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동아 김동진 기자] 피터 슈라이어는 독일 출신으로,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힐 만큼 업계에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아우디와 폭스바겐, 현대·기아차 디자인 총괄을 거쳐 현재 현대차그룹의 디자인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우디 80 B3와 TT, 폭스바겐 뉴 비틀, 골프(4세대), 파사트 B5, 기아 K5 등 수많은 히트작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으며, 그 결과 명장 반열에 올라섰다. 각 차량에 일회성으로 적용하는 디자인이 아닌, 로고가 없더라도 소비자가 단번에 브랜드를 인지할 수 있는 디자인 적용을 강조하는 피터 슈라이어. 그는 아우디 싱글 프레임 그릴, 기아 호랑이 코 그릴과 같은 패밀리룩 디자인으로 자신의 철학을 충실히 실행했다.
피터 슈라이어 “나는 뼛속까지 자동차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는 그의 저서 ‘디자인 너머’를 통해 자신을 뼛속까지 자동차 디자이너로 지칭했다. 그의 유년 시절 기억은 훗날 여러 히트작의 영감으로 작용했다.
1953년 독일 바트라이헨할에서 태어난 피터 슈라이어는 식당과 농사일을 겸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1958년 당시 다섯 살이던 그는 부모의 식당에 있는 주문서에 자동차를 스케치하거나, 농사일에 쓰이는 트랙터를 그리곤 했다.
피터 슈라이어의 남다른 재능을 알아본 그의 어머니는 주문서에 그린 그림을 따로 떼어내 ‘피터가 그린 트레일러 그림’이라는 제목을 붙여 보관했다. 이렇듯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시 종이 위에 그려내는 피터 슈라이어의 습관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다. 목공 장인이자 화가였던 그의 할아버지가 강조한 연필의 중요성, 스케치하는 모습에도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어린시절 피터 슈라이어는 비행기를 자주 관찰할 수 있었다. 그가 자란 독일 바이트라이헨할 근처에는 작은 활주로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이 활주로는 피터 슈라이어의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 바로 뒤편에 있었고, 덕분에 비행기를 유심히 살펴보며 엔진 소리만 듣고도 비행기 모델을 맞출 정도로 지식을 쌓았다. 피터 슈라이어가 1983년 글라이더 정식 면허를 취득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미국 전투기 P-51 머스탱을 조종하며 하늘을 나는 꿈을 실현한 피터 슈라이어는 장식 없는 섀시와 조종석의 곡선, 공기역학을 적용한 P-51 머스탱에서 영감을 얻어 훗날 폭스바겐 파사트 B5 디자인에 반영했다.
미술과 비행 등에 열의를 키우며 성장한 피터 슈라이어는 1975년 뮌헨 응용과학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에 입학, 1979년 공업 디자인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그는 대학 3학년 때 객원 교수였던 디르크 슈마우저로부터 아우디 인턴십 자리를 제안받는다. 디르크 슈마우저는 당시 아우디의 자동차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다. 포르쉐 인턴십에 지원했다가 고배를 마셨던 피터 슈라이어는 그 제안을 수락했다. 그의 첫 행선지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아우디 인턴십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피터 슈라이어는 대학 졸업 후 아우디 장학금으로 1979년부터 1980년까지 런던 왕립예술대학(RCA, Royal College of Art)에서 자동차 디자인을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얻었다. 이후 아우디에서 정식으로 외장과 인테리어, 콘셉트 디자인 담당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아우디 80 B3의 외장 스케치(위), 피터가 만든 실내 디자인 중 최초로 양산된 아우디 80 B3의 실내 / 출처=출판사 윌북
아우디 입사 초기인 1983년 피터 슈라이어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아우디 A4의 전신인 ‘아우디 80 B3’의 인테리어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아우디 80 B3는 엔진과 좌석이 앞쪽으로 쏠린 사륜구동 차량이므로, 크고 넓은 콘솔을 만들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피터 슈라이어는 평소 비행에 대한 열정을 활용, 항공기 조종석처럼 통합된 느낌의 내부 디자인을 선보였다. 콘솔의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세련된 피터 슈라이어의 인테리어 디자인은 1986년 아우디 80 모델부터 지속해서 채택됐다.
이후 피터 슈라이어는 1991년 아우디의 캘리포니아 디자인 스튜디오로, 1992년에는 아우디 디자인 컨셉트 스튜디오로 이동한 후 1993년 폭스바겐의 익스테리어 디자인 부문으로 옮길 때까지 아우디 TT와 뉴 비틀, 4세대 골프, 파사트 B5 등 히트작을 연이어 선보이며 명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한국에서 새로운 도전 시작…’호랑이 코 그릴’ 디자인으로 기아 패밀리 룩 형성
당시 피터 슈라이어는 이미 남부러운 것 없는 지위에 오른 상태로 은퇴까지 탄탄대로가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도전과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2006년 기아의 영입 제안을 받은 피터 슈라이어는 당시 한국을 방문한 적도 없었고 기아라는 브랜드에 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다만 그의 전 동료인 그레고리 기욤이 기아에서 재직 중이라는 사실과 기아 SUV 쏘렌토 디자인에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흥미를 느꼈다고 전했다.
