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1세대 이주 노동자, 노년의 퀴어 부부 이야기

253
김인선과 이수현은 1985년 처음 만났다. 첫만남 당시 수현이 들꽃을 한 움큼 따다 선물했다.

김인선과 이수현은 1985년 처음 만났다. 첫만남 당시 수현이 들꽃을 한 움큼 따다 선물했다.

1948년생 이수현과 1950년생 김인선. 두 사람을 어떤 이름으로 이야기해 보고 싶나요

수현 우리는 한식구죠. 한솥밥을 먹는 공동체. 인선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일지도요. 수현 맞아요. 사랑하는 식구. 인선 그것도 이상하게 들리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부부입니다. 동성인데 사랑하는 사이죠. 수현 보통 독일에서는 누가 물으면 “우리는 한식구입니다”라고 해요. 그러면 다 통하거든요.

두 사람 모두 스물두 살에 독일로 이주해 파독 간호사로 일하다 1985년 하르츠의 재독한인교회 여성신도회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서로 첫인상은 어땠나요

수현 인선이 대답해 봐요. 제가 어떻게 마음에 들었어요? 인선 남자 같은 여자다 싶었어요(웃음). 수현 인선은 부잣집 외동딸 느낌이었습니다. 머리도 예쁘게 땋았죠. 고생과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였달까요. 인선 서로 조금 다른 부분을 느꼈는데, 그게 묘하게 끌렸던 것 같아요.

당시 인선은 결혼한 상태였고, 남편의 보복성 협박과 한인 사회의 만류에도 수현을 선택했습니다. 지금보다 동성 연인에 대한 인식이 훨씬 야박하던 때, 그 선택이 두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나요

수현 우리가 느끼기에 좋지 않을 건 없었어요. 내가 간호사로 일하던 병동에도 동성 커플이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근무했거든요. 당시 결혼이 법적으로 승인된 건 아니었지만, 사귀는 것은 자연스러웠죠. 우리 아파트에도 몇 사람 있었고, 생활하는 데 문제도 없었고. 그런데 한국 교회만 나가면 사람들이 그렇게 사감 선생님처럼 굴더군요(웃음). 인선 제게는 사람들이 반대하면 오히려 더 해보려는 태생적 오기가 있어요. 이게 나의 삶인데, 결정은 내가 하는 건데 당신들이 뭐라고 콩이니 메주니! 그러든 말든 내가 결정한다고. 수현 인선은 37세에 결혼했는데, 보통 사람들이 “40대 되면 절대 결혼 못 한다”고 하던 때라 강박이나 조급함이 있었죠. 부모도, 교회에서도 빨리 결혼하라고만 하니 전남편과 연애 과정 없이 결혼한 것도 있었습니다. 공부도 시켜준다니까 덜컥 해버렸던 것 같아요. 근데 나는 그때 ‘그 사람’의 냄새를 맡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냄새가 좋았습니다.

김인선과 이수현 부부 뒤로 베를린에 있는 ‘나치 박해 동성애자 추모비’가 보인다.

김인선과 이수현 부부 뒤로 베를린에 있는 ‘나치 박해 동성애자 추모비’가 보인다.

단지 ‘연인’이라고 얘기하기에는 1세대 이주노동자, 아시아인 여성 그리고 레즈비언으로서 여생을 함께하며 그 이상의 삶을 함께 일궈왔습니다. 지금 이 여정을 돌이켜보면 어떻습니까

인선 새로운 가능성이 주어져도 여전히 나는 수현을 택할 거예요. 후회 안 해요. 내 삶에 그만큼 기쁨을 주었고, 내가 사랑하는 여인과 지금까지 살 수 있다는 건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현 인선이 중병을 두 번씩이나 앓고 난 이후에 생각하게 된 것들이 있어요. 잉가 퇴니스의 〈인생의 과제 Abschied zu Lebzeiten〉라는 책을 좋아하는데요. 우리 엄마가 나를 늦게 낳아 엄청 사랑했다는데, 저는 엄마에게 해드린 게 없어요. 환갑 때 시계 하나 드렸을 뿐이죠. 엄마에게도 못해준 걸 인선에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게 내 ‘인생의 과제’라고 생각했어요. 인간이란 마음이 변할 수도 있고 누구든 영원을 장담하지 못하지만, 최소한 그럴 각오는 돼 있으니까요. 얼마나 살지 아무도 모르는데, 내가 사는 동안의 유일한 과제가 내 사람과 매 시간 서로 존중하면서 함께하는 겁니다.

인선의 어머니는 두 사람이 어찌 사는지 지켜보았는데 수현이 너무 잘해줘서 “나도 여자랑 살아보고 싶다”고도 말씀하셨다지요. 어머니라는 여성의 연대와 지지도 두 사람의 삶에 큰 힘이 됐나요

인선 아주 큰 힘이 됐지요. “나도 20년만 젊었으면 여자친구 만나 사귀어보고 싶은데”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으니까. 수현이를 엄청 좋아했어요. 수현 그 이후 어머니는 우리가 은퇴 이후 만든 호스피스 ‘동행’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줬고, 당신의 재산도 기부했어요.

