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규나, 오늘 또 노벨문학상 받은 한강 맹비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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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규나 / 김규나 페이스북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을 비판하며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비하해 논란을 일으킨 소설가 김규나가 “한강은 대한민국의 탄생과 존립을 비판하는 작가”라며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국민이 대노할 일이라고 비판을 이어갔다.

김규나는 1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언론이) ‘감히 노벨상 받은 한강을 비판한’ 김규나에게 돌을 던지라고 선동하고 있다”며 “왜 나 같은 무명 글쟁이의 글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대중을 광분시키는지 이제야 답을 알겠다. 내 글이 사실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김규나는 지난 10일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직후 “한강의 소설들은 죄다 역사 왜곡”이라고 언급하며 한강의 대표작인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언급한 바 있다.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김규나는 이들 작품을 두고 “역사적 트라우마 직시를 담았다는 소설들이 실상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규나는 이날 자기 주장이 사실이라고 거듭 말했다.

김규나는 “노벨문학상을 기점으로 5·18과 4·3을 미화하고,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는 시도에 내가 재와 고춧가루를 뿌린 셈이다. 그래서 메신저를 욕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가 권력이 죄 없는 광주 시민을 학살했다는 한강의 소설은 대한민국의 탄생과 존립을 부정하는 내용”이라고 주장하며 “노벨 심사위원들이 한강을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한 작가’로 칭찬한 것은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한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은 축하받을 일이 아니라 국민이 대노할 일”이라며 “5·18은 명단도 공개되지 않은 수많은 유공자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무장 반란을 군인들이 진압한 사건이다. 제주 4·3도 남로당 잔당이 일으킨 반란이었다”고 주장했다. 김규나는 두 사건 모두 진압 과정에서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지만 반란이 없었다면 그 희생도 없었을 것이라며 정당한 진압이었다고 강조했다.

김규나는 한강의 작품이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심어주고 있다고 주장하며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해당 소설에서 “이 나라는 죄다 썩었어”라는 문장이 나오는 부분을 언급하며 “이러한 표현은 이 나라를 모욕하는 의도가 담긴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규나는 “우리나라 문단에는 대한민국에 대한 악의적인 모욕과 비하가 가득 담긴 작품이 많다. 이들이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자부심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비하하는 작품들로 독자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규나는 자신이 외톨이 작가로 살아온 이유도 문단의 ‘PC(정치적 올바름)’ 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PC에 경도되지 않은 글을 쓰기 때문에 문단에서 외면당했다”라면서 자신이 계속해서 문단의 흐름에 맞지 않는 목소리를 내왔음을 강조했다. 그는 “나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부끄럽고 슬프다. 그녀의 작품이 세계에서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로 상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규나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이것은 문학적 성과가 아니라 정치적 판단이 작용한 결과”라면서 “노벨문학상은 성별과 인종, 대륙에 따라 차례차례 돌아가며 수여되는 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남성 작가는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없었고, 서양인도 곤란했으며, 동양인에게 상을 주려니 이미 일본은 받은 적이 있어 한강이 수상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노벨상은 정치적이며, 공산주의 비판 작가 옌롄커처럼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면 상을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규나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대한민국의 역사 왜곡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며 “한강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왜곡하는 작품을 쓰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라고 밝혔다.

김규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판과 모욕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그는 “내가 던진 작은 돌이 이렇게 큰 파문을 일으킬 줄 몰랐다”며 “비난과 모욕이 쏟아지지만, 동시에 진실을 깨닫고 나를 지지해주는 독자들이 늘어나고 있어 감사하다”고 밝혔다. 김규나는 “작가는 글로서 자신의 숙명을 감당해야 한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도 그 책임을 잘 감당하길 바란다”라며 글을 마무리했다.

