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미·일 반도체 경쟁사는 알 길 없는 ‘물 부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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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인협회가 어제 18개 법정부담금 개선을 정부에 건의했다. 준조세에 해당하는 법정부담금이 기업 경영에 부담이 되니 감면 등을 해 달라는 요청이다. 앞서 1월 정부는 “일종의 규제인 91개 부담금을 전면 정비하겠다”면서 “시행령으로 바꿀 수 있는 부담금부터 속도감 있게 감면하겠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제도 수술’ 주문에 화답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감감무소식이다. 4월 총선을 앞두고 18개로 개선 과제를 추린 이번 건의는 발을 동동 구르는 기업 현장 분위기를 한눈에 읽게 한다.

법정부담금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눈만 크게 뜨면 곳곳에서 보게 되는 ‘그림자 조세’다. 영화 입장권에 붙는 부과금, 여권 발급 때 부과되는 국제교류기금 등이 좋은 예다. 기획재정부가 올해 예상한 징수 규모는 전년보다 12.7% 많은 24조6000억 원이다. 공익사업을 명분으로 삼지만, 필요 이상의 부담을 지우는 감이 짙다. 수출 경쟁력을 훼손하는 역기능도 심하다.

물 이용 부담금이 대표적이다. 이 부담금은 1999년부터 산업용수를 사용하는 기업에 부과되고 있다. 톤당 230원인 원수 비용(인공처리 되기 전 물 비용)에 추가로 170원을 더 내야 한다. 반도체, 빅데이터 등 각종 첨단산업 제조공정이나 데이터센터는 산업용수가 많이 필요하다. 기업 경쟁력을 갉아먹는다는 원성이 쌓일 수밖에 없다.

2019년 발표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일본 등은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전략산업 분야에 물 이용 부담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그런 배려가 있는 나라의 반도체 기업과 전혀 배려가 없는 나라의 기업이 경쟁하면 장기적으로 승부의 추가 어디로 기울겠나. 한경협은 “지속적으로 증가한 물 이용 부담금 부과율을 현실에 맞게 인하하고 감면대상에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등을 포함해야 한다”고 했다.

물 부담금 차이만이 아니다. 주요국들은 반도체 육성을 위해 파격적 정책조합을 내놓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인텔에 85억 달러(약 11조4000억 원)의 보조금을 포함해 총 200억 달러(약 27조 원)를 지원한다. 2022년 반도체·과학법(칩스법)을 제정한 이후 최대 규모다. 미국은 현재 제로 수준인 자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을 2030년 전까지 20%로 끌어올리겠다고 벼르고 있다. 반도체 전쟁은 국가 대항전인 것이다.

일본, 대만 등 인근 경쟁국들도 마찬가지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세계 1위 대만 업체 TSMC의 일본 구마모토 공장은 약 22개월 만에 준공됐다. 원래 5년 걸릴 것으로 관측됐으나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전천후 공사로 준공 기일을 단축했다. 일본 정부와 지자체의 전폭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TSMC는 “전력과 용수가 풍부하고 일하는 문화도 좋다”고 반긴다. 제2, 제3 공장 건설 얘기도 나오고 있다.

국내 사정은 딴판이다. SK하이닉스 용인 공장은 건설 계획이 발표된 지 5년이 지났지만, 첫 삽도 못 떴다. 토지보상, 용수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한다. 물 부담금은 설상가상이다. 이러다 ‘초격차 기술’ 경쟁력까지 잃게 될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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