두 분은 독일 사회 일원으로서 평생 종사한 전문직 기술을 살려 독거노인, 이민자 등 소외된 지역 시민을 돕는 것은 물론 호스피스 기구를 설립해 나이 먹고 병든 이들을 위한 지역공동체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죠. 어느 퀴어 퍼레이드에서 젊은 독일 여성들과 춤추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인선 누구와 춤추느냐 하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아닌 걸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예전부터 이러니저러니 도덕 선생처럼 처신하는 게 문제입니다.

해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두 사람.

해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두 사람.

베를린에 사는 젊은 여성들의 삶은 어때 보이나요

수현 베를린 여성들 말입니까? 아니면 베를린에 거주하는 한국 여성들 말입니까? 사실 베를린에 있는 젊은 여성들은 우리와 거리가 멀어요. 인선 세대가 다르지요. 수현 여기서 한국 여성들은 많이 만나지 않지만, 특별한 행사에서 만나면 다들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긴 사는데 한국에서든 독일 사회에서든 안정감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특히 2세대들 말이죠. 인선 어머니와 아버지가 간호사로 왔든, 광부로 왔든 여기서 태어난 애들은 달라요. 교육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나름대로 무엇이든 찾는 것 같아요. 반면 한국에서 중학교까지 다니다가 오면 갈등이 생기는 경우는 있죠. 한국도 독일도 아니다 보니 방황하기도 하고, 고민을 얘기할 데도 없죠.

자기 삶을 선택해서 살아가세요. 아주 떳떳하게. 주위 눈치 본다고 그 사람들이 당신에게 해주는 건 하나도 없어요. 내 삶을 내가 살 뿐인데요.

한국에서는 주변에 동성 연인은 꽤 많이 보이지만 60대 이상의 커플은 거의 만나본 적 없습니다. 노년의 레즈비언 삶은 어떤가요

인선 나이가 들면 건강도 물론이고, 여러 가지로 힘들어요. 나이 많은 사람들이 의식을 지니고 반드시 해야 하는 건 차츰 죽음에 가까워지며 그동안 남은 생활을 즐겁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자신과 이야기를 많이 나눠야 해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살았으며,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 건지. 모임을 해도 좋겠어요. 앞으로 우리가 어떤 걸 할 수 있는지 서로 배워가면서 말이죠. 수현 60대 이상 커플을 만난 적이 없나요? 근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항상 있었지, 없었던 게 아닙니다. 베를린에 있던 친구가 1989년에 한국으로 갔어요. 거기서 사는 죽마고우를 잊지 못해 간 후 아파트를 마련해 지금도 같이 잘 살고 있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눈에 안 띌 뿐이지요. 사회에서 그들을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보니까요.

한국 대중 매체에서도 나이 든 레즈비언을 다루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노년의 레즈비언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회에서 이런 삶이 존재하고, 가능하다고 용기를 주는 다큐멘터리영화 〈두 사람〉에 출연을 결심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수현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최소한 우리가 경험한 것에 관해 얘기를 나누며,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인선 남자하고 여자하고 사는 건 정상적으로 보고, 남자하고 남자하고 사는 것도 이상하게 보는데 여자와 여자가 사는 건 잘못된 것, 비도덕적인 것으로 보이나 봐요. 한국이 지닌 보편적 생각이기도 하죠. 독일은 좀 달라요. 아무튼 누구도 아닌 당신네들이 결정하는 거예요. 누구랑 살든, 이혼을 하든 말든, 제3자가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은 없는 거죠.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 자신의 생활, 자기 삶을 다른 사람이 관리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저는 수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떳떳하게 사는 거예요. 뒤에서 뭐라고 해도 그건 그 사람들 문제지 우리와 상관없어요. 어쩌면 독일에서 사는 게 우리에게는 훨씬 편하지요. 모든 사람이 자신이 선택한 삶을 떳떳하게 살면 좋겠어요. 그걸 보여주려고요.

이수현 씨의 젊은 시절. 1975년부터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수현 씨의 젊은 시절. 1975년부터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2022년 8월 31일 베를린에서 결혼하고, 1991년 임대차계약서를 함께 쓴 후 31년 만에 부부가 됐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는 자신의 선택으로 소중한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가 아직 미흡합니다. 수현이 중병으로 수술대에 들어갔을 때, 이 제도의 필요성을 다시 생각해 보기도 했나요

수현 함께 살아가는 입장에서 사고가 됐든, 병이 됐든, 수술을 받든 그런 사고가 났을 때 당연히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고 보호해 줘야죠. 결혼한 상태가 아니면 가족이 아닌 사람이 보호자 역할을 해줄 수 없으니까. 말 그대로 획 두개가 서로 맞대고 있는 ‘人’의 역할을 주고받을 수 없잖아요.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야 살아갈 수 있는데요.