기아의 제안으로 2006년 한국을 찾은 피터 슈라이어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연구소에서 기아 디자인 팀의 프레젠테이션을 지켜본 후 기아가 제안한 최고 디자인 책임자직을 수락했다. 그는 당시 기아 디자인팀으로부터 가능성을 확인했으며, 자신에게는 텅 빈 캔버스로 느껴졌던 당시 기아에 자신만의 디자인 철학을 주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고 회상했다.
실제로 피터 슈라이어는 기아 입사 후 그의 디자인 철학을 마음껏 펼쳐 성과를 창출했다. 차량에 적용하는 디자인은 일회성 개별 디자인이 아닌 로고 없이도 누구나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디자인이어야 한다는 철학이다. 싱글 프레임 그릴이 아우디를 상징하듯, 피터 슈라이어는 기아를 상징할 호랑이 코 그릴을 디자인해 2007년 키(KEE) 콘셉트카에 최초로 적용했다. 이후 양산차인 쏘울과 로체 이노베이션, K7에 호랑이 코 그릴을 적용하며 기아만의 정체성을 부여했다.
호랑이 코 그릴이 본격적으로 소비자에게 인식된 계기는 2010년 출시한 K5 1세대의 대히트다. 현대 쏘나타에 밀려 늘 판매 1위 자리를 내주던 기아는 K5 1세대로 2010년 6월부터 8월까지 중형차 부문 판매량 1위를 차지했다. 그 결과 많은 소비자가 멀리서 봐도 한눈에 기아차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K5 1세대는 출시 이듬해,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디자인 부문 최우수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호랑이 코 그릴을 앞세워 기아의 패밀리룩을 정립한 피터 슈라이어는 K3, 스포티지 R, 쏘렌토 R 등에도 마찬가지 정체성을 부여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피터 슈라이어는 2013년 현대차와 기아 양사의 디자인을 총괄하는 현대차그룹 디자인 총괄 사장으로 승진했고, 2018년에는 현대차그룹 디자인경영 담당 사장직에 올랐다. 현재는 현대차그룹의 디자인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섯 가지 디자인 원칙 고수하는 피터 슈라이어
피터 슈라이어는 다섯 가지 디자인 원칙을 고수하며, 동료들에게도 해당 원칙을 강조한다. 그 원칙은 ▲비례와 균형이 전부다 ▲주제를 찾아내라 ▲실내 디자인은 건축이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개발하라 ▲개성을 만들어 주는 것은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다 등이다.
비례와 균형을 강조하는 피터 슈라이어는 자동차를 디자인할 때 첫 스케치부터 디자인을 발전시키는 모든 과정에 걸쳐 자동차를 늘 통일된 전체로 인식하라고 조언한다. 또 자동차 디자인할 때는 명확한 주제를 담아야 하며, 특히 실내를 디자인 할 때는 수많은 고려사항이 있으니 단순한 스타일링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고 제언한다. 예컨대 각 기능을 작동하는 물리 버튼이 운전자 손에 적절히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 실내를 구성하는 재료가 풍기는 인상과 감촉은 어떠한지와 같은 고려 사항이다. 그는 또 자동차를 디자인할 때 디지털 도구보다 아날로그를 선호하는데 기술을 응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너무 의존하면 개성을 잃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도구에 의존하면 지나치게 미래지향적인 결과물이 나와 이질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 앞을 벗어나야 훌륭한 디자인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피터 슈라이어는 디자인의 결과물인 차량을 놓고 해가 질 무렵에 바라보거나, 식당 앞에 주차해 관찰하는 방식도 활용한다. 하루 중 언제 어디서 차량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디자인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 행동이다. 디자이너는 5%의 영감과 95%의 땀으로 이뤄진다고 믿는 그는 여전히 성실함을 최고의 무기로 꼽는다.
피터 슈라이어는 훌륭한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 자동차에만 매몰돼서는 곤란하다고 강조한다. 개인 미술전을 열 만큼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던 피터는 재즈와 같은 음악뿐만 아니라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국제영화상을 수상하자, 피터 슈라이어는 봉 감독에게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이렇듯 그는 늘 자동차 업계 외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그로부터 영감을 얻어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이곤 했다.
끝으로 피터 슈라이어는 내연기관 시대가 저물고 전기차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지금, 수많은 전자제어 기술을 포함한 변화상을 디자인에 어떻게 반영해야 할지, 즉 ‘다음은 무엇일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전한다. 그러면서도 자동차 디자인은 실용적이고 사용하기 쉬워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글 / IT동아 김동진 (kdj@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