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의 시작은 남쪽이었다. 맨해튼 남단, 지금의 로어맨해튼에서 도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류, 금융, 정치가 이 구역에서 먼저 성장했다. 지금도 로어맨해튼은 맨해튼의 고층 빌딩이 가장 밀집한 구역 중 하나다.
우리가 흔히 ‘뉴욕’이라고 말할 때는 뉴욕주 전체가 아니라 뉴욕시를 가리킨다. 뉴욕시는 맨해튼, 브루클린, 퀸스, 브롱크스, 스태튼아일랜드 다섯 구역으로 나뉜다. 그중에서도 한국에서 ‘뉴욕에 간다’고 하면 대부분 맨해튼을 말한다. 여행 동선도 맨해튼에 집중되고 뉴욕 이미지 자체가 맨해튼으로 수렴하는 경우가 많다.
맨해튼은 섬이다. 200개가 넘는 국적이 섞여 살고, 매해 수천만 명이 오간다. 작년 뉴욕시를 찾은 방문객은 약 6430만 명에 달한다.
뉴욕은 멈췄던 시간도 있다. 대부분의 도시가 언젠가 겪을 문제들을 뉴욕은 이미 경험했고, 지금은 그 다음 단계에 있다.
1624년 네덜란드 식민자들이 ‘뉴암스테르담’을 세우며 뉴욕의 기록이 시작됐다. 이후 미국의 첫 수도, 항만, 금융 중심지까지 모든 기능이 이 지역에 집중됐다. 무역과 정치, 돈의 흐름이 남쪽부터 움직였다.
뉴욕을 걷는다는 건, 도시가 지나온 시간과 지금 흐르는 순간을 마주하는 일이다. 로어맨해튼은 그 시작점이다. 이곳에서 꼭 들러봐야 할 장소들을 하나씩 짚어본다.
Point. 1 9/11 메모리얼 & 뮤지엄 (9/11 Memorial & Museum) |
2001년 9월 11일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자리. 그곳엔 뉴욕이 만든 가장 조용한 공간이 있다. 쌍둥이 빌딩이 서 있던 자리에 두 개의 리플렉팅 풀을 만들었다. 검은 사각 틀 안으로 물이 끝없이 떨어진다. 가장자리에 2983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꽃이 놓인 이름도 있다. 생일을 맞은 사람이다. 물소리를 듣으며 사람들은 걸음을 멈춘다.
이 야외 공간이 바로 메모리얼(Memorial)이다. 쌍둥이 빌딩 터 위에 조성한 두 개의 대형 분수, 그리고 이름이 새겨진 벽. 9/11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간이다. 지하로 내려가면 뮤지엄(Museum)이 연결된다. 그라운드 제로 아래에 만든 박물관이다. 규모가 약 1만㎡에 이른다.
뮤지엄 내부는 사건 당일 시간별 기록으로 구성했다. 사건이 벌어졌던 흐름, 이전과 이후의 맥락. 생존자가 내려온 계단, 구급차 잔해, 구조 작업에 쓰인 마지막 철골까지, 모두 당시 현장에서 가져온 유물이다. 메모리얼 홀을 지나 지하 전시실로 내려가는 길목에 계단 하나가 남아 있다. 테러 당시 수많은 사람이 그 계단을 통해 탈출했다. 지금은 ‘생존자 계단’이라 부른다.
한 도시의 하루가 세계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회복을 시작했는지. 뮤지엄은 사건을 기록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관람에는 최소 2시간은 잡는 편이 좋다.
이 모든 공간이 자리한 땅이 바로 그라운드 제로다. 그라운드 제로는 원래는 핵폭발 지점을 뜻하던 군사용어다. 뉴욕에선 세계무역센터가 있었던 장소를 의미한다. 테러 이후, 잔해를 수거하는 데 수개월이 걸렸다. 철재는 일부 해군 함정 제작에 쓰였고, 일부는 뮤지엄에 남았다.
그 자리를 어떻게 다룰지 오래 논의가 이어졌다. 원래 모습을 복원할지, 흔적을 그대로 남길지. 최종 선택은 추모였다. 쌍둥이 빌딩 자리엔 리플렉팅 풀을 만들었고, 옆에는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들어섰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구조물이 그 곁을 채운다. 거대한 하얀 철골의 오큘러스다. 내부도 흰색으로 통일했다. 건축가는 스페인 출신 산티아고 칼라트라바다.