베를린은 ‘70대 한국인 레즈비언 커플’이 살아가기에 좋은 곳인가요? 만일 두 사람의 관계는 배경이 한국이었다면 조금 달라졌을까요? 인선이 한국 사회에 커밍아웃하면서 한국에 거주하는 수현의 동생과 수현이 불화를 겪는 에피소드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인선 당연히 달라졌겠죠. 나는 한국에 연고가 없는데 수현이랑 같이 가서 살게 된다면 많은 것이 신경 쓰이겠지요. 수현 베를린에서는 사는 건 문제가 없어요. 결혼한 이후에는 ‘가족입니다’라고 말하면 다 통하니까요. 인선 독일인들은 그런 거 물어보지도 않고, 공공기관에서도 별문제가 없거든요.

두 분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여성들에게 알려지길 바란 것, 한국에 살고 있는 여성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수현 지금은 2025년이잖아요. 50~60년 전과는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 당시 사고방식에서 모든 것이 바뀌었듯 당당하고 자신 있게 자신의 삶을 선택해서 살아가세요. 아주 떳떳하게. 너무 주위 눈치 보지 말고요. 눈치 봤다고 그 사람들이 당신에게 해주는 건 하나도 없어요. 내 삶을 내가 살 뿐인데요. 인선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세요(Leben und Leben Lassen)’.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입니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처럼 당신도 당신 하고 싶은 대로 사세요. 그럼 아무 문제도 없는 거예요.

김인선 씨의 젊은 시절. 인선 씨는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한국인뿐 아니라 많은 외국인이 독일에 정착하는 과정을 목도했다.

김인선 씨의 젊은 시절. 인선 씨는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한국인뿐 아니라 많은 외국인이 독일에 정착하는 과정을 목도했다.

제도나 시선에서 벗어나 내가 선택한 사람과 삶의 관계를 이어가는 건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요

인선 중요하지요. 서로가 서로를 보호해 주니까요. 나를 지탱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 거예요. 혼자 있으면 어딘가로 굴러떨어질 거예요. 그게 여자와 남자가 아닌, 여자와 여자일 수도 있는 겁니다. 수현 그저 사람이 함께하는 겁니다. 인선 그럼요.

두 사람이 소중한 관계에 임할 때 잊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인선 타인에게 존중받고 싶어 하듯 나 또한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해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가 문제는 아니죠. 인간 대 인간으로. 수현 좋은 말씀입니다.

서로가 가장 힘이 될 때는 언제인가요

인선 우리는 항상 서로에게 힘이 됩니다(웃음). 수현 특별한 때가 아니라요.

두 사람은 노후 자금을 털어 호스피스 ‘동행’을 설립했다. 수현 씨는 퀴어 퍼레이드에 홀로 나가 행진하는 퀴어들을 보며 박수를 보내는 할머니다.

두 사람은 노후 자금을 털어 호스피스 ‘동행’을 설립했다. 수현 씨는 퀴어 퍼레이드에 홀로 나가 행진하는 퀴어들을 보며 박수를 보내는 할머니다.

내가 선택한 사람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일은 얼마나 멋질까요? “그저 아픈 데 약 발라주고, 등허리 긁어주고 문질러주고. 그냥 그게 섹스지”라는 영화 속 내레이션에 웃음이 났습니다

수현 예외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나이 60~70세가 되면 여성들은 갱년기를 지나고, 인선처럼 큰 수술을 두 번씩 하면 성에 대한 욕망이나 생각은 거의 들지 않아요. 그저 아팠던 인선이가 안타깝고, 애잔하고, 그러니까 쓰다듬어주는 거지. 어쩌면 30대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일지도 몰라요. 우리도 갱년기 지나기 전에는 안 그랬죠. 지금은 그저 아픈 데 약 발라주고 치료해 주는 게 진정한 섹스라고 생각합니다(웃음). 그 이상은 기쁨과 즐거움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우리는 사이와 사이에 겁을 먹고 일종의 ‘경계’를 치곤 합니다. 경계를 뛰어넘는 데 용기를 주는 말은 없을까요

인선 만약에 내가 누구를 알게 됐는데 그 사람의 행동이 전혀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해 봐요. 그러면 한편으로 ‘왜 저렇게 생각할까?’ 이런 생각이 들겠지만 그 사람만의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우리는 다 모르잖아요. 설령 아는 사람이더라도 그를 얼마나 잘 알겠어요. 그 사람에 대해 관찰하고 가급적이면 알기 위해 노력해야죠. “도움이 필요하세요? 혹시 내가 해줄 것이 있나요? 혹시라도 제게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 주세요….” 이런 말들을 통해 상대가 내게 관심이 있다는 걸 느끼잖아요. 수현 마음을 전달하는 거죠. 당신은 내게 무관심한 존재가 아니라고.

‘우리’에 관해 더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요

수현 우리가 전하는 이 대화가 어땠나요. 한국에서 성소수자에 속하는 분들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임에도 주변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본인 스스로 안에서 깨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밖에서 충격을 가해야 달걀이 깨지는 건 아니거든요. ‘안에서라도 소리를 지르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계속 두드려라.’ 언젠가 본인들이 진정 원하고 좀 더 평화로운, 아름다운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요. 그게 우리 두 사람의 바람입니다.

그저 아픈 데 약 발라주,고 등허리 긁어주고 문질러주고. 그냥 그게 섹스지.

+1
2
+1
0
+1
1
+1
1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