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전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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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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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전화 안 받아”라는 사람들이 있다. 체감상 이 숫자는 점점 많아지고 있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에는 ‘전화 선호 vs. 문자 선호’ 같은 밸런스 게임도 있었던 것 같은데 메신저 앱과 단체 대화방, DM 등이 활성화된 이후 이 균형은 무너진 것 같다. 친구와 연락할 때는 “전화? 굳이?”가 주류가 됐달까. 실제로 누구와 자주 통화하냐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엄마’ 아니면 ‘회사 사람’이란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면 친구랑 전화는 안 하지.”

자연스럽게 ‘전화보다 톡(또는 DM)이 편하다’가 된 수준을 넘어 전화를 증오하는 이들이 있다. 아무리 통화하기 좋은 장소에 무료하게 앉아 있어도, 아무리 발신자가 편한 사람이어도 일단 전화 통화는 거부하는 콜포비아. 통화가 왜 그렇게 싫으냐고 물으면 이유는 제각각이다. ‘무슨 얘기를 꺼낼지 몰라서 싫다’고 답한 사람은 준비 안 된 화제에 바로바로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 불편하다고 했다. 불편함 이상으로 울렁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톡으로 신나게 얘기하다가 음성으로 전할 말이 있어 전화를 걸었더니 희한할 만큼 뚝딱거리던 친구가 떠오른다. 실시간 톡 중이라 받기는 한 모양인데 “저, 전화한 거야?”로 시작해 “토, 톡으로 해”로 끝났다. 꽤 오래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신선한 기억으로 남았다. 거래처가 아니라면 굳이 통화하지 않는 스마트폰 시대에는 친구의 전화 울렁증을 미처 모른 채 10년 지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단호한 통화기피자의 대척점에는 놀라운 통화주의자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꼭 연인이나 절친이 아니라도 연락처가 있고 말이 통하는 누군가에게 그저 전화를 걸어 한두 시간은 가뿐하게 수다를 떤다. 무슨 고민이 있어서도 아니고 ‘썸’을 타는 것도 아니다. 오가는 대화는 전혀 긴급하지 않은 내용뿐이다. 친하게 지냈던 한 통화주의자는 경기 시민이었다. 서울 시내에서 놀다 헤어지면 바로 전화를 거는데, 16분 뒤에 도착한다는 경기도 버스를 그가 기다리고, 승차하고, 하차하고, 집에 도착해 그의 반려견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다. 또 내가 살면서 만난 최고의 통화주의자는 대학 선배였다. 그는 졸업하고 유학을 갔는데, 거처가 정해지자마자 인터넷 전화를 연결했다. 용건 없이 곧잘 전화를 걸고 느슨한 수다를 떨면서 집 안의 온갖 잡일을 해치우는 그와 달리 나는 멀티태스킹을 잘 못했는데 그와의 훈련 덕분에 나중엔 좀 늘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스마트폰 시대 전의 이야기다. 통화주의자들은 멸종하고 있다. 유학을 간 선배는 스마트폰을 사면서 인터넷 전화를 해지했으나 메신저 무료 통화를 그만큼 이용하지는 않았다. 점점 바쁜 사회인이 됐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급격한 변화를 보면 기술이 라이프스타일을 바꾼다는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용건 없이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은 별로 없지만, 걸려온 수다는 즐겁게 이어가는 평범한 현대인이다. 그렇다 보니 별생각 없이 지내는 사이 친구와 목적 없는 전화 통화를 할 일이 거의 없어졌다. 가끔 멸종의 흐름을 거슬러 살아남은 통화주의자를 만난다. 어쩌다 친해져 메신저 단체방에서 가끔 대화하는 무리 중 한 사람이 ‘통화하실래요?’ 하고 개인 톡이 오는 순간! 이 경우 그는 내게만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통화할 수 있는 상황인 것 같으니 잠시 평범한 수다를 떨고 싶은 김에 전화를 거는 것이다. 오, 몰랐는데 당신은 통화주의자였군요. 반갑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2024년 12월. ‘비상계엄’이라는 단어를 시작으로 쏟아지는 뉴스로 하루하루가 살얼음 같은 시국이다. 시민들이 매일같이 국회 앞에 모이고, 전국에서 형형색색의 분노가 터지고 있다. 속보를 끝없이 새로 고침하다 신경증이 올 것 같던 순간,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딱히 자주 연락하며 긴밀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지만 틀림없이 지금 비슷한 심경으로 SNS를 보고 있을 친구.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거두절미하고 터지는 속에 대해 앞다퉈 털어냈다. 한탄하고 공감하고 염려하고 격려했다. 전화를 끊자 사라졌던 식욕이 돌았다. 메시지 시대여도, 각자의 일로 바빠져도 ‘굳이 전화’를 걸어야 할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통화주의자는 아니지만, 내란 주범들을 옹호하는 가족의 정치 성향 때문에 홀로 고통받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이두루

출판사 ‘봄알람’ 대표. 베스트셀러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등을 펴냈다. 현실 이슈를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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