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3년 밴쿠버에서 태어나 현재 런던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 제이디 차. 한국계 2세로서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국 설화 속 인물과 전통 직물 조각보를 주요 모티프로 삼아 회화와 텍스타일, 퍼포먼스, 사운드 설치미술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활동 중이다.
2025 터너상(Turner Prize)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한국계 캐너디언이자 런던에서 활동하는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지닌 당신에게 이는 어떤 의미인가요
밴쿠버에서 젊은 미술 학도로 지낼 때 런던이라는 도시와 터너상은 화려하지만 전혀 닿을 수 없는 먼 세계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 후보로 지명됐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요. 런던 예술 커뮤니티의 일원이 된 것이 자랑스럽고, 특히 한국계 캐너디언 예술가로서 제 작업이 인정받았다는 점에 더욱 큰 의미를 두고 있어요.
당신의 작품에는 많은 여성이 등장하지만, 대부분 ‘혼종’이거나 ‘반인반수’의 얼굴로 그려집니다. 여성을 이런 형태로 구현한 의도가 있을까요
저는 동물에게 특별한 유대감을 느껴요. 그들이 존중과 보살핌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고요. 제 작업에서는 특히 문화적 서사에서 인간에 의해 악마화되는 혹은 천하게 여겨진 동물들과 현대 도시 환경에서 마주하는 동물에게 애정이 가더군요. 저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동물 및 생태계를 억압하는 방식 사이에 유사성에 관심이 크며 기존 지배 권력 구조에 대항하는 강인한 존재들을 그리는 작업에 흥미를 느낍니다. 이들은 종종 반(反)영웅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저는 ‘변신’이랄지, 특히 동물의 형상을 재해석하고 바꿔내는 일이 즐겁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신체적 형태가 융합되는 과정은 우리가 서로 깊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공고히 해주죠.

제이디 차, ‘미래의 우리들(Future Selves)’, 2023, 캔버스에 유채, 70x55cm.
특히 ‘미래의 우리들(Future Selves)’(2023)을 보며 할머니들의 초상이 이토록 우아하고 강렬하게 그려진 적 있었는지 돌이켜봤습니다.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나이 든 여성은 마녀나 노파처럼 부정적 존재로 묘사되니 말이죠
나이 든 여성을 음모와 배신의 존재 혹은 위험한 존재로 보는 고정관념은 대부분 서구의 신화나 민속 이야기, 역사에서 기인합니다. 하지만 저는 일상 속 사람들을 관찰하며 나이 든 여성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가치를 기여하는지 인식해왔죠. 작가로서 나이 든 여성을 힘의 주체로 묘사하고, 그들의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서사에 늘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할머니의 원형은 제 작업에서 중심적 역할을 합니다.
한국 설화 속 할머니들, 태초에 세상을 창조한 여신 ‘마고할미’와 아이를 점지해 주는 탄생신 ‘삼신할미’에 관해 들었을 때 그들의 어떤 면에 매혹당했나요
마고할미가 거대한 노인의 형상을 한 채 주운 돌과 자신의 배설물로 산과 요새를 만들어내는 강렬한 이미지에 깊이 매료됐던 것 같아요. 마고할미의 소변으로 만들어진 강줄기와 물길의 거대한 장관은 신성함과 속됨이 뒤섞인 묘한 느낌을 주죠. 현대문화는 젊음에 집착하고 그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저는 그런 흐름과 반대되는 힘으로 균형을 잡아내는 인물, 존경받을 자격 있는 대안적 존재를 작품으로 재현하려 했습니다.

제이디 차, 베니토 마요르 발레호(Benito Mayor Vallejo) ‘안내자와 짐승(The Guide with Her Beast)’, 2023, 포토폴리머 수지에 아크릴릭, 리넨, 워싱 데님, 혼합 기능성 원단, 황동, 자개 단추, 진주, 나무, LED 조명, 110x50x100cm 받침대 포함.
마고할미는 해태 위에 의기양양하게 오른 채 지난 2023년 한국 첫 개인전 〈구미호 혹은 우리를 호리는 것들 이야기〉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반겼어요. ‘안내자와 짐승(The Guide with her Beast)’(2023)에서 꼭두의 리더로 장군이나 산신이 아닌 그녀를 세운 건 어떤 시도였습니까
사회적 리더로서 존경해야 할 인물에 대한 인식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한국 문화와 역사에 여전히 깊이 뿌리내리고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가부장제가 지배적인 가운데 작품을 통해 전통적 권력 구도를 전복시키고 싶었달까요. 그래서 보통 남성으로 그려지는 장군과 신령이 묘사되는 바로 ‘그 위치’에 마고할미를 리더이자 안내자로 등장시킨 거예요.

