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오 감독의 수상 소식이 대단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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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순환하는 삶과 죽음을 비롯해 계급과 인종, 테러 등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다룬 ‘Opera’.

끊임없이 순환하는 삶과 죽음을 비롯해 계급과 인종, 테러 등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다룬 ‘Opera’.

세계적인 미디어아트 축제 ‘Ars Electronica Festival 2025’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수상 경험을 통해 ‘내가 계속 실험하고 있는 게 유의미한 일’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계속 만들고, 보여주고, 소통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고 계속 발전해야 하니까. 하나의 응원이자 격려다.

제주에 위치한 ‘하우스 오브 레퓨즈’에서 ‘Opera’ ‘Origin’ 등 전작들로 구성된 상설 전시 〈O : AN ERICK OH RETROSPECTIVE〉도 진행 중이다

‘하우스 오브 레퓨즈’는 ‘레퓨즈(Refuge)’라는 이름처럼 내 안에 있던 피난처 같은 공간이다. 전시를 준비하고 작품을 설치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 전시는 무의식적으로 공간에 내 마음의 풍경을 넣은 것처럼 다분히 솔직하다 걸. 작품이 실험적이고 관람자에게 친절한 작업은 아니지만, 그런 내 마음 한쪽을 그대로 시각화해 툭 던지고 온 기분이었다. 그 공간이 계속 유지되는 한, 내 마음속 피난처도 계속 존재하겠구나 생각했다.

최근 ‘헬리녹스’와 ‘헬리’ 캐릭터의 기원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헬리녹스와 협업한 건 벌써 3~4년 전이다. 로고가 태양신 헬리우스와 밤의 신 녹스의 합성어다. 음과 양, 빛과 어둠 같은 ‘균형’의 개념은 내가 오랫동안 다뤄온 주제라서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헬리녹스와의 협업은 늘 뜻 깊다. 사람들은 종종 캐릭터 디자인을 외형적인 작업으로 보지만, 나는 인물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외형뿐 아니라 삶의 태도, 철학, 역사까지 품어야 하니까.

당신의 시그너처 미학을 정의한다면

의도한 것도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나온 것들도 섞여 있다.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시각적으로 보면 색을 아끼는 편이다. 색에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다채롭게 쓰기보다는 절제하다가 정말 필요할 때 색을 터뜨리는 방식이다. 그래서 빨간색을 자주 쓰게 됐다. 내용적, 현학적으로는, 그때그때 내 안에 있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 그 이야기에서 파생된 게 시각 언어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결국 마음속 이야기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할지 늘 고민하는 편.

신작 ‘Supper’의 한 장면.

신작 ‘Supper’의 한 장면.

지금까지 ‘Opera(2020)’ ‘Origin(2022)’ 등과 같은 전작에 당신만의 추상적 세계를 쌓아왔다. ‘Opera(2020)’는 사회의 집단 구조, ‘Origin(2022)’은 존재의 기원, 신작 ‘Supper(2025)’는 인간의 본능과 심리를 탐색하는 듯하다

대단히 철학적일 때도 있고, 때로는 사회적 질문일 때도 있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대우주의 역사 속에서 어떤 존재인지 고민하게 된다.

유한함에 대한 탐구가 엿보인다

결국 개인의 삶도, 인류도, 지구도 모두 소멸할 운명이다. 어쩌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더 자연스러운 거고, 우리는 잠깐 기적처럼 존재하는 비자연적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이유를 찾고, 신의 존재나 우주의 원리, 자연의 순리 같은 질문을 계속 고민하고 있다. 그 사유들을 시각화한 게 제주 전시였던 것 같고.

요즘 당신의 화두는

내 안에 크게 자리 잡은 질문은 ‘AI 시대에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일상에서도, 창작자로서도 인간 본질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특히 내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 느끼는 소수자들의 목소리도 중요한 고민. 인종과 젠더, 이민자 문제 등 수많은 목소리가 폭발하는 세계 속에서 그 목소리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봐야 할지.

AI는 창작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이미 많이 받고 있다. 미국에서는 특히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사람들이 직업을 잃고 있다. AI가 정말 강력해지면서 단순 제작은 AI가 해낼 수 있는 시대가 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비전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AI는 아주 뛰어난 어시스턴트일 뿐, 그 어시스턴트를 내가 주도해야만 의미가 있다. 비전이 없는 사람들은 AI에게 쉽게 휩쓸릴 거라고 본다. 이건 예술가뿐 아니라 모든 직업에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오른 ‘Opera’의 감독이자 픽사 출신 애니메이터 에릭 오 감독.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오른 ‘Opera’의 감독이자 픽사 출신 애니메이터 에릭 오 감독.

당신의 작품은 언어가 배제된 대신 형태와 움직임으로 사고하고 말한다. 언어 이전의 감정 혹은 언어 너머의 진실의 힘에 대해 말해 본다면

침묵은 소멸과 생성이 교차하기 직전의 시간 같다. 제주 전시도 결국 낮과 밤이 반복되는 순환 안에서 ‘동트기 직전의 정적’을 담고 싶었거든. 그 어둠과 침묵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상처가 아문다. 그래서 침묵은 멈춤이 아니라 시작을 위한 준비 단계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것들이 찬란하게 빛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다. 그 암전과 침묵까지도 하나의 이야기로 보고 있다.

장편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들었다

사실 그 작업은 마라톤이 돼버렸다. 할리우드 시장에서 장편을 만들고 싶은데, 쉽지 않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이고, 변화가 빠르니까. 그 속에서 시대를 타지 않으면서 내가 믿는 이야기를 전하려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 타협하지 않으려고 하니 더욱.

실사 작업을 염두에 두었나 보다

늘 열려있다. 나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으로서, 그 이미지가 애니메이션이었기에 애니메이션을 해왔던 거다. 만약 그 이미지가 실재로 구현되었으면 한다면,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흐르겠지.

예술가로서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할지

어디에도 완전히 소속되지 않은 사람 같다. 픽사에서도, 한국에서도, 헐리우드에서도. 항상 마이너였던 것 같다. 그 외로움이 오히려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나는 계속 길을 찾아 나서야 하는 사람이다. 표현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사람.

자신만의 언어를 더 확장시킬 다음 챕터는

지금은 멈춰 있는 시기다. 단기 프로젝트보다 장기 프로젝트가 많아졌고, 제주 전시 이후 작업 단위가 커졌다. 글로 쌓인 아이디어가 실사영화로 갈 수도 있고, 패션쇼나 퍼포먼스가 될 수도 있다. 짧지 않은 커리어를 이어오며 이제 한 바퀴 돌았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좀 알 것 같다. 내가 뭘 잘하고, 뭘 더 해야 하는지. 재탐색해야 하는 지금이 어쩌면 진짜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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