「작가 김규나가 13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

세상이 나를 말하게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에 대한 이야기는 더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던진 돌이 어떤 파문을 몰고 올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지난 5년간 그래도 주류, 그래도 메인이라는 조선일보에 ‘소설 같은 세상’이라는 칼럼으로 정치적 발언을 해왔고, 이코노미 조선에 ‘시네마 에세이’를 써왔지만 다른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무엇보다 소설책을 세 권 내고 산문집도 냈지만 PC에 경도되지 않은 글을 쓰는 나는 문단에서 일찌감치 외면당했고, 탄핵 이후엔 동료 작가 하나 없이 외톨이로 견뎌온 처지다.

지난 10월 10일, 밤 9시 조금 넘어 쓴 두어 편의 글 때문에 어제오늘, 일파만파(一波萬波)라는 말을 실감한다. 한겨레 등 지면을 통해 인용, 비판되더니 MBC와 JTBC 등 TV 뉴스 매체를 통해 내 글이 악의적으로 보도되고 알려진 ‘덕분’이다. 내 글을 신나게 해체, 비판한 기자님들, 편집국은 어떤 의미로 쓴 글이냐 내게 물어온 적 없다. 인용해도 되겠느냐고 형식을 갖춰 의사를 타진해온 적도 없다. 그저 개인 소셜 미디어에 올려놓은 글을 멋대로 가져다 박제하고는 천박하게 제목을 달고 개에게 뼈다귀를 던져주듯, ‘감히 노벨상 받으신 한강님을 비판한’ 김규나에게 달려가 돌을 던져라, 선동하고 있다.

궁금했다. 대체 왜 나 같은, 그들 표현대로 듣보잡, 갑톡튀 무명 글쟁이의 글을 그토록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대중을 광분시키는 것일까? 이젠 답을 안다. 내 글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이 공유된 탓이다. 일반 대중에게 너무 많이 알려지고, 몰라야 하는 독자들을 깨운 탓이다. “어마나, 한국 작가가 노벨상 탔대” 하고 축하하고 기뻐하는 분들께 그건 사실 말이지요, 하고 작가와 그 작품의 실체를 알려버린 것이 내 죄다. 노벨문학상을 기점으로 오십팔과 사삼 미화를 완성하고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 했는데 내가 그 위에 재를, 고추가루를 팍, 뿌려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나는 노벨문학상에 폭탄을, 다이나마이트를 던진 셈이다. 그러니 메시지를 부정하기보다는 저년이 나쁜 년이야. 저것이 꼴에 작가란다, 하며 메신저를 욕보여야 하는 것이다.

일단,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올린 글은 퇴고되어 정서된 글이 아니다. 이렇게까지 퍼질 줄 알았다면 내용은 조목조목 훨씬 더 강력해졌을지언정 점잖게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해서 언론이 더 뜯고 씹기 좋았을 테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일반 독자님들 마음에 더 가깝게, 더 강렬하게 느껴졌을 거라는 생각은 한다.

오십팔을 오쉿팔로 쓴 건 검색에 걸리지 않으려고 한 거지만 물론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건 알만한 분들은 다들 아실 터, 그래도 여기서는 정중하게 오십팔로 써주겠다. 아무튼 언론은 내가 글 속에서 어떤 부분이 역사 왜곡인지는 쓰지 않았다며 거짓을 쓰고 있다는 식으로 선동하고 있는데, 사실은 내가 언급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가슴 쓸어내렸을 것이다.

지성이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 듯, 오십팔은 명단도 공개할 수 없는 수많은 유공자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무장반란을 우리 젊은 군인들이 목숨 바쳐 진압, 국가와 국민을 지킨 사건이다. 당시는 광주사태라고 불렸는데 언제부턴가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의 성역이 되어버렸다. 제주사삼 역시 대한민국의 탄생을 막으려고 남로당 잔당 세력이 일으킨 무장반란이고 우리 경찰이 진압한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진압 과정에서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지만, 애초에 반란이 없었다면 그 눈물 역시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무엇이 먼저인가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 진압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도 없었다.

