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새해 바람에 날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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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리기태의 방패연 작품 ‘우롱’. 탈을 연상시키는 익살스러운 표정의 그림은 말 그대로 누군가 우롱하기 위한 것이다. 옛 서민들은 붉은 얼굴에 노란 눈, 우스꽝스러운 모양의 얼굴을 그린 연을 날리며 양반을 놀리기도 했다.

명장 리기태의 방패연 작품 ‘우롱’. 탈을 연상시키는 익살스러운 표정의 그림은 말 그대로 누군가 우롱하기 위한 것이다. 옛 서민들은 붉은 얼굴에 노란 눈, 우스꽝스러운 모양의 얼굴을 그린 연을 날리며 양반을 놀리기도 했다.

리기태 장인이 연을 날리고 만들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6세 때다. 리기태에게 연 만들기를 알려준 스승은 부친인 가산 이용안. 이용안의 스승은 이천석, 조부이자 조선시대 후기 방패연 원형 기법을 보유한 이다. 리기태는 일제강점기에도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산으로 들로 다니며 연을 날린 두 명인에게서 집안 대대로 이어 내려온 19세기 방패연의 원형 기법을 전수받았다. 영국왕립식물원(Royal Botanic Gardens, Kew)에 훼손된 상태로 소장된,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표준연 ‘서울 연’을 2011년 자문하고 원형을 복원하기도 했다. 전통 방패연에 자신만의 추상 회화를 그리며 발전시켜온 그가 말하는 연 놀이의 기쁨과 즐거움.

이름 앞에 호로 사용하는 ‘초양’은 무슨 자를 씁니까
회초리 초에 대양 양이에요. 댓살로 지은 연으로 대양을 다스리라는 의미죠. 황금찬 시인이 지어준 호입니다.

손에서 손으로 장인의 관습이 이어져 내려온 전통 방패연 기법을 고수해 작업하고 있습니다. 반면 연 위 그림의 뚜렷한 색채와 구성은 굉장히 동시대적이에요. 거의 형광빛으로 보이는 색면들이 눈에 띕니다
원형 기법은 고스란히 실현해야 합니다. 그래야 전통 공예의 명맥이 이어져요. 나는 먹도 만들어 씁니다. 소나무를 태워 가루로 만들고 아교를 섞어 먹을 완성해요. 하지만 그 어떤 전통이라 할지라도 시대에 맞게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해요. 본래 전통 연을 채색하는 색상은 자연의 색을 사용하기 때문에 화려하지 않아요. 서양의 미술 재료가 지닌 다양한 색상을 섞어 이를 밝고 화려하게 계승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색상을 계속해서 사용하죠. 나는 평생을 연과 함께 산 ‘연인(鳶人)’이에요. 이제는 4대째 이을 두 딸과 조카에게 정통 제작법을 전승하며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새색시’.

‘새색시’.

어떤 작품은 문양을 넘어 한 폭의 회화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미술 공부도 했나요
동덕여대 예술학장을 했던 이영훈 교수가 동양화를 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어깨너머로 그림 공부를 조금 했어요. 연 만들기는 과학성과 예술성, 창작성의 세 가지 요소를 두루 갖춰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날아오르지 못하면 연이 아니죠. ‘연인’이라면 실기와 이론을 겸비해야 하고요.

실제로 연 날리기 기량을 뽐낸 기록도 보유하고 있죠. ‘베이징 국제 연 축제 및 연날리기 대회’에서 챔피언을 획득했어요
대한민국을 비롯해 미국, 영국, 캐나다, 중국, 일본, 러시아, 터키, 뉴질랜드 등 세계 30개국의 연날리기 대표선수단이 참가해 토너먼트로 진행하는 대회입니다. 2018년에는 1등 상을, 2019년에는 대형 태극기연과 부채연, 장승연, 봉황줄연을 만들어 ‘원 포 더 롱기스트 카이트(One for the Longest Kite)’ 상을 받았습니다. 가장 아름답고 예술적이며, 긴 연에 수여하는 상이죠. 롱기스트는 가장 길게 연줄을 푼 자에게 주어지는 상이죠. 연의 역사는 중국이 더 깁니다. 2500년가량 됐고, 우리의 연 역사는 1400년쯤 되죠. 중국에서 우승을 거둔 경험이 자랑스러워요.

신호연의 일종인 ‘수리당가리’.

신호연의 일종인 ‘수리당가리’.

신호연, 도깨비연을 비롯해 다채로운 연을 작업해 왔습니다.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원과 삼각형 등 단순한 형태를 그려 넣은 연은 신호연의 일종이고, 전통 탈의 얼굴을 그린 연도 있죠. 연 디자인에서 특별히 애착을 갖는 모티프가 있다면
연 만들기에 입문한 이들을 가르칠 때 제1강이 신호연입니다. 문양도 단순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다음 제2강에서 자아상을 그리게 합니다. 본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거죠. 제3강에서 탈을 그린 뒤 창작성을 가미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작품은 ‘태양의 새’입니다. 기암괴석에서 솟아오른 오동나무 아래 닭 한 쌍이 기품을 내는 그림이죠. 조선일보에 두 쪽 분량의 풀 컬러 페이지로 실렸던 작품이에요. 판매 문의가 많았는데, 이 작품이 내 품을 떠나는 것이 아쉬워 아직 팔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기상을 나타내는 그림이라 특별히 좋아합니다.