제이디 차, ‘할머니 산(Grandmother Mountain)’, 2023, 캔버스에 유채, 150x210cm.
조각보 프레임에 여성 산신이 운무에 둘러싸여 호랑이를 품고 있는 회화 ‘할머니산(Grandmother Mountain)’(2023)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전통문화인 조각보를 보고 주류 미술사에 익숙한 사람은 추상의 대가 몬드리안을 연상하겠지만, 당신이 영감받은 것은 한국의 이름 모를 여인들이라고 말한 적 있죠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면 위대한 모더니즘 예술가와 추상 화가들에 대해 배우는데, 대체로 이들은 유럽과 미국의 남성들로 그 성과를 역사적으로 인정받아 온 인물들입니다. 저는 추상을 탐구할 때 전통 섬유 예술 중에서도 한국 보자기에 주목했어요. 보자기는 미국 앨러배마의 ‘지스 벤드의 퀼트(앨러배마 강변에 고립된 흑인 마을 지스 벤드에 살았던 여성들과 그들의 조상에 의해 만들어진 퀼트)’ 같은 공동체와 많은 유사점이 있는데, 그 공동체처럼 한국 여성들이 모여 복잡한 텍스타일 작업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방식이 재밌더군요. 이런 섬유 예술과 퀼트 작품은 추상적 언어를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게 활용합니다. 이처럼 간과돼 온 작업물과 그 뒤에 있는 장인들에게 주목하고 경의를 표하는 건 필수적인 일이에요.
구미호 얘기를 해볼까요? 구미호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주로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신해 사람을 꾀어내는 ‘사기꾼’이나 ‘교활한 존재’로 그려지지만 당신은 그녀를 수호자나 영웅 혹은 현자로 재해석했습니다
여우처럼 구미호 역시 역사적으로 악의적 존재로 부당하게 그려져왔어요. 젊고 매력적인 여성은 교활하다는 고정관념과 연결되기도 하고요. 구전에 따르면 여우 정령은 1000년까지 살 수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꼬리가 하나씩 늘어나면서 지혜와 연륜이 축적된다고 합니다. 저는 수호자나 영웅이 반드시 완전히 ‘선한’ 존재이거나 결점 없는 존재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구미호의 사납고 위험한 속성이야말로 복수와 정의를 실행할 수 있는 강력한 영웅, 보호자로서의 매력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해요. 제게 구미호는 그런 점에서 완벽한 여성 영웅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어요.

제이디 차, ‘트릭스터, 잡종, 짐승(Tricksters, Mongrels, Beasts)’, 2023, 캔버스에 유채, 삼연작 240x600x4cm/각각 240x200x4cm.
세 폭의 거대한 회화 작품인 ‘트릭스터, 잡종, 짐승(Tricksters, Mongrels, Beasts)’(2023)에서는 제주 해녀의 뿔소라, 반려견, 갈매기, 구미호 등 혼종이라는 이유로 소외받거나 특정 이미지로 왜곡된 동물들을 권능한 존재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이는 이민자이자 여성으로서 자전적 요소가 반영된 걸까요
처음부터 제 정체성과 직접 연결된 작업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제 작업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인정해요. 제가 진짜 주목하고 싶은 건 사회가 우리 공동체 내의 다양한 집단을 어떻게 구분하고 분류하는지, 특정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더 존중돼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이민자이자 이민자의 자녀로서 살아온 개인 경험이 사회에서 소외받아 온 존재에 대한 공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건 분명할 거예요.
런던의 평단이나 서구 관람자들은 당신의 한국 설화적 해석을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비한국인이나 서구 관람자들은 아무래도 제 작업을 다르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지만, 다양한 배경을 가진 분들이 제 작업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길 바라요. 전 세계 민속 설화는 서로 맞닿아 있는 이야기가 많죠. 2022년 화이트채플(Whitechapel Gallery)에서 연 전시에서는 죽음과 상실, 저승으로 향하는 여정을 주요 주제로 다뤘어요. 죽음이 보편적 경험인 만큼 그 상징들이 당장 익숙하지 않더라도 모두 그 주제에 감정적으로 연결되길 바라면서요. 다행히 이에 관한 피드백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제 작업을 본 젊은 관람자들이 자신의 문화적 배경에 실재하는 민속 이야기와 예술을 탐구해 보고 싶다는 동기를 얻었다는 거였어요. 그 말은 곧 그들이 제 작업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뜻이고, 바로 그것이 작업을 통해 제가 이루고 싶은 지점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한국 설화와 샤머니즘 속 여성들의 존재를 마주하고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회가 여성과 동물을 포함한 소수 집단을 이해하고 대하는 방식을 다시 서술하고 재구성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배적 문화가 특정 집단을 지속적으로 억압하고 부당하게 대하거나 배척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고요. 샤머니즘은 한국 문화와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에도 그 실천자들은 오랜 세월 낙인과 배척, 왜곡된 시선에 시달려왔습니다. 디아스포라 한국인으로서 저는 이 고유하고 독창적인 한국의 영적 전통에 깊은 흥미와 자부심을 느낍니다. 샤머니즘은 존중받고 기념해야 할 소중한 유산이에요.

