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여성의 시대! 극장가에서 여성 관객이 갖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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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가에서 여성 관객이 갖는 힘

2023년의 극장가로 잠시 거슬러 올라가보자. 영화진흥위원회 KOBIS(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2023년 해외 영화 박스오피스 1·2·3위는 모두 애니메이션이다. 1위 〈엘리멘탈〉(724만), 2위 〈스즈메의 문단속〉(557만), 3위 〈더 퍼스트 슬램덩크〉(479만). 팬데믹 이전까지 애니메이션은 남성 중심 장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OTT 플랫폼을 통해 애니메이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여성 팬덤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소비하고, 즐기고, 모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작품의 여백을 2차 창작으로 재생산하면서 자발적 바이럴을 실천한다. 실제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초반 4050세대 남성의 선택을 받으며 다소 잔잔히 시작했다가 2030세대 여성에게 발굴당하며 N차 관람의 기록을 세웠다. CJ CGV 기준 〈스즈메의 문단속〉은 20대 여성 관객이 56%로 1위를 차지했다. 해외 영화 박스오피스 1위 〈엘리멘탈〉은 말할 것도 없이 20대 여성 예매율이 68%로 압도적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마니아층을 겨냥하던 장르가 대중적 관심을 받고 유의미한 트렌드로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2030 여성 관객의 선택이다.

