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시엔 손 놓다가 총선 때만 반도체 타령 [기자수첩-산업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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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두고 여·야, 반도체 벨트 잡기 총력전

글로벌 수준으로 공약 끌어올려야…반도체 육성에는 여·야 없어

경기도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 모습.ⓒ뉴시스 경기도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 모습.ⓒ뉴시스

‘반도체 규제 원샷 해결’, ‘반도체 메가시티 조성’.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공통적으로 내놓은 공약을 두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양당 모두 이른바 ‘반도체 벨트’로 불리는 수원, 이천, 화성 등을 앞다퉈 찾아 자신들이야말로 반도체 정책 결정의 적임자라며 표심 잡기에 나서고 있다.

지난 7일 수원을 찾은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윤석열 대통령이 반도체 문제에 대해 외교적 노력을 많이 기울여 왔다. 그런 부분을 이번 총선에서 완성하겠다”고 언급하며 지난 1월 정부가 발표한’경기 남부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을 당 차원에서 전폭 지원하겠다고 했다.

같은 날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를 찾아 “반도체 산업은 우리 경제의 대들보”라며 경기도 남·동부를 종합반도체 메가시티로 조성하고, 투자 세액공제를 연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준석 대표가 이끄는 개혁신당 역시 ‘반도체 벨트’ 지역에 줄줄이 출사표를 던지며 숟가락을 얹었다. 양향자 의원은 동탄·평택을 연결하는 ‘반도체 고속도로’와 ‘경기남부권 철도망’을 공약했고, 이원욱 의원은 화성을 ‘규제프리존’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여야가 ‘반도체 벨트’ 지역에 잇따라 러브콜을 보내는 것은 경기도 지역이 가장 많은 의석 수(60석)를 갖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이 지역이 어느 한쪽으로만 쏠리지 않은, 후보간 경합이 치열한 곳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반도체가 한국 경제 엔진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소홀이 대했다가는 자칫 선거 풍향이 바뀔 수 있기에 양당 모두 세심히 살피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가 국가대항전으로 확전된 상황에서, 여야가 경쟁적으로 반도체 공약을 내놓고 있는 자체는 고무적이다. 다만 그간 내놓은 정책들과 견줘 눈에 확 띌만한 획기적인 약속이 없고, 중장기적 방향성을 갖춘 대안도 부재하다.

양당은 공장 설립 발목을 잡는 규제를 풀고, 세제 지원을 늘리겠다고는 하지만 2030년 이후를 내다본 중장기 전략이 아니라 단기 처방에 불과하다. TSMC, 인텔, 마이크론 등 차세대 기술에 속도전을 내고 있는 거대 반도체 기업들과 맞설 로드맵은 찾아볼 수 없다.

투자세액공제율 상향을 골자로 한 K칩스법만 해도 그렇다. 시작부터 ‘대기업 감세’라는 프레임에 갇혀 본회의 통과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삼성과 SK는 단순히 대기업으로 볼 것이 아니라 국가전략산업인 반도체 산업을 지탱하는 기업이라는 시각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특혜 시비에 걸려 반도체업계는 상당한 속앓이를 해야 했다.

K칩스법이 다른 나라들의 정책과 비교해 파격적인 것도 아니다. 미국, 일본, 대만 등은 세액공제가 아니라 직접 보조금을 준다. 미국은 자국에 투자한 기업에게 총 530억 달러(약 70조원)을 약속했다. 인텔, TSMC은 받은 보조금으로 가격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물론 반도체 시설 투자, R&D(연구개발) 방식으로 선순환을 택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치열한 퍼스트 무버(선도자) 경쟁에서 유리해진다.

그에 한참 못미치는 K칩스법은 올해 말 시효가 끝난다. 만일 총선 이후 고배를 마신 당이 ‘반도체 규제 완화’ 약속을 깨고 비협조적으로 돌아선다면 한국 반도체로서는 최악의 위기 상황이 닥칠 수 있다. 제 때, 제대로된 지원이 없다는 것은 반도체 경쟁에서 밀린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그간 30년 이상 쌓아올린 한국 반도체 역사를 하루 아침에 무너뜨린다는 것을 말한다.

오는 11월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미국은 누가 되든 대중 규제로 압박할 것이 뻔하다. 동시에 대미 투자를 요구하며 제2의 칩스법을 꺼내들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에 질세라 중국도 3000억 위안(약 55조원)의 자금을 쏟아부으며 기술 자립 의지를 놓지 않고 있다.


격해지는 반도체 전쟁 속 살아남을 방법은 차세대 기술·반도체 공급망 구축뿐이다. 주요국들이 수십 조원의 보조금을 뿌리며 자국에 반도체 기업을 유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해외 투자를 염두한 기업들이 단기 혜택만 좇으려 해외에 깃발을 꽂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속적인 보조금 혜택·기술 안보라는 공동 이익이 형성돼있기에 미국, 유럽, 일본행을 택하는 것이다.

한 달 밖에 남지 않은 총선에서 반도체를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공약은 구체성 측면에서 더욱 스케일이 커져야 하며, 동시에 속도감 있게 추진돼야 한다. 세계 각국이 눈에 불을 켜고 사활을 걸고 있는 반도체는 총선 공약으로 단순하게 소비될 ‘한 철 장사’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반도체에 대한 여야의 진정성은 반도체 벨트 출석 횟수가 아니다. 세계 각국을 압도할 지원책 마련이 우선이며, 이를 속도감 있게 전개할 수 있도록 민·관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약속이 두 번째다. 총선 이후에도 반도체 같은 첨단 전략 물자만큼은 발목을 잡지 않겠다는 여·야의 다짐 역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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