 애쓰고, 저기서는 5회 초 역전을 당해 불안해하다가 또 다른 경기장에서는 11회 말 연장전에서 역전승을 만들기 위해 힘껏 공을 던지는 식으로 일하는 것과 같다. 물론 모든 경기를 완투해야 하는 건 기본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언제까지 책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한숨 섞인 의문이 슬며시 떠오른다. 새로운 생각이 나지 않아 나를 탓할 때, 크고 작은 결정 앞에서 길을 잃을 때, 넷플릭스 자막도 읽기 싫을 만큼 괴롭히는 맞춤법 앞에서 ‘조율’이라는 단어로는 설명 안 되는 관계 문제를 겪을 때, 공들여 만든 책이 조용히 사라질 때, 그리고 이 모든 난관을 온몸으로 버티다가 한계에 이르면 내가 언제까지 마운드에 설 수 있을지 의심하게 된다.

지하철의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에서 자세를 바로잡으며 건너편 사람들을 스윽 훑어보았다. 왼쪽 끝자리에 앉은 남성이 책을 무릎 위에 두고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을 만나다니. 반가운 마음에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궁금하던 순간, 세상에. 저 책은? 표지가 보이지 않았지만 멀리서 봐도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만들고 발행한 책이었으니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내가 만든 책을 읽는 사람을 지하철의 같은 칸에서 마주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했다. 감사 인사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소중한 독서 시간을 방해하면 안 되므로 그분이 내릴 때 말을 건네기로 했다. 가방에 있던 굿즈를 주섬주섬 꺼내 포장했고, 짧은 쪽지도 썼다. 그 책을 만든 편집자이자 출판사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놀랍고 신기하다 그리고 감사하다고. 포장한 굿즈를 손에 꼭 쥐고, 언제든 같이 뛰어내릴 준비를 한 채 그분을 바라보았다. 책을 코앞까지 가져와 집중해 읽다가 밑줄을 긋고, 생각에 빠졌다가 읽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작가와 함께 고민하고 글을 매만지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 시간이 지금 눈앞에서 다른 우주를 만나 새로운 의미를 만들고 있는 거다. 매번 역에 정차할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함께 내리기 위해 가방을 잡고 움찔움찔. 그런데 또 행운이 찾아왔다. 그분이 종착역인 동인천역까지 꼼짝하지 않고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종착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지하철 문이 열렸다. “저기요, 저기요!” 긴장해서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독자분 역시 신기해하며 “책이 좋아서 벌써 두 번째 읽고 있어요”라는 말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울퉁불퉁한 길을 힘겹게 걷는데도 입가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만난 독자들이 떠올랐다. 여러 번 읽고 있어요,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처음 알게 됐어요, 더 멋진 사람이 되어 보여드릴게요, 큰 도움을 받았어요, 다음 책도 기다릴게요···. 작은 책상에 붙박이처럼 앉아 일하고 있으면 불 꺼진 경기장의 마운드에 서서 혼자 공을 던지는 기분이 든다. 그때 그날을 떠올린다. 누군가, 어딘가에서 읽고 있다고. 책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우주를 만나고 있다고. 마켓이 열리는 행사장에 도착하니 크리에이터들이 각자의 창작물을 소중히 진열 중이었다. 나도 그 사이에서 분주히 준비를 시작했다. 관심을 끌 만한 문구를 써서 붙이기도 하고, 책도 이리저리 놓으면서. 오늘은 또 어떤 우주들을 만나게 될까.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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