국가 권력이 죄없는 광주 시민을 학살, 국가 권력이 무고한 제주 양민을 학살했다고 소설마다 담아낸 한강은 대한민국의 탄생과 존립을 부정하는 작가다. 뉴욕 타임즈 기고를 통해 6.25 전쟁이 북한의 남침이 아니라 ‘주변 국가의 대리전’이라고 말하기도 했던 작가에게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했다고 칭찬하며 상을 준 노벨 심사위원들도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한 셈이다. 축하는커녕 우리 국민이 대노할 일이다. 노벨 심사위원들이 ‘우리 역사에 대해 뭣도 모른다’고 쓴 이유다.

노벨상을 중국에 주어야 했다고 말했다는데, 내가 언제? ‘꼭 동양권에게 주어야 했다면 중국의 옌롄커’라는 문장은 일반 독자님들이 옌롄커를 모르니까 그 작가의 국적을 표기한 것이다. 방점이 ‘중국’에 있는 게 아니라 ‘옌롄커’에 있다는 걸 기자나 편집실은 정말 몰랐을까? 옌롄커는 중국 당국에 의해 그의 작품 거의 모두가 금서로 지정될 정도로, 작품마다 공산당을 비난한 작가다. 언론 담당자가 옌롄커를 한 번이라도 읽었다면 이 문장과 작가의 이름은 아예 언급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편하게 쓴 부분, 그리고 언론이 가장 신나게 깐 부분이 아마도 노벨상 심사위원들이 한강을 선택한 이유가 ‘정치적이거나, 물질적이거나 명단 놓고 선풍기 돌렸을 거’라는 문장일 것 같다. 그런데 이것 또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오래된 진실이다. 노벨상은 대륙과 인종, 성별을 가려 차례차례 돌려가며 준다.

2017년 영국(그러나 일본인)의 가즈오 이시구로(남), 2018년은 없고, 2019년 폴란드의 올가 토카르추크(여)와 오스트리아의 피터 한트켄(남)이 동시 수상. 2020년 미국의 루이스 글릭(여), 2021년 탄자니아의 압둘라자크 구르나(남), 2022년에는 프랑스의 아니 에르노(여) 2023년엔 노르웨이의 욘 포세(남)이 탔다.

성별만 봐도 이해가 되지 않나? 그러니까 올해는 아무리 잘 썼어도 남성 작가는 받을 수 없다. 서양인도 곤란하다. 황인종에게 주긴 해야 하는데 일본은 이미 받았다. 뛰어난 소설가 옌롄커의 경우는 중국 정부한테 미움받을 정도로 공산주의 비판이 너무나 강렬하다. 현재의 정치적 (안)올바름(P.C)을 잣대로 삼는 노벨이 상을 줄 리 없다. 그리고 로비 없는 사업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순진을 넘어 무지다. 무지는 죄다.

노벨은, 특히 문학상은 정치적이다. 그가 어느 대륙에서 어떤 피부의 색깔을 가지고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핍박받으며 고생하다 망명해야 했던 작가 이스마엘 카다레는 공산주의자 피터 한트켄이 노벨문학상을 탄 것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바 있다.

헤르만 헤세나 카뮈처럼 좋아하는 수상 작가도 많지만 노벨문학상은 작가의 문학성을 평가해서 주는 상이 아니다. ‘윤리적 도덕성을 갖춘 진실한 문학으로 인류에 기여한 문학’을 치하하는 것이 노벨의 뜻이었지만, 그것을 심사하는 것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 1901년 첫 수상자를 냈으면서도 그 이름만 봐도 눈이 부신 작가 중 노벨상을 타지 못한 작가들은 의외로 많다. 톨스토이, 체호프, 밀란 쿤데라, 필립 로스,코맥 매카시, 나보코프, 프루스트, 보르헤스, 그리고 톨킨..

이제 내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부끄럽고 슬프다’고 한 이유를 말할 차례다. 팻 머피의 단편 추리소설 ‘채소 마누라’와 설정이 거의 똑같은 한강의 단편 ‘내 여자의 열매’에는 밑도 끝도 없이 “이 나라는 죄다 썩었어!’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에 대해 나는 2017년, 다음과 같은 후기를 적어놓았다.