오큘러스(Oculus)는 라틴어로 눈(eye)을 뜻한다. 건축 용어로는 ‘둥근 창’ 또는 ‘천장이나 돔에 뚫린 원형의 창문’을 의미한다. 해마다 9월 11일 오전 10시 28분. 두 번째 타워가 붕괴된 시각. 그때 햇빛이 메인홀 안으로 정확히 들어온다.
뮤지엄은 지하를 향하고, 오큘러스는 위를 향한다. 검은 물과 하얀 공간 사이. 기억과 회복이 조용히 맞닿는다. 뉴욕은 과장하지도, 감정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만, 기억이 흐를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두었다.
Point. 2 틴 빌딩 바이 장 조지 (Tin Building by Jean-Georges) |
맨해튼 동쪽, 이스트강을 따라 자리한 사우스 스트리트 시포트는 뉴욕 무역의 출발점이었다. 19세기부터 선박과 화물이 오가던 이곳엔 지금 복원된 범선과 박물관, 19세기 건물들 사이로 현대적 공간들이 공존한다. 과거 항만 도시의 흔적을 그대로 품은 채 걷기 좋은 거리로 바뀌었다.
시포트 중심부에 틴빌딩(Tin Building)이 있다. 1907년 지어진 이 건물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활기찼던 해산물 시장, 풀턴 피시마켓의 본부였다. 그 시절 항만 물류를 책임졌던 건물은 지금 뉴욕 미식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2005년 시장이 브롱크스로 옮겨간 뒤로 건물은 방치됐고, 2012년엔 허리케인 샌디로까지 훼손됐다. 재건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2022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문을 다시 열었다. 하워드 휴즈 코퍼레이션이 외형을 정비했고, 내부는 장조지 봉게리히텐(Jean-Georges Vongerichten)이 맡았다.
알자스 출신의 세계적인 셰프 장조지는 뉴욕 미식계에서 설명이 필요 없는 인물이다. 1985년 뉴욕에 정착한 뒤 수십 개의 레스토랑을 성공시켰고 지금도 트렌드 한가운데 있다. 그가 뉴욕에 처음 도착했을 때 방문한 곳이 바로 풀턴 피시마켓이었다. 어린 시절 시골 시장에서 신선한 식재료를 사고 즉석에서 요리를 먹던 기억과 뉴욕의 첫 인상이 틴빌딩으로 이어졌다.
그는 틴빌딩을 레스토랑이나 마켓으로만 채우지 않았다. 공간 전체를 하나의 식문화 경험으로 설계했다. 5000㎡ 규모에 걸쳐 6개 레스토랑, 4개의 바, 프라이빗 다이닝룸, 식료품점, 제과점, 와인숍, 아이스크림 매장 등이 조밀하게 들어섰다. 베트남, 프렌치, 멕시칸, 중식, 일식, 비건, 시푸드까지 장르도 다양하다.
눈에 띄는 건 디테일이다. 건물의 금속 지붕과 철골, 붉은 벽돌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더했다. 구조는 그대로인데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무역 거점으로 지어진 공간이 미식 플랫폼으로 전환된 셈이다. 역사의 궤적을 보존하면서도 현재의 감각으로 바꾼 드문 사례다. 도시 재생, 미식, 디자인을 하나로 엮은 이 공간은 현지인과 여행객 모두가 발걸음을 멈추는 곳이 됐다. 과거엔 생선을 사고팔던 장소였다면, 지금은 미식을 고르고 즐기는 장소가 됐다.
Point. 3 휘트니 미술관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는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 조각가로 미국 최고 부호 가문 중 하나인 밴더빌트가에서 태어나, 금융·정계 명문 휘트니 가문에 시집갔다. 1930년,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는 직접 미술관을 열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그녀의 현대미술 컬렉션을 거절한 덕분(?)이었다.
유럽 미술
일색인 미국 내에서 밀려난 미국 작가들을 위한 공간이 없다는 현실이 계기였다. 그는 그리니치 빌리지에 ‘휘트니 스튜디오 클럽’을 열어 살아 있는 미국 작가들의 전시에 나섰고, 그 시작이 지금의 휘트니 미술관으로 이어졌다.
휘트니는 개관 초기부터 신진 작가와 실험적 작품에 집중했다. 주류 밖에서 작업하던 예술가들의 작업을 수집하고 소개하며 미국 현대미술의 생태계를 만들었다. 에드워드 호퍼, 조지아 오키프, 재스퍼 존스, 신디 셔먼 같은 이름들이 이곳에서 처음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금도 여전히 휘트니는 매년 새로운 작가와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다.
