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WOMEN W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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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Laurent

Saint Laurent

여성에게 옷은 그저 성별을 강조하고 집 안에서의 역할을 반영하며, 남성의 보호와 지원을 받는 종속적 위치를 상징하는 것뿐이었다. 예를 들어 코르셋과 장신구는 여성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제한했다. 이는 여성의 역할이 가정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를 반영했고, 여성의 신체 활동보다 그들의 외적인 아름다움과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치관을 담고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을 나타낸 의복이 오늘날처럼 크게 변화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제1차 세계대전과 여성 참정권 운동이다. 이 시기는 말 그대로 혼돈 그 자체였다. 전쟁으로 인한 남성의 부재와 동시에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중요해짐에 따라 패션 역시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Givenchy Balenciaga Stella Mccartney Sportmax

산업화, 도시화, 여성의 사회적 역할 등 다양한 변화를 맞이한 혼란의 시기에 활동한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헐렁한 재킷과 스트레이트 드레스, 트위드 수트 등 기존 여성의 아름다움만 고집한 코르셋 스타일을 버리고 오늘날 샤넬을 상징하는 아이코닉 룩을 탄생시켰다. 샤넬의 드레스는 몸에 꼭 맞지 않고 헐렁한 스타일로 우아하면서도 실용적인 면을 지향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진짜 여성을 위한 편안한 룩을 선보였다. 여성들에게 해방감을 준 샤넬의 옷은 좀 더 활동적이고, 기존의 성 역할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았으며, 여성의 새로운 역할을 반영한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매니시 룩(Manish Look)의 시초다. 매니시 룩은 여성복에 남성복 요소를 차용한 스타일로 전통적인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를 허문 최초의 스타일이다. 매니시 룩의 선구자 코코 샤넬이 여성 패션에 남성복의 실용적 요소를 넣어 자유를 추구했다면, 1930년대 독일 출신의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영화와 공적인 자리에서 매니시 룩을 선보였다.

1920년대 여성을 위한 컬렉션을 선보인 디자이너 코코 샤넬.

1920년대 여성을 위한 컬렉션을 선보인 디자이너 코코 샤넬.

1930년대 턱시도를 입고 공식 행사나 영화에 등장한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

1930년대 턱시도를 입고 공식 행사나 영화에 등장한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

그는 영화 〈모로코〉에서 턱시도를 입고 등장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는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켜 매니시 룩을 본격적으로 대중화시키는 데 큰 힘을 보탰다. 매니시 룩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이브 생 로랑. 그는 1966년 여성 턱시도 ‘르 스모킹(Le Smoking)’ 컬렉션을 선보였고, 그 덕분에 매니시 룩이 새로운 상징적 의미를 얻었다. 이는 여성이 패션으로 남성성과 권위를 표현하는 방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르 스모킹’ 컬렉션은 여성도 턱시도를 입을 수 있다는 발상에서 출발했다. 당시 턱시도는 남성의 공식적 저녁 복장이었는데, 이브 생 로랑이 이를 여성용으로 재해석해 남성적인 실루엣과 세련된 스타일을 여성의 신체에 맞는 형태로 새롭게 디자인했다. 이 컬렉션은 매우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르 스모킹이 등장한 1960년대는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추구하던 시기이자 동시에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바지를 입는 것이 금기시되던 시대였다. 이브 생 로랑은 이런 관습을 깨고 여성에게 새로운 자율성과 자신감을 부여했다.

Saint Laurent

Saint Laurent

단순한 패션이 아니라 젠더의 경계를 허문 첫 번째 스타일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임을 각인시키고 패션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강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1980년대의 파워 수트 트렌드로 이어졌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깔끔하고 구조적인 수트 스타일에 섬세한 디테일을 가미해 파워 수트 트렌드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여성들이 직업적으로 더 많은 지위와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매니시 룩은 사회에서 여성의 전문성을 상징하는 스타일로 인식됐다. 샤넬과 이브 생 로랑 그리고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바꿔온 파격은 다행스럽게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더구나 매니시 룩이 더 이상 사회에 대한 반항이자 파격이 아닌, 보통의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2024 F/W 시즌에도 매니시 룩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의 샤넬은 실용적이지만 도시적인 룩으로 여성들을 위한 자유분방한 쇼를 선보이고, 보테가 베네타는 장인 정신이 깃든 아티스틱한 수트를, 뎀나의 발렌시아가는 대담하고 파워플한 룩을 드리스 반 노튼은 남성복과 여성복의 경계를 허무는 룩을, 질 샌더는 미니멀한 수트 룩을 선보였다.

Celine Alexander McQueen CHANEL

남성적 실루엣을 차용하지만 동시에 여성들이 강인함과 자신감을 표현하는 오늘날의 매니시 룩은 한 발 더 진화해 젠더 플루이드 스타일, 즉 성별을 초월한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여성뿐 아니라 성별조차 구분되지 않는 스타일로 진화해 누구나 자신의 개성과 권위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남성적·여성적이라는 고정관념을 줄 수 있는 ‘매니시’라는 단어는 시대의 힘을 입어 남성과 여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젠더리스 룩, 젠더 뉴트럴 패션, 앤드로지너스 룩 등으로 불리고 있다. 더 이상 설명에 구애받지 않는 패션에 익숙해질 때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단어와 의미가 젠더 이슈에 얽매여 있을지라도 ‘매니시 룩’은 한정적이던 여성의 의복에 반향을 일으켰고, 단순히 남성 스타일을 보여주는 패션이 아닌 성별의 경계를 허문 상징적 존재라는 거다. 패션을 넘어 패션계의 혁신적인 진화의 역사를 보여준 매니시 룩. 코코 샤넬이 트위드 수트를 처음 소개하고 이브 생 로랑이 르 스모킹 룩으로 파격을 이야기한 것처럼 패션은 앞으로도 이야기하지 않을까.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새로운 목소리를. 그게 여자든 남자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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