– (한강의 소설 ‘내 여자의 열매’) 본문 한가운데 밑도 끝도 없이, 「마치 ‘이 나라는 죄다 썩었어!’라고 술좌석에서 외치는 사람처럼 적의에 찬 목소리로 아내는 내뱉었다.」라는 부분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진짜 그렇게 외친 것도 아닌, 그러나 참으로 요상하고 과격한 비유였지만, 출판사 소개 글처럼 `삶의 고단함과 희망 없음에서 유래한 슬픈 아름다움`을 쓴 작품이라는 식의 미명(사실 왜 고단하고 희망이 없는 삶이 아름다운지 모르겠지만), 실은 이것이 이 소설의 숨겨진 주제다. 썩어버린 이 땅의 역겨움을 자각한 여자는 더 이상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하여 식물이 되었고, 그걸 모르는 둔한 남자와 나머지 군상들은 개돼지처럼 잘도 살아간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문단에 포진하고 있는 작가들 거의 대부분의 작품 속에는, 자기들이 발붙이고 사는 이 땅에 대한 악의적인 모욕과 비하가 감춰져 있다. 이것이 언제부턴가 내가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는 이유이다. 이 작가와 이 작품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문단과 서점을 장악해온 유명 작가들의 발언과 작품 속에는, 그들 자신이 나고 자란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이나 자부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을 읽고 나면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이 나라는 ‘썩은 나라’ ‘부정한 나라’ ‘미개한 독재국가’라는 프레임 안에 갇히게 된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 대한 수치심과 열등감으로 분노하게 된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작품들만 문단에서 내보내고 평단에서 찬양하고 언론에서는 상을 받았다고 띄워준다. 그러면 독자들은 그 작가와 작품의 주장이 옳다고 신뢰하게 된다. 이런 유의 작품이 다량으로 양산되는 이유는 작가들이 ‘시대의 지성인’이어서가 아니다. 그러한 방향의 작품을 의식적으로라도 쓰지 않으면 인정받을 수 없는 문단의 구조 때문이다.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우리나라를 헐뜯고 비하하는 작품으로 부와 명성을 얻고, 그 혜택을 누리며 다시 우리 역사와 자본주의를 짓밟은 작품을 쓰는 웃지 못할 아이러니.

그렇게 그들은 마땅히 토해내야 할 지성인의 양심이자 고뇌인 양,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 독자들에게 미움과 분노와 열등감을 무책임하게 부추겨왔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으로 순환되는 출판문화계의 시스템이야말로 책을 좀 읽는다는 사람들이 문제의 근본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은 채, 의식 있는 시민임을 자부한다. (인용 끝)

태어나 처음 받는 관심과 시선, 모함과 비난과 욕설. 하지만 나쁜 일과 좋은 일은 항상 같이 온다. 뜻밖에도 지금껏 나를 몰랐던 독자님들, 진실을 몰라 어리둥절했던 분들이 댓글로, 안부글로 또는 비밀글과 메시지와 메일로 응원과 격려와 지지를 보내주신다. 비슷한 일을 겪어보신 선배님들은 마음 잘 챙기라고 어깨 다독여주신다.

언젠가 나는 ‘작가에겐 글업(文業)을 감당해야 하는 숙명이 있다’고 쓴 적 있다. 이 일을 하면 저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 씨를 뿌리면 열매를 거둬야 하는 것이 업(業)이다. 지금 내가 겪는 일도 작은 글업이다. 노벨문학상이라는 개인의 커다란 영광을 얻은 한강 작가는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고 무거운 글업을 짊어졌을 것이다. 앞으로 그 업을 잘 감당하길 바란다.

여기까지도 너무 길었다. 그래서 오늘은 이쯤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말하도록 등을 민다. 차차 한국 문단의 현실에 대해서 좀 더 말씀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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