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과 공간만 있으면 어디든 그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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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SELA TALITA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힘 있게 자연의 생동을 피워내는 스페인 시각 예술가 히셀라 탈리타.


욕실의 오래된 타일에 그린 벽화 일러스트레이션 프로젝트. 오래된 타일은 특수 페인트로 칠했고, 벽화가 완성된 이후 아크릴 물감으로 직접 핸드페인팅을 했다.

욕실의 오래된 타일에 그린 벽화 일러스트레이션 프로젝트. 오래된 타일은 특수 페인트로 칠했고, 벽화가 완성된 이후 아크릴 물감으로 직접 핸드페인팅을 했다.

발렌시아 디자인 학교에서 실내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시각 예술가로 벽화와 회화 작업을 하고 있다

실내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예술적 창의력을 마음껏 펼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손으로 작업하거나 자유롭게 구상하는 시간보다 도면을 그리고 규정에 따라야 할 일이 더 많았다. 프로젝트가 끝날 때면 성취감보다 피로와 좌절이 먼저 찾아왔다. 졸업 후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우연히 작은 창문 페인팅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그 순간 ‘내가 진정으로 행복하고 충만함을 느끼는 일이 바로 이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욕실 전체를 실험공간으로 삼은 히셀라 탈리타. 타일 위에 그림을 그리고 도예 공방에서 직접 타일을 구워 완성했다.

자신의 욕실 전체를 실험공간으로 삼은 히셀라 탈리타. 타일 위에 그림을 그리고 도예 공방에서 직접 타일을 구워 완성했다.

이후 회화의 영역을 캔버스에 국한하지 않고 벽지와 타일, 유리 등 다양한 표면으로 확장해 왔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시도하는 과정은 늘 즐겁기 때문에 내 작업이 다양한 매체에 적용되고, 여러 방식으로 활용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프로젝트가 복잡할수록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아지는데, 그만큼 기술이 늘고 시야도 넓어진다.

지금까지 작업한 프로젝트 중 가장 도전적인 경험은

가장 야심 차고 복합적인 프로젝트는 욕실 타일 작업이었다. 처음 접해보는 세라믹 페인팅 기법을 사용했는데, 익숙하지 않은 만큼 연구가 필요했다. 다행히 발렌시아엔 뛰어난 도예가가 많아서 그들의 조언을 받으며 가마에서 굽는 과정까지 완벽하게 할 수 있었다. 디자인은 섬세하면서도 과하지 않아야 했고, 스케치만 해도 긴 시간이 걸렸다. 바닥에 타일을 하나하나 배열하면서 마치 카펫을 짜듯 구도를 맞춰나가는 과정은 흥미로우면서도 굉장히 정교한 작업이었다. 도전적인 프로젝트였지만, 그만큼 배운 점도 많았고 강렬했다.

‘The Leopard's Doubt’.

‘The Leopard’s Doubt’.

매체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다를 것 같은데, 어떤 차이가 있나

벽지 작업은 일반 회화와는 조금 과정이 다르다. 대형 종이에 먼저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린 뒤 고해상도로 스캔해서 약 4×2.8m 크기로 출력한다. 중요한 건 모든 조각이 퍼즐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디자인하는 것이다. 배경 텍스처도 별도로 준비해야 한다. 가구에 그림을 그릴 땐 그것이 놓일 공간과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 사용자의 연령대까지 고려한다. 예를 들어 어린이를 위한 작업일 땐 색감과 표현방식에 더 신경 쓴다.

새로운 작품을 구상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작정 스케치를 시작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그림의 기본 구성이 먼저 떠오르지 않으면 손으로도 옮길 수 없다. 그래서 눈을 감고 상상하는 시간을 먼저 가진다. 참고 자료를 찾기 전에 먼저 내 안에 상상의 공간을 만든다. 좋은 아이디어는 언제나 그렇게 텅 빈 순간에서 탄생한다.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이국적인 자연과 동물들 역시 상상에 의한 것인가

2017년에 인도를 여행했고, 이후 발리와 보츠와나에서 사파리를 경험했다. 이 여행을 통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법을 배웠고, 시야도 넓어졌다. 나는 그림을 자연 속 일상을 들여다보는 창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작업을 구성하고 색과 요소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사냥을 고민하는 표범이나 물속에서 싸우는 얼룩말처럼. 야생동물 다큐멘터리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다. 작업을 시작할 땐 주로 동물의 자세부터 떠올리는데 몸통과 목, 다리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이 표범은 왜 몸을 비틀고 있을까? 무엇에 놀란 걸까? 싸우려는 걸까?’ 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내 그림은 실제로 본 것과 보고 싶은 것,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미지다.

‘The defense’. 악어와 왜가리, 누가 누구의 알을 훔치는 걸까?

‘The defense’. 악어와 왜가리, 누가 누구의 알을 훔치는 걸까?

당신의 인스타그램(@giselatalita)에서 살짝 엿본 집은 예술적 실험으로 가득하더라. 본인의 집 곳곳을 그리면서 얻은 경험이 작업에 영향을 미치나

다행히도 가족과 파트너가 내게 집에서 실험할 수 있는 자유를 줬다(웃음). 여름 별장에서는 욕실에 커다란 벽화를 그렸다. 오래된 욕실이라 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위에 페인트를 칠한 뒤 그림을 그려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었다. 재료와 스케일, 작업 속도를 실험하는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책상 앞에 앉아 수없이 그림을 그리고 색을 연구한 시간들이 내 스타일을 다듬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집에서 창의적 시도를 할 기회가 생기면 늘 배움의 기회로 삼는다. 그런 경험이 나중에 클라이언트의 작업을 할 때 도움이 된다.

장식 예술이 일상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나

모든 것이 반드시 ‘기능적’일 필요가 있을까? 나는 기능과 존재 사이의 균형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꼭 써야만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예술 작품을 집에 두는 건 기능을 잠시 멈추고 멍하니 바라보며 머리를 비우는 시간, 아주 짧은 기쁨의 순간을 누리는 거다. 그런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하는 작업은 충분히 의미 있다.

자신의 욕실을 위해 타일 조각을 맞추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히셀라 탈리타.

자신의 욕실을 위해 타일 조각을 맞추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히셀라 탈리타.

제약 없이 원하는 장소나 매체에 작업할 수 있다면 어떤 걸 해보고 싶나

많은 사람이 오가며 감상할 수 있는 공간에 야생동물이 가득한 벽화를 그리고 싶다. 헬멧을 쓰고 비계를 타고 올라가 작업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벌써부터 설렌다. 매체라면 요즘 나무 병풍에 꽂혀 있다. 장 뒤낭(Jean Dunand)의 아르데코 스타일 병풍처럼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연구 중이다. 지금은 병풍이 대중 가구는 아니지만, 오히려 열린 공간에 익숙한 요즘 시대에 잘 어울리는 오브제 같다. 언젠가 꼭 그런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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