전통 방패연은 만들기 까다로운 것으로 압니다. 이를 쉽게 만드는 개량법으로 1974년 ‘초양법’을 창안했죠. 방패연 만들기의 어떤 면을 쉽게 풀어낸 건가요
가오리연은 아이들이 만들어도 잘 납니다. 전통 방패연은 제작도 까다롭지만, 전문가 외 일반인이 날리기도 어려웠습니다. 웬만해선 잘 날지 못하고 왼쪽, 오른쪽으로 막 돌아요. 우리 방패연의 단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창안하게 된 겁니다. 이렇게 해서는 보급화가 어렵겠다 싶었죠. 스승님께서 늘 하신 말씀은 자연을 거스르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순응해야 한다. 자연에 순응하도록 만든 것이 초량법이에요. 옛사람들은 방패연을 만들 때 단단한 댓살 쪽을 억지로 반대쪽으로 휘어 붙였습니다. 댓살이 너무 강하니 조금만 날리면 연이 확 틀어져버리죠. 연 놀이를 숙련된 사람만 즐길 수 있으면 안 됩니다. 보통 사람들도 만들고 날릴 수 있도록 댓살을 본디 휘어지는 방향대로 자연스럽게 붙이는 것이 초량법입니다. 또 연을 날릴 때 높이 잘 올릴 수 있도록 댓살의 아래쪽은 깎아내리고 위쪽은 도톰하게 하죠.

‘나비’.

‘나비’.

2000년부터 열린 서울시민 연날리기 대회를 12년간 매년 주최하기도 했습니다. 연 날리기는 한국에서 굉장히 대중적인 놀이였죠.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한국에서는 사라져가고 있어요
아쉬움이 큽니다. 옛 선조들은 산성에 올라가 연을 날리면서 복을 빌었습니다. 정화수 한 사발 떠놓고 기도하는 것처럼요. 정월 대보름이면 서울 장안의 남녀노소 누구나 연을 만들고 들판에서 날렸어요. 동북아시아와 동아시아의 풍속을 소재로 다양한 작품을 남긴 영국의 여성 판화 작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가 한국에 왔을 때 이 풍경을 보고 ‘연 날리기’라는 그림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화투를 줬어요. 집 안에서 화투 놀이만 하고 나오지 말라는 거였죠. 야외에서 연을 하늘에 올려 노는 것은 좀 반항적인 놀이가 됐어요. 그때 우리 스승님들은 연을 봇짐으로 지고 나와서 날리다가 순사가 잡으러 오면 도망가고 또 다른 곳에서 날렸습니다. 요주의 인물이었죠. 약산 김원봉 선생이 밀정을 보내 이천석 선생님, 이용안 선생님을 찾아 대형 방패연 만드는 방법을 알아오라고 한 일도 있었습니다. 만주 벌판이 워낙 넓으니 먼 산등성이에서 연에 얇디얇은 ‘삐라(전단)’를 실어 바람 타고 확 뿌리려 한 거죠.

연을 만들고 날리며 살아온 세월이 남긴 것은
어린 시절 처음으로 연을 날렸을 때, 연이 수 천 미터를 쭉 날아가면 내가 나는 것 같았어요. 좋아하는 시조가 있습니다. “청풍연비백운희(淸風鳶飛白雲戱)/유심신선동석유(惟心神仙同席遊).” ‘맑은 바람에 연이 날아 흰 구름에서 놀고/내 마음 속뜻은 신선과 함께 어울리는구나’라는 뜻이에요. 나는 평생 연을 날리며 하늘을 알았어요. 하늘에 부는 바람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하늘에 띄워 날리면 연과 나 사이에 소통이 이뤄집니다. 그렇게 자연의 이치를 알게 됐다고 생각해요. 연 날리는 사람들은 오래 살아요. 편안한 마음으로 갈구하는 법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지금도 시간만 나면 연을 즐겨요. 연은 참 잘 배웠다 싶어요. 평생 내 삶은 연 그 자체입니다.

초양 리기태가 연을 제작하고 아내 최상숙이 그림을 그린 방패연 작품 ‘복깨비’.

초양 리기태가 연을 제작하고 아내 최상숙이 그림을 그린 방패연 작품 ‘복깨비’.

근래 리기태 장인의 연은 어느 하늘을 날았습니까
서울의 한강 변이요. 그곳에서 자주 연을 날려요. 얼마 전에는 내가 이사직으로 몸담고 있는 ‘아시아투데이’의 창립 19주년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또 아주 멋지게 연을 날렸습니다. 〈엘르〉도 기념해야 하는 날을 알려주시죠. 한번 멋들어지게 연을 날려볼 테니.

리기태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방패연을 만드는 리기태의 공방은 보테가 베네타가 전 세계 소규모 장인을 조명하는 ‘보테가 포 보테가스’에 선정된 한국 유일의 아틀리에이기도 하다. 그의 꿈은 언젠가 연 박물관을 세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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