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순례자들’ 허평강 감독이 붙든 것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영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스스로 유토피아를 떠나 불완전한 세계를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40만 부 이상 판매된 김초엽 작가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수록작 가운데 처음으로 영상화된 작품으로, 지난 3일 개봉해 관객과 만나고 있다.
총감독은 허평강 감독이 맡았다. ‘명탐정 코난: 제로의 집행인’ ‘하이큐!! 투 더 탑’ ‘일본침몰 2020’ 등 다수의 일본 애니메이션에 참여해 온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총감독으로 데뷔했다. 허평강 감독은 원작이 지닌 문학적 감성과 신비로운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애니메이션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확장했다.
특히 원작에서 편지를 받는 독자에 가까웠던 소피의 존재감을 키우고 인물 간 관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한편, 정적인 서사를 동적인 영상 문법으로 풀어내며 몰입감을 높였다. 여기에 한국적인 정서가 녹아 있는 따뜻한 색감과 풍부한 상상력을 더해 독창적인 SF 세계관을 완성했다.
최근 시사위크와 만난 허평강 감독은 원작이 가진 문학적 감성을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하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는지, 작품이 전하는 사랑의 의미는 무엇인지 직접 들려줬다.
-총감독을 맡은 첫 작품, 일본이 아닌 한국 작품으로 관객과 만나게 됐다. 소감은.
“일본에서는 SF 장르가 굉장히 활성화돼 있지만, 한국처럼 여성 SF 작가들이 이렇게 큰 붐을 일으킨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2019년부터 여러 작가들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나 역시 김초엽 작가와 천선란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감성 SF이면서도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독보적인 장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작품을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게 돼 감회가 남다르다. 한국에서는 흔하지 않은 장르로, 그림체는 귀엽지만 심오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어른들도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된 것 같아 의미가 크다.”
-원작을 보며 떠올린 이미지, 이 영화의 시작이 된 무엇이 있었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여러 단편 가운데 네 편 정도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읽어보니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만 유독 이미지가 떠올랐다. 굉장히 명확하게 장면들이 그려졌다. 행성은 이런 모습일 것 같고, 핑크빛 돌산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원작이 수록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표지 역시 핑크빛이라 더 자연스럽게 연결됐던 것 같다. 이타사는 반대로 회색 도시의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이곳은 좋지 않은 곳이고, 유토피아는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니 유토피아는 완벽한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완전한 사람들이 있지만 자신의 불완전함을 불완전함으로 느끼지 않는 곳이었다. 결핍도 있고 핸디캡도 있지만 ‘너의 얼룩이 예쁘다’고 말해주는 곳이었다.
반면 지구는 계층이 명확하게 나뉘어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나쁜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개조인과 비개조인이 공존하는 사회라는 점에 주목하게 됐다. 개조인 구역은 아름다움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공간인 만큼 미감이 뛰어난 도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부분은 시각적으로 구현하기도 쉬웠다. 비개조인 구역은 오히려 인간적인 면이 더 많이 남아 있는 공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리브와 델피가 지내는 레지스탕스 마을 역시 그런 관점에서 접근했다. 지구 안에 있지만 마치 행성의 마을을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 더 따뜻하고 고즈넉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 이미지들이 소설을 읽는 순간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에 이후 발전시키기도 수월했다.”

-작화를 구상할 때 어떤 고민을 했나.
“일본 애니메이션을 많이 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 정체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본 업계에 들어가 배운 것을 한국에 와서 그대로 재현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고민했다. 한국인 크리에이터로서 접근했고, 한국 관객들이 앞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한 기대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본에서 하던 것을 그대로 가져오는 방식은 처음부터 하지 않으려고 했다.
위현송 작가(캐릭터 디자이너)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오히려 옛날로 돌아가 보자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그립다고 느끼는 그림체는 무엇일까 생각했을 때 ‘세계 명작 극장’이 떠올랐다. 물론 한국 작품은 아니지만, 어릴 때 일요일 아침마다 ‘플란다스의 개’ ‘빨간 머리 앤’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보면서 자랐잖나. 그 그림체를 지금 다시 봐도 낯설게 느끼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5등신에서 6등신 정도의 비율 안에서 조금 더 따뜻하고, 소위 말하는 마니아층뿐 아니라 일반 관객들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림체를 만들고 싶었다. 어딘가 그립고 따뜻한 분위기 안에서 다양성을 추구해 보자는 과정을 거쳐 지금의 그림체가 나오게 됐다.”
-영감을 받거나 참고한 게 있다면.
“튀르키예 카파도키아에 간 적이 있다. 그곳은 여기가 정말 지구가 맞나 싶을 정도로 화성 같은 풍경을 가진 곳이다. 길쭉한 돌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큰 지형 변화가 있었던 지역이다. 그곳에서 이슬람교의 탄압을 받던 크리스천들이 돌산을 파고 들어가 살아남은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돌산 안은 개미굴처럼 이어져 있었고, 사람들이 자신만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십자가와 여러 상을 만들어 놓은 공간도 있었다. 굉장히 어둡고 폐쇄적인 곳이었지만 그 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흔적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 경험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행성 역시 돌을 파서 만든 공간으로 설정했고, 소피의 방도 돌산 안에 자리하도록 만들었다.”
-원작보다 종교적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더라.
“릴리가 창조주와 같은 존재라면 당연히 신처럼 모셔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실제로 봤던,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지켜낸 사람들의 흔적이 기억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런 요소들을 조금씩 행성에 녹여냈다. 그러다 보니 성전과 비슷한 공간도 만들어지게 됐고, 아이들을 돌보는 존재들도 수녀와 비슷한 신녀의 이미지로 설정하게 됐다. 특정 종교의 이미지에만 머무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가톨릭이나 기독교의 색채로만 보이지 않도록 했고, 유대교를 비롯해 여러 종교 요소를 조금씩 가져와 섞어 사용했다.”
