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은둔청년, 닫힌 문을 열다] 5년 간의 방황 마침표…“작은 관심이 방을 나서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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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길들여진 방, 닫힌 창문 너머로 계절이 바뀌어도 그 변화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세상과의 연결이 희미해질수록 시간은 고요하지만 빠르게 흘러갔고 적막은 깊어졌다. 하지만 어느 날, 그들은 문을 열었다. 작은 한 발짝을 시작으로 스스로 커튼을 젖히고 낯선 바람을 맞이하며 잊고 있던 햇살의 온기를 느꼈다. 세상이 마냥 차갑기만 한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그들은 용기의 발걸음을 내딛었다.

세상은 그들을 심각한 문제로만 다뤘고 어둠의 존재로만 그려냈다. 국무조정실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지난해 고립·은둔 청년의 비율은 5.2%로 2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도 전국적으로 약 54만명이 사회와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고립’, ‘은둔’이라는 단어 몇 개로 이들의 전부를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개의 단어와 숫자 뒤에는 보이지 않는, 뜨거운 이야기들이 있다. 삶을 되찾기 위해 조용히 내딛은 발걸음을 시작으로 세상을 채우고 주변을 사랑으로 물들이고 있는 삶의 청년들이 존재한다. 지금 그 청년들이 닫힌 문을 열고 다시 세상을 마주하고 있다. 이들은 미디어에 비친 피폐하고 어두운 고립·은둔의 모습이 아니라 끝없는 도전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

이형선씨가 본보와의 인터뷰를 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이형선씨가 본보와의 인터뷰를 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 문 밖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이토록 버거울 줄은 몰랐다. 누군가에게 세상은 살아가기에 너무나도 시렸고 날카로운 가시밭길과 다름없었다.

이형선(27)씨는 1년여 전까지만 해도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었다. 대학 진학 당시 선택한 전공이 자신과 맞지 않으면서 학업에 흥미를 잃었다. 여러 번 다시 마음을 다잡아봤지만 결심은 금세 흔들렸고 스스로를 믿는 일조차 점점 어려워졌다. 이 과정이 반복되자 그는 극심한 자책감과 무력감에 빠졌다. 사람들을 만나기가 꺼려졌고 집 밖으로 나서는 것도 쉽지 않았다.

고민에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는 사회가 정의하는 ‘고립·은둔’ 상태에 놓이게 됐다. 사회와의 단절은 더욱 깊어졌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길어졌다. 하지만 긴 고요 끝에 그는 다시 변화의 계기를 찾았다. 작은 도전부터 시작해 서서히 세상과의 연결을 다시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가족의 도움으로 용기를 얻게 됐으며 이후 회복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지금 그는 심리학자라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또 자신의 과거와 비슷한 이들을 향해 “다 괜찮다”며 조심스럽지만 따스한 말을 건넨다.

「투데이신문」은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은둔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은 무엇인지 그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형선씨가 회복 과정을 거치며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제공=본인]
형선씨가 회복 과정을 거치며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제공=본인]

드넓은 사회 대신 작은 방을 택한 이유

그가 세상과의 문을 닫게 된 건 막 성인이 돼 세상으로 첫 발을 내딛던 스무 살 무렵이었다. 모두가 꿈을 향해 달려가던 그 시기에 형선씨는 조용히 자신만의 공간으로 숨는 것을 택했다. 작은 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세상과의 거리를 둔 채 조용히 멈춰선 것이다. 

부모님이 체육 관련 일을 하셨기에 그 역시 자연스럽게 예체능 계열로 대학 진학을 준비했다. 하지만 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체육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방향을 바꾸기로 결심한 그는 막연히 인문계열로 진로를 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부모님은 취업 전망이 밝은 학과를 권유했다. 확신이 없던 그는 결국 부모의 뜻에 따라 경제학과에 진학하게 됐다.

처음엔 ‘체육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으로 입학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수업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경제용어는 낯설기만 했고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이에 점점 공부에도 흥미를 잃어갔다. 점차 자신감은 바닥을 향했으며 마치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학과 생활에 지친 그는 서서히 수업에 빠지게 됐다. 

기숙사의 방 안에서 시작된 은둔은 곧 집으로 옮겨갔다. 점점 자존감은 추락했고 미래는 안개처럼 흐릿했다. 결국 그는 1학년 2학기를 끝으로 자퇴를 결심했다. 그 결정조차도 쉽지 않았다. 몇 번의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보려 했지만 맞지 않는 공부는 매번 그를 벽 앞에 세웠다. 그렇게 그는 학교를 떠났다.

그 후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처음엔 수업 외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하며 바깥세상과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고 밤낮이 뒤바뀐 생활은 누군가와 약속을 잡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혼자 남겨진 하루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편안할 줄 알았던 방 안에서도 형선씨는 매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답답한 감정에 휩싸여 지냈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지만 마음은 흐트러졌으며 몸은 무겁기만 했다. 어렵게 마음을 다잡아 다시 아르바이트나 공부를 시작해 봐도 중간에 멈추기를 반복했다.

“스스로도 뭔가 이상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뚜렷한 정답이 없으니까 더 막막했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무언가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결국 또 중단하게 되더라고요. 무기력한 날들이 반복되면서 혼란스러움도 커졌어요.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죠. 정말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는 가족과의 관계도 편치 않았다. 어머니와 여동생, 이렇게 셋이 함께 살았는데 특히 어머니와 자주 부딪혔다.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뒤섞인 어머니의 다그침에도 그는 차마 자신 안의 복잡한 감정을 솔직하게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말해도 이해받기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알고 있음에도 스스로조차 어찌할 수 없는 그 마음은 결국 모자의 사이에 길고 깊은 침묵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 줄기 빛은 있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진 몇몇 친구들과의 인연은 그에게 작은 숨구멍이 돼줬다. 자주는 아니어도 그들과 연락을 이어가며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금 나아갈 용기를 조금씩 얻었다.

