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랏차차! 박재민 감독의 여자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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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킷과 스커트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재킷과 스커트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직장생활 10년 차에 번아웃이 오고,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을 둘러싼 상황을 보며 느끼는 무력감이 목젖까지 차올랐던 2017년 설날에 우연히 여자 씨름과 마주하게 됐다고
미투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그 물결이 널리 퍼지길 기대했지만, 더 큰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강력한 문화 콘텐츠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성의 피해 서사만 반복적으로 양산하기보다 더 큰 힘을 낼 수 있는 이야기,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강인한 여성들의 영화 말이다. 그러다 그해 설날, 우연히 TV에서 여성들의 씨름 경기를 목도했다. ‘씨름하다’라는 말은 누구나 쓰지만, 보통 남성을 그 주체로 떠올리지 않나. 20대 초반부터 50대까지, 타투와 쇼트커트를 한 여성들이 가부장이 공고히 지켜보고 있는 명절 한가운데에서 주인공이 된 채 서로 메치고 엎어뜨리며 싸우는 모습 그 자체로 엄청난 통쾌함을 느꼈다. 체격이 유니폼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모습에서 직관적이고 강력한 힘, 그 세계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 영화를 만들게 됐다. 공교롭게도 2017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중파 방송에서 여자 씨름 경기를 중계한 때였다. 운명적이게도.

제작 기간 7년 동안 최초 여자 천하장사인 임수정 선수를 비롯해 척박한 환경에서 송송화, 양윤서, 김다혜, 최희화 등의 선수들이 서로 의지하며 나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든 생각은
여성 씨름은 많이 주목받지 못했고, 이들 선수가 모인 여성 실업 팀도 불안정한 환경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이제 명실상부한 실업 팀 여럿이 단단하게 꾸려져 있다. 어쨌든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여전히 남자 씨름만큼 큰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남녀의 상금 격차 문제도 있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분명 크고 작은 결실을 맺었다. 덕분에 미래 여자 씨름 선수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지금 임수정 선수는 100승이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자신만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세계를 지켜낸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점점 여성 스포츠에 대한 관심도 커지며, 〈골 때리는 그녀들〉 〈사이렌〉 등 예능 콘텐츠도 사랑받기 시작해서 기쁘다.

〈모래바람〉 스틸 컷 속 임수정 선수.

〈모래바람〉 스틸 컷 속 임수정 선수.

영화사 경영지원 팀으로 근무하다 직접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계기는
영화산업과 밀접하고, 영화를 좋아했지만 마음에 드는 콘텐츠는 부족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늘 보고 싶었는데, 그건 결국 여성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였다. 처음에는 〈모래바람〉 기획 PD 포지션으로 연출자를 찾아다녔는데, 제작비 마련이나 진행이 쉽지 않았다. 그때 한 감독님이 “원래 다큐멘터리는 자기가 꽂힌 사람이 하는 거다. 그냥 네가 카메라 들고 연출까지 하라”는 말에 용기를 냈다.

영화를 만들며 지키려 했던 원칙
무조건 완성돼야 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첫날 취재 갔을 때 “우리 거 누가 보겠어요?”라는 선수들의 말에 울컥했거든. 대한씨름협회에 자료를 문의할 때도 여성 씨름에 대한 역사나 기록이 전무했다. 이 영화라도 현재 활동하는 여성 씨름 선수들의 기록이 되길 바랐다. 또 세대가 만나는 장이 됐으면 한다. 노년층이 즐길 수 있는 문화 콘텐츠가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60~70대 분들은 씨름 자체를 극장에서 본다는 데 즐거워하고, 젊은 세대는 같은 여성으로서 ‘임파워링’되면서 말이다.

11월 27일 개봉하는 영화 〈모래바람〉 포스터.

11월 27일 개봉하는 영화 〈모래바람〉 포스터.

관객들이 마음에 어떤 불꽃을 품고 가길 바라나
오랫동안 씨름판을 쫓아다녔지만, 그렇다고 내가 씨름 기술에 능통한 건 아니다. 씨름 자체가 아니라 씨름하는 사람들, 여성에게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삶의 방향성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불안하고 걱정되는 이들에게 선수들의 도전이 또 다른 이정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자신들의 공간과 마음을 열어준 선수들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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