이러한 흐름은 2024년에도 이어진다. 훨씬 더 극적인 형태로. 지난해 12월에 개봉한 〈서브스턴스〉는 ‘보디 호러’라는, 그간 한국 관객에게 친숙하지 않았던 장르를 앞세운다. 하지만 〈서브스턴스〉의 흥행은 장르보다 맥락에 있다. 나이 든 중년 여성의 분열적이고 집착적인 외모 비하, 자기 검열, 시기와 질투, 나이 듦의 거부, 젊음 예찬, 나이 계산…. 〈서브스턴스〉가 반영한 현실은 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얼굴 평가와 외모 강박을 부추기는 사회에 이골이 난 젊은 여성들은 ‘엘리자베스’(데미 무어)가 대변하는 비정상적 선택에서 서글픔을 느낀다. 보디 호러의 자극적임을 누리기도 전에, 이들은 빨간 립스틱을 두 손으로 뭉개버리는 여자의 슬픔을 먼저 이해했다. 따라서 〈서브스턴스〉의 숫자는 사회문화적 맥락을 갖는다. KOBIS 2025년 독립 예술영화 외화 1위를 기록하고 수입사 ‘찬란’의 역대 최고 성적을 경신한 작품으로서 그 궤를 함께한 2030 여성 관객의 공통된 문제인식과 시대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서브스턴스〉가 증명하는 것은 동시대 젊은 여성들의 열망. 너무 오랫동안 사회로부터 요구받아온 미적 기준에 대항하고 싶었던 여성주의적 열망이 거대한 파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더 폴: 디렉터스 컷〉이 개봉한다.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의 감독판이다. 원작이 (국내 기준) 2008년 작품이니, 무려 16년 만의 귀환이다. 탐미적 미장센, 모험적 이야기, 어린이 주인공을 향한 따뜻한 시선. 〈더 폴: 디렉터스 컷〉은 현재 2030 여성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다양한 요소를 충족하면서 순수히 입소문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이들이 최근 들어 ‘미감’이란 단어를 곳곳에 사용하는 풍경처럼, 시각적 심미성을 가치롭게 바라보는 경향 속에 제작 기간만 28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는 그 기대치를 높이기 충분했다. 배우 캐스팅 9년, 장소 헌팅 19년, 촬영 4년. 연출자가 CF 감독 출신이라는 커리어를 입증하는 초현실적인 세트와 선명한 색감. 16년 만의 감독판 재개봉은 5주 동안 7만 명이라는 누적 관객 수를 달성했고, 10만 명을 돌파하면서 타셈 싱 감독은 최초 내한을 결정하기까지 한다. 그가 머무른 닷새 동안 진행한 GV(관객과의 만남)는 총 17회. 심지어 본래 사흘만 머무르기로 예정돼 있었으나 대대적인 호응으로 주말까지 일정을 급하게 늘린 것. 〈더 폴: 디렉터스 컷〉의 최종 성적은 18만. 국내 독립 영화가 3만 달성을 고비로 바라보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결과다.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을 때 (일면식이 없더라도) 주변인을 감응시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성들의 귀여운 태도 덕에 〈더 폴: 디렉터스 컷〉은 급류를 타고 순항을 마쳤다. 관객의 얼굴을 직접 보고 이야기를 나눈 타셈 싱 감독이 여정 말미에 “Long live Korean Women!(한국 여성 만세!)”을 남긴 것 또한 영화를 누가 보는지, 영화의 성공을 누가 좌지우지하는지,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게 누구인지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2025년으로 넘어와서도 여성들의 선택은 여전히 극장가를 흔드는 힘으로 작용한다. 2025년 3월 개봉한 〈콘클라베〉와 〈플로우〉가 그렇다. 특히 두 작품엔 여성들의 삶의 태도가 반영되는 지점이 눈에 띈다. 내가 소속된 문화가 아니더라도 그 다름을 호기심으로 지켜보는 것, 잘 모르는 영역에서 내 입장을 강요하기보다 정제된 정보를 찾는 것, 살아남는 일의 고달픔을 헤아리는 것. 다음 교황을 뽑기 위한 정치 싸움을 그린 〈콘클라베〉는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소재 때문에 자칫하면 외면받을 수 있었다. 콘클라베의 존재를 아는 이보다 모르는 이가 절대적으로 많은 상황에서 호기심과 관심은 간절한 연료였다. 그런데 마침 여성들은 문화적 낯섦, 생소함을 흥미로움으로 덧씌워 극장을 찾았다. 타 집단을 경험하는 것에 거리낌 없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유연함 덕이다. 종교 영화에다가 예술영화라는 장벽에도 33만 달성. 여성들이 누적시킨 수치는 결코 쉬운 성취가 아니다. 게다가 이들은 현실 속 콘클라베의 이색적인 비하인드 스토리를 찾아 공유하거나 2차 창작을 나누며 좁은 파이를 둥글게 넓혔다. 이제 콘클라베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생소함은 영화의 약점이 아니다. 무성 애니메이션 〈플로우〉가 18만을 달성할 수 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걸어다니거나 옷을 입은 애니메이션형 귀여운 동물이 등장하지 않지만, 여성 관객은 무성에 생략된 동물들의 절실한 마음을 해석하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도파민 중독 사회에서 오직 타인을 향한 여성들의 온기만으로 거둬진 성과다.

2030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주도한 윤석열 탄핵 촉구 시위. 불의에 저항하는 젊은 여성들의 사회참여적 성향은 정치적 압력이 묘사된 〈해피엔드〉에도 통용된다. 실제로 쿠리하라 하야토 배우는 “4050세대 관객이 대부분인 일본 현지와 달리 한국은 2030 여성 관객이 대부분”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해피엔드〉 11만 누적 관객 수와 팬덤 형성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픽션의 오락 뒤로 숨기보다, 자신이 직면해야 할 현실을 바로 보고 작품을 통해 새 담론을 만들어나가는 2030 여성들의 명민함, 문화적 적극성, 지적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겐 더 많은 탐색과 연구가 필요하다. 다양한 산업군의 성쇠를 결정한 열쇠를 누가 쥐고 있는지, 그 얼굴들을 담아낼 필요가 있다. 패배주의적 태도로 온라인 검열, 성별 갈등을 몰아세우는 집단이 아니라 문화 다양성을 이해하고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들을 조명할 때. 그들의 가치를 인정할 때 비로소 다음 문이 열릴 수 있다.

Writer_이자연(〈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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