전시는 예술이라는 언어를 통해 지금 이 도시와 사회가 가진 질문을 던진다. 인종, 젠더, 정체성 같은 주제를 피해 가지 않는다. 작가를 위한 공간이자, 관람객이 감각을 일깨우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2015년, 휘트니는 하이라인 파크 남쪽 입구에 새 건물을 세우며 맨해튼 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렌초 피아노가 설계한 이 건물은 8층 높이의 유리 구조물로 빛과 도시, 예술이 교차하는 동선을 만든다. 저층부는 거리와 닿고, 중간은 공원과 연결되며, 상층은 허드슨강과 뉴욕 스카이라인을 마주한다. 휘트니 미술관에 들르면 옥상 테라스에 꼭 들를 것을 추천한다. 옥상에 서면 도시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미술관 건물 자체가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2만 5000여 점 소장품은 미국 현대미술 흐름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애드워드 호퍼, 앤디 워홀, 키스 해링, 잭슨 폴록, 조지아 오키프 등 익숙한 이름들이 보인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도 이곳에 있다. 미국 국적 작가만 다루는 기관으로 한국 작가 작품이 포함됐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지금 휘트니 미술관에서는 한국계 작가 크리스틴 선 김의 대규모 개인전을 진행 중이다. 오는 7월 6일까지, 1층, 3층, 8층의 총 3개층에서 드로잉, 비디오, 사운드 설치, 퍼포먼스, 대형 벽화 등 90여 점을 전시한다. 미국에서 태어난 1.5세대 한국계이자, 농(Deaf, 청각장애인)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세계적 미디어 아티스트다. 그는 다양한 시각 언어를 활용해 커뮤니케이션의 경계와 정치성, 사회적 소외와 정체성을 날카롭고 유쾌하게 풀어냈다.
Point. 4 서클라인 하버 라이트 크루즈 (Circle Line Harbor Lights Cruise) |
뉴욕의 밤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마주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 강을 따라 운항하는 크루즈 업체는 여럿 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서클라인 크루즈다. 미드타운 Pier 83에서 출발한 유람선은 허드슨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브루클린 브리지 아래를 지나 자유의 여신상 앞에 정차하고, 로어 맨해튼을 돌아 이스트강과 엘리스 아일랜드까지, 뉴욕의 야경을 차례로 조망한다.
소요 시간은 약 두 시간. 스카이라인과 브리지, 주요 랜드마크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코스다. 선장이 직접 가이드 역할까지 맡아 항로와 풍경을 설명한다. 자유의 여신상, 브루클린 브리지, 맨해튼 브리지, 윌리엄스버그 브리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 사우스 스트리트 시포트 등 뉴욕 주요 지점들이 그대로 지나간다.
탑승 전 30~45분 여유를 두고 도착하는 편이 좋다. 예약하면 대기 없이 바로 입장할 수 있다.
Point. 5 워커 호텔 트라이베카 (Walker Hotel Tribeca) |
트라이베카는 로어 맨해튼을 대표하는 핵심 동네 중 하나다. 워커 호텔 트라이베카(Walker Hotel Tribeca)는 로어 맨해튼 내 위치한 부티크 호텔이다. 과거 리본과 단추를 만들던 공장을 개조해 만든 호텔이다. 트라이베카 산업적 흔적을 그대로 남기고 그 위에 뉴욕 다운타운의 세련된 감각을 얹었다.
호텔 지하에는 놓치지 말아야할 공간이 숨어있는데 세인트 튜즈데이(Saint Tuesday)다. 파리 재즈 클럽과 1900년대 뉴욕 칵테일 바를 오마주해 만든 클래식 스피크이지 스타일의 바다. 스피크이지 바는 1920년대 미국 금주령 시대에 몰래 운영하던 은밀한 술집에서 유래했다.
입구는 은밀하고 조명은 어둡다. 벽돌과 나무, 빈티지 가구와 촛불로 꾸며진 내부는 영화 한 장면같다. 매일 오후 9시 30분부터 자정까지는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온다. 요일에 따라 집시 재즈, 브라질리언 쇼로 등 장르도 바뀐다.
지하 바 외에도 호텔 안에는 블루보틀 같은 커피 브랜드가 입점한 라운지가 있다. 루프탑에서는 맨해튼 스카이라인과 브로드웨이 일대의 건축물을 조망할 수 있다.
뉴욕에서 가장 친절한 직원들을 만났던 곳. 워커 호텔 트라이베카는 트라이베카의 예술적 감성과 다운타운의 밤 문화를 함께 체감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중에서도 세인트 튜즈데이는 그 분위기를 가장 농도 짙게 보여주는 공간으로 현지인과 여행자 모두가 많이 찾는다.
뉴욕(미국) / 글, 사진= 권효정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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