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더 무비’, 아는 맛과 모르는 맛의 완벽한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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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를 앞두고 바짝 달궈진 서킷 뒤 좁은 방에서 한 남자가 잠을 자다가 일어납니다. 짝짝이 양말에 악세사리를 주렁주렁 매단 남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몸을 풉니다. 블루투스 헤드폰에서 흘러 나오는 레드 제플린의 음악과 함께 그대로 서킷으로 향한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웃는 얼굴에 능청스럽게 응대합니다. 결국 그가 도착한 건 질주를 앞둔 차의 운전석입니다. 여기서 남자가 어떤 인물인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버드나무처럼 유연하다가도 레이스에 관련한 일에는 ‘차라리 부러지겠다’며 대나무처럼 뻣뻣하게 버틸 것이고, 달리는 일 말고는 세상에 관심도 없겠죠. 제멋대로에 말투도 독한데 이상하게도 모두가 그를 좋아할 것 같습니다. 보아하니 적당히 녹록치 않은 인생을 살아 왔겠고, 상처도 있을 거예요. 그리고, 남자는 지금 이 레이스에서 우승할 게 분명합니다.

너무나도 전형적이어서 그만 결말까지 찍고 돌아오게 만드는 영화 〈F1 더 무비〉의 인트로입니다. 비슷하게 시작하는 작품 중 당장 떠오르는 건 후지TV 〈엔진〉의 첫 장면인데, 정확히 20년 전 드라마죠. 이를 전후로 숱한 ‘Badass’ 류 남자 주인공을 내세운 이야기들이 유사한 작법으로 출발해 왔습니다. 다만 〈엔진〉의 칸자키 지로(기무라 타쿠야)는 30대 초반이었고 〈F1 더 무비〉의 소니 헤이스(브래드 피트)는 60대라는 점이 다릅니다. 만약 〈F1 더 무비〉의 시작에 흰눈부터 뜨게 된다면, 환갑이 넘은 브래드 피트가 ‘나 아직 안 죽었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일 거예요. 최근 그가 화제의 중심에 선 사건이라곤 안면거상 성형설 정도의 가십이었으니까요.

인트로 이후도 서사의 흐름 측면에서 변명의 여지 없이 전형적입니다. 〈F1 더 무비〉가 작품을 연출한 조셉 코신스키 감독의 전작 〈탑건: 매버릭〉의 지상판이라는 말도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먼저 제멋대로 살다보니 동년배처럼 안정적인 삶을 꾸리지 못한 채 장년을 맞았지만 실력만은 조금도 녹슬지 않은 ‘베이비 부머’ 베테랑이 등장하죠. 또 그런 선배보다 자신의 실력과 미래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건방진 유망주 ‘젠Z’가 있습니다. 이 두 인물로부터 촉발되는 갈등이 결국은 세대 화합으로 발전하는 과정이 주요 줄거리입니다. 두 영화가 각각 주인공의 조력자로 오랜 친구 아이스맨(발 킬머)과 루벤 세르반테스(하비에르 바르뎀)을 내세운 것도 유사해요.

이토록 뻔한데〈F1 더 무비〉는 재밌습니다 전형성이란 건 오랜 시간 몇 번이고 반복할 만큼의 매력 덕에 구축된 것이니까요. ‘아는 맛’이라고 좋아하는 음식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여기에 〈F1 더 무비〉는 ‘모르는 맛’을 조화롭게 가미합니다. 그렇다 보니 2시간 35분의 러닝타임이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특히 모터 스포츠의 인기가 그리 높지 않은 한국에서 F1(포뮬러1)은 익숙지 않은 대회일 텐데요. 그저 냅다 빨리 달려서 가장 먼저 돌아오면 되는 게 카 레이스라고 생각했다면 〈F1 더 무비〉를 통해 모터 스포츠의 매력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먼저 영화에서 다루는 F1은 보통 자체 제작한 레이스 카로 달리는데, 공기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섀시를 만들기 위해 세계 최고의 기술자들이 모입니다. 더 강하고 내구성 있는 엔진과 접지력 높은 타이어도 필요하죠. 따라서 모터 스포츠는 마치 로켓 산업처럼 굉장히 기술집약적이고 엄청난 자본이 투입되는 장르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경주용 자동차는 서킷을 최대 시속 350km로 내달립니다. 극 중 소니 헤인스의 등장과 함께 실력을 뽐낸 ‘데이토나 24’의 경우 그보다 조금 낮은 평균 시속 200km 초중반 선에서 진행되지만, 무려 24시간 동안 레이스가 이어지죠. 아무리 최첨단 기술로 제작된 레이스 카라도 설비 마모를 견딜 수 없어요. 그래서 달리던 차들도 경주 중 ‘피트(Pit)’라고 불리는 정비소에 정차하죠. 여기서도 시간 싸움이 벌어집니다. F1에선 타이어를 갈아 끼우는 정도의 ‘피트 스톱’은 대개 2초 미만으로 잡습니다. 〈F1 더 무비〉에서는 이 경이로운 광경을 클로즈업합니다. 아이맥스 등 특별관 관람을 추천하는 이유입니다.

더불어 서킷 위에선 천상천하유아독존이던 소니가 팀의 유망주 조슈아 피어스(댐슨 이드리스)의 조력자로 모두의 승리를 이끌게 되는 부분도 흥미로워요. 팀에 단 두 명 뿐인 선수가 서로 잘났다고 다투다가 경기를 더블 리타이어로 마치는 최악의 상황까지 이르자, ‘나’를 굽히고 ‘우리’에 집중하는 건 어른인 소니 쪽이었습니다. 그는 F1 룰을 위반 직전까지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조슈아의 순위 향상을 돕습니다. 레이스에서 가장 빛나는 것이 자신이 아닐 지라도요. 오로지 경험만으로 경주를 지배하는 소니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소니에게 조슈아와의 협업은 일생일대의 타협이었습니다. 과거 그는 F1 우상들과 함께 달렸던 유망주였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상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한 번도 우상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지만요. 그의 재능은 분명 출중했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상이 된다는 건 뭔가를 잘하는 것 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기도 하고요. 계기는 부상이었으나, 소니가 모터 스포츠의 정점인 F1을 떠나 수십 년을 방랑한 건 모종의 회피에 가까웠을 거예요. 큰 실패 이후에 또 다른 실패를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럼에도 남아 있는 ‘최고의 레이서’라는 미련은 그가 타고 다니는 낡은 밴에도 깃들어 있었습니다.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조슈아와 달리며 소니는 자신이 최고와 가까워지는 길이 팀의 승리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스스로 한계를 바라본다는 건 후련하면서도 섭섭한 감정일 테죠. 그러면서 소니는 달리고 또 달려도 끊임없이 떠오르는 “우리가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의문에 답을 도출합니다. 본질은 즐거움입니다. 명성에 집착하던 조슈아도, 꼴찌 팀을 팔고 싶지 않던 루벤도, 더 빠른 차를 만들고 싶던 케리(케이트 매케나)도 결국은 즐거움에서 비롯된 애정을 원동력으로 움직이죠. 주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 본질을 마주하기 시작한 소니의 변화는 보는 이들의 공감을 자아내기 충분합니다. 만화 〈슬램덩크〉 속 숙명의 라이벌 상북과 맞붙은 능남의 변덕규가 “나는 팀의 주역이 아니어도 좋다”라고 읊조리던 대목도 떠오르는군요. 그렇게 한 걸음 더 진짜 어른에 가까워진 소니는 바라던 ‘최고의 레이서’ 타이틀을 끝내 쟁취할 수 있을까요? 〈F1 더 무비〉는 25일 개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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