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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갑자기 얼굴이 퉁퉁 붓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눈두덩이었다. 주먹으로 실컷 얻어터진 것처럼 부어오르더니 나중에는 두 눈이 일자로 붙어 거의 떠지지 않았다. 모자를 눌러쓰고 다녀도 길 가던 사람들의 놀란 시선이 따라왔다. 여러 병원에서 갖가지 검사를 받았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의사도, 간호사도 이런 증상은 처음 본다고 했다. 나는 병원 투어를 멈추고 집에 틀어박혔다. 이 얼굴론 도저히 밖에 다닐 수 없었으니까.
갑작스럽게 집에 갇히니 코로나19 시절이 떠올랐다. 외향적인 나에게 긴 팬데믹은 지옥이었다. 밖에 나가면 안 된다는 강제성이 깃들자마자 편안하던 집은 감옥이 됐다. 졸지에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당시도 그때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막막했다. 코로나19는 약이라도 있지, 지금의 눈 사태(?)에는 원인도, 치료법도 없었다.
눈이 몹시 부을 뿐 통증이나 발진 같은 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우울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당분간 은둔하면서 내면에 집중해 보자.’ 다짐만 그럴듯했다. 도대체 스스로의 내면은 무엇이고, 거기에 집중한다는 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진공 속에 내던져진 듯한 24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 슬로 요가, 명상 같은 게 대강 떠오르긴 했지만 너무 그럴듯해 어딘가 작위적인 느낌이었으니까.
결국 내 하루하루는 의미 없는 ‘SNS질’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누워 온갖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화면 속에서는 연예인, 인플루언서, 반려동물, 아기, 아이, 소년, 소녀, 노인들이 끝도 없이 웃고 춤추고 떠들고 놀았다. 밤낮없이 나 없이 번쩍번쩍 빛나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상대적으로 초라한 내 존재감이 금세 희미해지곤 했다. 평소에도 나는 존재감이랄지 자존감이란 것을 뚜렷하게 느껴본 적 없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사라지자 어디에 있었던 건지 확연하게 티가 났다. 아마도 그런 마음은 명치쯤에 둥그렇게 뭉쳐 있었는지, 잃고 나자 가슴이 뻥 뚫린 듯 헛헛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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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SNS를 끊었다. 여전히 내면에 집중한다는 게 무엇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무분별한 SNS 활동이 날 파괴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내 정서가 위태로우니 남들의 행복이나 불행도 너무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난 타인에게 영향을 받고 싶지 않았다. 주먹만큼 부어오른 눈두덩에 영향을 받는 것만으로도 이미 버거워서.
SNS가 빠져나간 시간을 채운 건 쇼핑이었다. 나는 쇼츠와 릴스, 피드를 보듯 어떤 물건들의 상세 페이지를 넘나들었다. 흔해 빠진 생필품부터 특이한 해외직구 소품까지, 꼭 필요한 물건은 없었지만 사고 싶은 물건은 넘쳐났다. 장바구니에 담는 건 대개 사소한 것들이었다.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약간 신기하고, 적당히 귀여우면서 쓸모가 애매한 잡동사니들을 홀린 듯 구매했다. 그런 물건들은 택배 상자를 열 때만 잠시 기쁨을 줬다. ‘우와’ 하는 탄성도 한순간이었다. 포장재를 제거한 후 몇 번 만지작거리다 보면 곧 물건의 존재 자체가 잊혔다. 집 안이 어지러울수록 이것도 아니란 생각만 커졌다.
SNS도, 쇼핑도 안 된다면 집 안에서 이 답답한 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놀랍게도 이 간단한 생각조차 매끄럽게 할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시간을 스마트폰 속에서 보내서인지 현실의 두뇌 활동이 어색했다. 갑자기 바로 그게 문제라는 깨달음이 스쳤다. “왜 이렇게 항상 불만족스럽고 묘하게 조급한가?” “고작 눈이 부었을 뿐인데 왜 ‘인간 실격’한 듯한 기분이 드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번뜩 떠올랐다. 내가 오직 눈으로만 너무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내가 느끼는 박탈감과 불안감은 눈으로 보는 세상과 몸이 속하는 세상의 불일치에서 오는 이질감이었다.
우선 스마트폰부터 내려놨다. 알림이 울리고 팝업창이 떠도 그 속으로 끌려가지 않으려 애썼다. 기왕 집에 틀어박힌 김에 정말로 집이란 공간에 속해보고 싶었다. 아무것도 틀어놓지 않아 고요한 집 안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소일거리를 했다. 샤워할 때 샤워만 하고, 밥 먹을 때 밥만 먹어본 게 언제였는지 새삼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거의 24시간 돌아가던 유튜브를 끄자 집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 가고 싶은 곳에 가지 못해 억지로 머무르는 공간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집답게 느껴졌다.
나는 어릴 때부터 〈파랑새〉 이야기를 좋아했다. 모험에서 돌아와보니 그토록 찾아 헤매던 파랑새가 우리 집 처마에 있더란 이야기였다. 어쩌면 ‘자신의 내면’이란 것이야말로 현대인의 파랑새가 아닌가 싶었다.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의 내면’이므로 언제나 자기 안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늘 그걸 찾겠다고 더 멀리 떠나고, 더 화려한 요지경 속으로 이리저리 방향을 트는 것이다.
반년 동안 괴롭힌 눈가의 부기는 서서히 가라앉다가 이젠 거의 사라졌다. 여전히 원인 모를 괴현상이지만 그럼에도 배울 게 있었다는 데서 위안을 얻는다. 나쁜 일만이 가르쳐줄 수 있는 교훈도 있기에 인생이 재미있다는 생각도 해봤다.
정지음
싫은 것들을 사랑하려고 글을 쓴다. 첫 책 〈젊은 ADHD의 슬픔〉으로 제8회 브런치북 대상을 수상했고,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언러키 스타트업〉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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