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을 만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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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엽

̒1984Books’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책을 만들고 사진을 찍는다.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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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머리맡에 책이 놓여 있다. 날개를 펼친 채 잠든 새처럼. 고단한 비행을 마치기라도 한 듯 구겨진 채 함부로 다뤄진 흔적이 날개 끝 몇몇 귀퉁이에 역력하다. 추락이었던가. 잠들기 전 읽었던 마지막 문장이 기억나지 않는다. 놓쳐버린 이야기의 실을 이어보려 눈을 감아보지만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포기한 채로 펼쳐진 페이지의 모퉁이를 접고 침대에서 일어난다. 다시 읽어야 하리라. 침대 옆 책상에 펼쳐진 지난밤의 흔적을 엿본다. 순서를 잃은 원고들과 그 위에 널브러진 펜들, 뜯겨 이곳저곳 흩어진 포스트잇과 말라붙은 커피잔. 하루의 시작은 늘 같은 풍경이다. 이제 커피잔을 부엌으로 들고 가 씻을 차례다. 물로 적당히 헹군 잔을 다시 채운 뒤 책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것들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자리에 앉는다. 창문을 통해 푸른빛이 흐릿하게 들어온다. 유난히 적막한 새벽이다. 나와 함께 사는 작은 존재를 지난밤에 근처에 사는 부모님께 맡겼다. 모처럼 혼자라는 사실이 나를 침묵 속으로 끌어들인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오늘 해야 할 일을 메모지에 적는다. ‘인쇄 감리’라는 단어가 가장 앞에 놓인다. 오늘은 파주에 가야 한다.

이 일을 하기 전, 나는 여러 해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았다. 그때마다 가방 속에는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신발을 신고 집 밖을 나서기 전, 서재로 이용하는 현관 옆 벽장 속에서 두 권의 책을 골라 가방에 넣는다. 어깨를 짓눌러 왔던 카메라의 무게는 종이의 무게로 대체됐다. 무언가를 보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 ‘본다’는 행위는 다르지 않다고 믿지만, 가끔 이런 변화가 너무 오래된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다. 언젠가 다시 카메라를 들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벽장 속에 숨겨진 내 서재는 한때 나름 정교한 기준으로 쌓아 올린 건축물이었으나 지금은 무너진 폐허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날마다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에서 내 시선을 빼앗는 책들이 있다. 오늘 나와 함께할 동반자는 한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소설. 어차피 다 읽지 못할 걸 알지만 습관적으로 가방에 넣는다. 마치 다 찍지 못할 걸 알면서도 챙기던 여러 통의 필름처럼. 내가 사는 곳에서 파주까지 차로 네 시간이 걸린다. 저장해 둔 플레이리스트가 한 바퀴 돌고 나면 다음에는 오래도록 청취해 왔던 팟캐스트를 튼다. 익숙한 연주곡을 배경으로 평론가의 낭독이 시작되는 순간은 이 길을 다니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언제나 그렇듯 또다시 그의 목소리에 빠져든다. 때론 책을 읽을 때 머릿속으로 그의 목소리가 울리는데, 그럴 때면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쓴다. 나는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내왔다. 이야기를 전하는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건 내게 흔한 일이 아니다. 책 만드는 일도, 책 읽는 일도 대부분 침묵과 고독 속에서 이뤄진다. 책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몇몇 책은 그 일을 해낸다. 리듬이 흐르고 목소리가 들린다.

도착할 즈음부터 차창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좋은 신호일까.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오늘 인쇄할 책의 운명을 미리 암시하는 것 같다. 이 일을 한 지 8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두려움에 휩싸인다. 나는 실수의 근원과 크기를 예측할 수 없다. 지난번에는 페이지가 섞이는 제본 사고가 있었다.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책임은 내게 있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실수와 함께하는 법을 배워왔다. 하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릴 만큼 심각한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 한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해 인쇄소 근처 카페에 들러 가방 속의 책을 꺼내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친다. 그 안에서 리듬을 느끼고 목소리를 듣고 맛을 본다. 이것이 내가 얻을 수 있는 평화 한 조각. 책 만드는 일이 때로는 전쟁이라면, 책 읽는 일은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 나를 무너뜨리는 것도, 살리는 것도 결국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리는 어려움 없이 20분도 되지 않아 끝난다. 이제 용지 한 장을 챙겨 나와 다양한 빛에 비춰본다. 인쇄소 조명 아래 있을 때와 햇볕 아래 있을 때, 또 그늘 아래 있을 때 책은 모두 다르게 보인다. 이 책을 마주하고 있을 당신을 상상한다. 서점의 형광등 아래에서, 햇살이 들어오는 카페의 창가 테이블에서, 침대 옆 은은한 빛에 둘러싸인 협탁 위에서, 산책길에 쥔 오른손에서. 당신의 눈에 이 책은 어떻게 보일까, 아름다울까, 쓸쓸할까, 리듬이 흐르고 목소리가 들릴까.

다시 네 시간이 걸려 집으로 돌아온다. 20분을 위해 여덟 시간을 운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책 한 권의 탄생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다. 거실 소파에 앉아 숨을 고르는 사이 집을 나설 때와 비슷한 어둠이 다시 찾아온다. 이제 책은 내 손을 떠나 제 운명을 걸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느끼기 시작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잔을 채우고 책상으로 돌아간다. 문자들로 가득한 화면과 흩어진 종이들이 나를 기다리는 곳으로, 새로운 책의 탄생을 준비하는 곳으로. 이곳이 내 자리다. 책을 만들고 파는 일이 곧 나의 생계라는 의미에서도 이곳이 상처 입고 피 흘리는 전쟁터라는 말은 지나치지 않다. 그래도 괜찮다. 구겨지고 더럽혀진 날개를 펼치고 새는 다시 날아갈 것이므로. 그 날개 아래를 피난처 삼아 나는 다시 잠들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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