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적 독자 시점’, 성좌물에 성좌는 없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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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물’은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웹소설 계에서 하나의 완전한 장르로 구축됐습니다. 여기서 성좌는 초월적인 힘을 지닌 신적 존재를 일컫습니다. 단순히 인간보다 강한 무언가가 아닙니다. 성좌는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들을 관찰하고, 이 가운데 마음에 드는 인물을 선택해 자신이 가진 능력을 나눠 줍니다. 능력을 후원받은 인간의 활용법을 지켜보는 것이 성좌들의 유희입니다.

이 장르에서 가장 크게 흥행한 건 두말 할 것 없이 〈전지적 독자 시점〉입니다. 주인공 ‘김독자’는 인기 없는 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멸살법)〉을 십 수년 동안 끝까지 읽은 유일한 독자인데요. 그가 마지막 화를 본 날 저녁, 돌연 〈멸살법〉 속 세계가 현실로 뒤바뀝니다. 김독자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도깨비가 제시하는 ‘시나리오’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 말이죠. 성좌들은 도깨비에게 돈(코인)을 주고 이 모습을 구경하며, 쓸 만 한 인간이 있다 싶으면 능력을 후원하는 ‘배후성’을 자처합니다. 여기서 〈전자적 독자 시점〉이 폭발적 인기를 구가하게 된 가장 큰 요소 는 배후성이 모두에게 익숙한 신화와 설화에서 온 인물들이고, 그 가운데 한국 역사 속 위인들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영화판 〈전지적 독자 시점〉에는 배후성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한국 위인들이라는 설정은 빠졌습니다. 각색 역시 또 하나의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억지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필요한 각색이었냐고 묻는다면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을 신으로 되살려 인간들에게 능력을 준다는 설정의 연결은 매우 뚜렷한 ‘국뽕적(?)’ 쾌감을 선사하는 대목이자 원작 웹소설의 차별점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감독의 모든 의도는 영화를 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었습니다.

15일 언론배급시사회에서 공개된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 읽히는 건 이 방대한 세계관을 가진 메가 히트 IP를 어떻게 다부작 실사 영화라는 ‘상품’으로 만들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우선 원작의 많은 설정과 내러티브가 단순화하고 제거됐습니다. 특히 앞서 언급한 ‘배후성’의 존재감이 크게 줄었는데요. 이를테면 김독자의 활약을 내내 지켜보던 ‘심연의 흑염룡’이나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등의 성좌들은 그 이름과 능력만 남은 채 캐릭터성을 잃었습니다. 여기서 영화판 〈전지적 독자 시점〉의 성좌들은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에서 참가자들의 게임을 관망하던 VIP처럼 절대악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를 통해 강조된 건 김독자(안효섭)를 필두로 한 인간들이 〈멸살법〉의 결말을 가장 정의롭게 바꿔 써내려가기 위해 감행하는 고군분투입니다. 원작의 독특한 엔터테인먼트 대신 인간이 극단적 상황에 처했을 때의 딜레마 게임을 반복적으로 내세웁니다. 이를 위해 김독자와 동료들이 과거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켰던 경험들을 플래시백으로 비추고요. 거기서 죄책감을 느끼고 그것이 트라우마로까지 남는 건 오로지 인간 뿐일 겁니다. 영화는 김독자의 속죄 같은 희생을 통해 ‘반성’이란 가치를 수면 위로 올리고, 이를 통한 인간적 성장을 그려냅니다. 모두가 생존을 위해 싸우는 상황에서 가장 강한 자가 살아 남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약자들의 희생이 필수라는 논리를 착실히 부정하는 거죠.

그 와중에 레벨업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멸살법〉 세계관 안에서 목숨 장사를 하는 인간 군상을 비춘 건 흥미롭습니다. 성좌물의 미디어 믹스에 성좌가 보이지 않지만 사람은 또렷이 보입니다. 좋게 말하자면 김병우 감독의 개성을 담은, 뚝심 있는 각색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한데요. 이 과감한 비틀기가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지는 지켜 봐야겠지만요.

같은 날 기자간담회에서 감독은 “〈전지적 독자 시점〉을 영화로 만들려 했을 때, (원작에서) 뭔가를 더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다”라며 “원작에 여러 좋은 가치들이 많이 담겼지만, (내가) 천착했던 것은 ‘함께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주인공이 자신의 능력을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쓰려 하는 내면의 움직임에 집중했다는 것이죠. 그는 “원작을 읽었을 때 가장 크게 와 닿았던 지점이다. 이거 골자로 인물의 내면 세계를 더 내밀히 그리는 것을 (각본 작업에서) 생각했다”라고 부연했습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극장을 나선 후에도 곱씹게 되는 ‘의미’를 구현하고 싶었다는 뜻이겠죠.

그럼 원작을 보지 않고서도 영화를 무리 없이 즐기 수 있을까요? 감독은 “원작을 보셨건 안 보셨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설정은 생략된 부분이 많은데 인물들은 그대로 등장하다 보니 최소 줄거리 정도의 정보는 있어야 내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빠르게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느 정도 극 중에 등장하는 문화적 요소에 익숙할 필요도 있고요.

CGI 등은 다소 애매합니다. 표면이 매끄러운 괴물들이나 극 초반 동호대교 같은 배경은 자연스럽게 볼 수 있었는데요. 전투 장면에서는 속도나 사운드를 끌어 올려서 화면에서 오는 약간의 이물감을 무마하려는 듯한 느낌도 들었거든요. 인물들의 클로즈업 장면이 다소 많은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아쉽게 느껴졌고요. 다만 거의 모든 장면을 찍으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상상해야 했을 배우들의 노고는 크게 다가옵니다. 이를 두고 김독자가 사랑한 웹소설 〈멸살법〉의 주인공 유중혁 역을 맡은 이민호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크로마키 등 앞에서 연기할 일이 많아질 것이고, 배우가 감수해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한다”라며 “그래서 배우에게도 상상과 창의적 사고가 더 중요해질 것 같다”라고 담담히 말하기도 했습니다.

〈전자적 독자 시점〉은 한 편의 영화로서 확실한 결말을 제공하지만, 속편을 암시하는 마무리 방식이 있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애초에 2부작으로 만들 생각이었기도 하고요. 김병우 감독은 “계약이 진행된 건 아니지만 (영화의) 다음 이야기가 있다는 건 보시면 아실 것”이라며 “속편 가능성은 극장 상황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 영화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을 지에 달렸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성장한 〈전지적 독자 시점〉의 다음 이야기를 볼 수 있을까요? 영화는 23일 개봉합니다. 첫 번째 크레딧 이후 쿠키 영상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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