“고립된 시간이 길어지면서 제 건강도, 생활도 모두 망가졌어요. 사람들과의 관계도 하나둘 끊기더라고요.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버렸어요.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가장 괴로웠어요. ‘이대로 계속 있으면 정말 돌이킬 수도 없게 되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밀려왔죠.”

형선씨의 일상생활 속 모습. [사진제공=본인]
형선씨의 일상생활 속 모습. [사진제공=본인]

누군가의 작은 관심은 많은 것을 바꾼다

은둔의 끝자락에서 형선씨는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무기력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는 그에게 어떤 희망도, 동기도 되지 못했다. 이미 5년이라는 시간은 훌쩍 흘러 있었다. 작아진 자신에 비해 사회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우울함에 잠식돼 가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청년재단에서 진행하는 한 프로젝트 참여를 권했다. 이는 또래 청년들과 함께 지내며 규칙적인 일상을 보내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 참여를 통해 형선씨는 뒤바뀐 생활패턴을 규칙적으로 맞춰갔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며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다. 걱정으로 시작했던 것과 달리 단체생활 속에서 그는 자신이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서로 다른 생활습관과 성향 또한 포용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칭찬하고 믿어도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시간이었다.

“우울증으로 상담을 받을 때마다 의사 등 전문가 분들이 바깥공기를 쐬라고 조언해 주셨어요. 듣기엔 쉬워 보이지만 우울을 겪는 입장에선 그 첫걸음이 정말 어렵고 무섭거든요. 그런데 단체활동을 하며 요리와 운동을 하고 외출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가게 되더라고요. 그게 저에게 큰 용기가 됐어요.”

사회와의 연결고리를 되찾은 그는 점차 활동 범위를 넓혀나갔다. 도움을 받았던 센터에서 일을 돕다가 제주도 야구 전지훈련에도 함께하게 돼 이 프로그램의 일부를 직접 맡아 진행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이끌고 계획을 세우는 일은 처음 해보는 도전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두려움이 컸다. 하지만 그때마다 주위의 따뜻한 격려는 그에게 다시 한 걸음 내딛을 용기를 줬다.

그 프로젝트는 단지 하나의 경험을 넘어 형선씨가 회복의 여정으로 나아가는 소중한 첫걸음이 됐다.

“같이 공동생활을 했던 형들이랑 센터에 계셨던 코치님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이들이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 자신을 그대로 보고 왜곡하거나 부족하게 보지 않는다는 게 너무 따뜻했죠. 그 덕분에 저도 처음으로 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한때는 누군가와의 만남 자체를 꺼리던 그였지만 지금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고 있다. 고립·은둔을 회복한 청년들이 모인 ‘잘나가는 커뮤니티’ 활동부터 독서 모임 등 다양한 만남의 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데 이어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관계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법을 배웠으며 그것에 행복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형선씨가 퓰리처상 사진전을 관람한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제공=본인]
형선씨가 퓰리처상 사진전을 관람한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제공=본인]

앞으로 살아갈 ‘심리학자’로서의 삶

과거 형선씨는 학창 시절 늘 공부에만 매달리던 학생이었다. 친구들과 축구를 즐기는 시간 외에는 거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학업에 쏟았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인간관계는 좁아졌다. 이후 은둔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오롯이 혼자 세상과 단절된 채 자신과만 마주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회복의 시간을 거치면서 그는 타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들의 생각이 궁금했으며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삶의 이야기를 들어 그것들을 자신 안에 차곡차곡 쌓아가며 자양분으로 삼고 싶어졌다.

“5년의 고립과 2년의 회복을 지나며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시선이에요. 이제는 ‘나’로부터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됐어요.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도 그들의 감정을 느끼려고 노력하고 표정 하나하나 마음에 들어오게 되더라고요. 이때 나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그때를 지나 이제는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걸 또 한번 깨달았죠.”

과거 그는 혼자 모든 것을 감내해야만 했다. 괴로움은 혼잣말처럼 삼켰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힘든 일이 생기면 주저 없이 털어놓는다. 그 대화 속에서 위로를 얻고 다시 상처받을 용기를 얻는다.

이제 형선씨의 일상은 하고 싶은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심리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기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과거의 자신처럼 상처 입은 청년들을 돕고 싶다는 목표를 품었다. 자신이 받은 위로를 다시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현재 사이버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며 졸업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사실 예전에는 제가 고립·은둔 청년이라는 생각조차 못 했어요. 그런데 같은 경험을 가진 이들을 만나보니 정말 다양한 사연과 모습이 있더라고요. 우리 사회는 아직도 고립 청년들을 어둡고 절망적인 시선으로만 보는데, 오히려 그게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청년들을 서로 연결해주는 다리가 있었으면 해요. 숨지 않고 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거죠.”

형선씨가 본보와의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투데이신문
형선씨가 본보와의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투데이신문

긴 어둠 끝에 마주한 작은 빛, 그 빛을 따라 형선씨는 다시 걸음을 뗐다. 이제는 자신만의 속도로,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오늘도 누군가의 어둠에 따듯하게 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꿈꾼다.

“앞으로 고립·은둔 청년뿐만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서로를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사회로 변화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나로, 있는 그대로 봐주는 세상이 왔으면 해요. 그리고 현재 어둠을 걷고 있을 청년들에게 조심스럽지만 제가 고립 당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전할게요. ‘괜찮다’, ‘많이 불안하고 힘들 텐데, 잘못한 게 아니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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