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래현, ‘태양의 시대’(1972).
산 래(崍), 어질 현(賢). 우향 박래현(1920~1976년)은 이름처럼 너그럽고 유순하게 살았다. 소위 현모양처의 표본. 당시 세상이 여성에게 거는 기대에 따르면 그랬다. 화가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27세의 박래현은 한국 화단의 거목 운보 김기창과 결혼하고 네 명의 자식을 낳았다. 영감을 주고받는 동등한 예술적 파트너였지만, 박래현은 늘 자신보다 남편을 앞세웠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당신은 최고의 화가가 돼야 한다”며. 그 정성이 얼마였나면 어린 시절 병을 앓아 청력을 잃은 김기창에게 5년간 구화를 가르쳐 어눌하게나마 말문을 트게 했을 정도다. 1974년 박래현은 주부클럽연합회로부터 ‘당대 모든 주부의 이상상’으로 삼을 만한 여성에게 수여하는 ‘신사임당상’을 받았다. 하지만 박래현이 이 상을 얼마나 의미 있게 받아들였는지는 미지수다. 평생 따라다니던 ‘김기창의 아내’라는 타이틀을 한 꺼풀 벗겨낸 삶은 화가로서 작품 활동에 충분히 시간을 쏟지 못하는 번민으로 가득했다. 결혼 후 1년, 장녀가 태어난 해에 박래현은 신문에 ‘결혼과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남겼다. “여성과 가정생활! 이것은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세계이다, 아침 6시쯤 일어나 기저귀 빨기, 밥 짓기, 청소하기, 아침 식사가 끝나면 이것저것 치우고, 닭의 치다꺼리, 아기 보기, 정오면 점심 먹고, 손이 오면 몇 시간 허비하고, 저녁 먹고 곤해서 좀 쉬는 동안에 잠이 들면 자, 그러면 본업인 그림은 언제나 그리나.”

박래현, 털실과 하수구 망을 이용한 태피스트리 ‘작품’(1970년대 초반).

박래현의 ‘기원 B’(1972),

‘작품’(1966년경).
박래현은 교사로 근무하다 스무 살에 화가의 꿈을 품고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초기엔 사실주의풍의 인물화를 그렸다. 일본 유학의 영향으로 일본화 양식을 따랐으나 색채나 구도를 정하는 방식이 감각적이고 명쾌했다. 열정에 재능이 뒷받침되니 인정도 금방 뒤따랐다. 붉은 화장대와 마주하고 있는 소녀를 그린 ‘단장’은 1943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받았고, 해방 후 일본화의 자취를 지우고 입체파를 접목시킨 1956년 작 ‘노점’은 제5회 대한민국미술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노점’은 한국전쟁 후 시장을 오가며 마주친 여성들을 그린 작품이다. 박래현의 작품엔 여성들이 있었다. ‘어머니’ 또는 ‘아내’, ‘어느 집안의 딸’ 같은 납작한 말로 불렸던 이들을 맑은 색과 정갈한 필치로 그려내는 일은 자신을 되찾는 일과 다르지 않았을 테다. “분주한 가정 속에서 여성들이 예술을 하고 철학을 하고 의사가 되고 실업가가 되어 자기가 희망하고 있는 자기의 생활을 그대로 계속해 나갈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결혼 초기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에 삶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치열하고 성실하게, 주어진 틀을 극복하며 대상이 없는 ‘순수 추상’의 세계로 나아갔다. 박래현은 김기창과 함께 국내외에서 꾸준히 공동 전시를 열며 미국, 유럽, 아프리카를 돌았다. 해외 박물관에서 원시 미술과 고대 유물의 토속적 아름다움에 매료됐고, 노란색과 붉은색, 검은색으로 이뤄진 새로운 형태의 추상화를 탄생시켰다.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석을 계기로 방문한 뉴멕시코 주에서는 한국의 시골을 찾은 듯 친근함을 느꼈다. 그렇게 낯선 땅에서 마주한 순수한 감흥은 전에 없던 세계로 작가를 이끌었다.

‘시간의 회상’(1970년대 초반).
1969년, 박래현은 쉰을 맞아 오랜 꿈이었던 미국 유학을 떠났다. 판화와 태피스트리라는 기술을 익힌 박래현의 그림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다. “붓으로 그리는 맑은 여백의 동양화를 하다가 뉴욕에서 판화와 만났다. 평소 화선지의 한계에서 벗어나보려던 나에겐 깊고 절실하게 구체적으로 손에 잡혀 표현되는 여러 가지 판화 기술이 매혹적이었다. 예술이라는 말과 곧잘 상반되는 단어로 쓰이는 기술이라는 것이 작가의 예술성을 깊게 해줄뿐더러 표현 방법에 의외의 확대를 가져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원 구조가 마치 세포를 연상케 하는 ‘시간의 회상’, 붉은색과 푸른색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태양의 시대’, 원형 스테인리스 판(하수구 망)에 털실을 연결한 ‘작품’ 등 그의 1970년대 초 작품을 보면 새로운 도구를 손에 쥔 박래현이 얼마나 자유로웠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유학 5년 만에 간암 판정을 받고 타계한 사실이 유독 야속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2020년 박래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의 이름은 〈박래현, 삼중통역자〉다. 박래현은 과거 미국 여행에서 가이드의 영어를 해석해 다시 구화와 몸짓으로 김기창에게 설명해 주었는데, 여행에 동행한 수필가 모윤숙이 그 모습에 관심을 보이자 자신을 ‘삼중통역자와 같다’고 표현했다. 당시 박래현은 영어, 한국어, 구화(구어)를 넘나드는 언어 통역을 말했지만 전시는 회화, 태피스트리, 판화라는 세 가지 매체로 삼중통역의 의미를 확장시켰다. 사망 40년 뒤에 열린 개인전으로 봇물 터지듯 쏟아진 수많은 기사와 리뷰를 보면 박래현의 번민이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못다 펼친 날개라도 결국 무언가를 ‘돌파해 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모윤숙의 표현처럼 “아내, 어머니, 예술가의 ‘삼중의 삶’은 그의 삼중통역과 마찬가지로 너무 버거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박래현
현대적 동양화의 새로운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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