제이디 차, ‘유령과 안내자(The Ghost and Her Guide)’, 2023, 캔버스에 유채, 100x80cm.
“한국에서는 무속 의식을 이끌고 진행하는 존재인 무당이 여성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여성들이 억압 속에서도 굿을 이어왔다는 사실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말한 적 있죠. 원래 한국 샤머니즘에 관심이 있었나요
한국 샤머니즘을 처음 접한 건 김기영 감독의 1977년 영화 〈이어도〉를 통해서였습니다. 영화에는 존재감이 압도적이고 사교적이면서도 두려움을 자아내는 무당이 등장하는데, 그의 강렬한 카리스마와 영화 전반에 흐르는 반항적이고 페미니즘적인 서사에 깊이 매료됐어요. 이후 샤머니즘, 즉 무속신앙이 유교나 불교, 도교보다 더 오래된 한국 고유의 영적 전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관심이 깊어졌습니다. 만신(무당)이 되기까지의 고난과 여정, 그 과정에서 생긴 변화와 성장에 관해서도 말이죠. 개인적으로 한국 무당은 조상의 기억과 힘을 몸에 지니고 전하는 ‘전통 지식의 보존자’라고 생각합니다.
이 ‘무시무시한’ 여성들의 형상은 어떻게 떠오르나요
대부분 전통 동아시아의 일러스트레이션과 회화, 서구의 SF나 판타지 아트, 영화, 패션 화보, 유럽 고전 회화 등 매우 다양한 참고 자료에서 얻어요. 특정 신화 속 인물에 대해 공부하며 발견한 존재들을 작업에 통합하는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2025 터너상 후보에 최종 호명된 작품. 제이디 차, ‘The Expulsion of Evil(May you receive what you wish for others)’, 2024, 워싱 처리 및 기계 봉제된 리넨에 유채, 오일 바, 200x180cm.
어머니가 어릴 적에 들려준 전래동화와 설화를 작품에 반영하면서 당신의 긴긴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어머니는 그림 속 마고할미나 구미호를 보며 어떤 걸 느꼈을까요
어머니가 정확히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래전 잠자리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지금의 제 작업과 연구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걸 흥미롭게 생각하시더라고요. 어머니 역시 제 작업을 통해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게 된 것 같아 이 여정을 함께 나누는 일이 무척 보람찹니다(웃음).
동물과 자연에 둘러싸인 ‘할미들’의 모습을 두고 “나의 이상적인 미래 자아”라고 줄곧 말했습니다. 당신의 작품에서 이들을 ‘미래’로 꿈꾼 이유는
여성에게 나이 드는 일은 종종 부정적으로 인식되며,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서구 사회는 특히 자녀가 없는 나이 든 여성에게 유난히 가혹한 시선을 보내는 것 같아요. 저 역시 나이가 들며 이런 감정과 직면하게 됐고, 그것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탐구하게 됐습니다. 여성들은 어릴 때부터 사회적으로 젊음을 이상화하도록 길러지며, 젊은 여성들이 이야기 속 주인공이나 영웅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대다수예요. 물론 그런 시선도 의미 있겠지만, 저는 모든 연령대의 여성이 존중받고 서사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과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 연애운 터질까? 2025년 여름 별자리 연애운 알아보기
- [엘르보이스] 내면의 파랑새를 찾아서
- 호랑이 리더는 누구? 12지신 버전 히어로 ‘트웰브’ 정보
- 트와이스 컴백 티저 스타일링 총정리
- 집게핀보다 유용한 헤어핀의 정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