-여성만의 공간으로 설정한 이유도 궁금한데.
“원작에서는 행성에서 남자와 여자가 모두 태어난다. 그래서 김초엽 작가님에게 여성들만 있는 공간으로 바꿔도 되는지 먼저 물어봤다. 원작 설정대로라면 남녀가 모두 존재하지만 형제 관계이기 때문에 사랑이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관객들이 ‘남녀가 모두 있는데 왜 굳이 사랑을 찾으러 시초지에 가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다소 이분법적인 접근일 수는 있지만, 영화적으로 설명을 보완하기 위해 여성들만 있는 공간으로 설정하게 됐다. 그래서 아이들을 돌보는 존재들도 모두 여성으로 구성했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등장한다. 성별보다 감정 자체에 초점을 맞춘 이유가 있나.
“나는 이 작품을 볼 때 여성과 남성의 사랑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소피와 데이지의 관계도 우정인지 사랑인지 명확히 규정하기보다, 내 앞에서 사랑을 찾겠다고 사라진 가장 소중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다만 김류현 시나리오 작가와 작업을 하면서 ‘여성과 여성의 관계만 많이 나와도 괜찮을까’ 하는 이야기를 계속 나눴다. 하지만 결국 상대의 성별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던 것 같다. 팬섹슈얼, 무성애처럼 사랑의 형태는 너무나 다양하게 존재한다. 후반부에 음악이 흐르면서 강아지에게 빵을 떼어주는 장면도 나온다. 그런 장면 역시 인종이나 성별을 초월한 사랑의 형태라고 생각했다. 과거에는 백인과 흑인의 사랑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 역시 그것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캐릭터 디자인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무엇인가.
“핸디캡을 가진 소녀들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완벽하지 않지만 아름다운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됐다. 주변을 보면 턱이 조금 길거나 키가 작아도 볼수록 매력적인 사람들이 있다. 데이지의 얼룩도 마찬가지다. 점을 없앨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부분이 더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위현송 작가와도 ‘너무 예쁘게 그리지 말자’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예쁜 소녀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부 관객들은 소피를 보고 작화가 무너진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턱이 길어 보인다거나 비율이 어색해 보인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의도한 캐릭터 디자인이었다. 나는 사랑스러움이 완벽한 아름다움과는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은 아니잖나. 그런 감정처럼, 완벽한 아름다움과는 다른 방식의 사랑스러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원작에서는 이야기를 전달받는 위치에 있던 소피가 직접 움직이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덕분에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더 주체적으로 다가왔는데, 각색 과정에서 의도한 부분이었나.
“데이지도 마찬가지다. 원작에서는 액자식 구성 안에서 결국 올리브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그러다 보니 소피와 데이지가 올리브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역할에 머무르는 부분이 아쉽게 느껴졌다. 다만 움직이는 캐릭터가 둘 이상 있으면 서사를 따라가는 집중력이 분산될 수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데이지와 올리브의 역할을 합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각색 과정에서 캐릭터 자체를 바꾸지는 않지만, 역할이 비슷한 인물들은 하나로 합치는 경우가 있다. 무엇보다 소피를 단순히 편지를 받아 읽는 인물로 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너무 객관적인 시점의 인물이 된다. 마치 망원렌즈로 멀리서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무리 슬픈 장면도 멀리서 보면 감정이 덜 전달된다. 나는 연출할 때 망원렌즈와 근접렌즈를 늘 생각한다. 이번에는 관객이 소피 옆에서 함께 뛰어가는 느낌을 만들고 싶었다. 카메라를 들고 바로 곁에서 따라가는 것 같은 거리감 말이다. 그래서 소피가 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인물로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적인 소설을 동적인 영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가장 고민했던 지점은 무엇이었나.
“서스펜스를 넣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설명하는 방식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녀에게서 수수께끼 같은 통신이 오고 갑자기 올리브를 찾으러 가겠다고 하는 편이 더 흥미롭지 않을까 생각했다. 또 원작의 중요한 매개체가 편지기는 하지만, 편지가 오가는 방식으로는 시간적인 한계가 있었다. 실시간으로 연락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과정에서 통신기 설정이 나왔다. 친구들이 소울메이트처럼 같은 액세서리를 나눠 갖는 모습에서 착안해 목걸이를 둘로 나누는 설정도 만들게 됐다. 두 소녀가 ‘왜 순례자들은 돌아오지 않는가’를 함께 추적하는 구조가 되면 관객들도 훨씬 쉽게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보다 동적으로 풀어가는 데 집중했다. 행성에서는 소피가 뛰어다니고, 시초지에서는 데이지가 움직인다. 두 사람이 마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다가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각색 과정에서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던 부분은 무엇이었나.
“마지막에 밝혀지는 것이 순례자의 비밀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결국 만나야 한다는 점은 처음부터 중요하게 생각했다. 다만 데이지가 올 것인지, 소피가 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고민을 했다. 릴리의 과거나 델피의 이야기도 더 풀고 싶었다. 데이지가 금서 도서관에 들어가는 장면도 훨씬 길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 감정선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작품 전체가 시처럼 흘러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액션이 들어가면 결이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행성에서는 액션보다 판타지적인 감각을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같은 동적인 전개라도 행성과 지구는 서로 다른 결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작의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라는 문장이 깊게 와닿았다고 했다. 어떤 감정으로 다가왔고, 영화를 통해 어떻게 전달하고 싶었나.
“시대를 관통하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찡하거나 사랑스러운 문장이라기보다, 괴로움 때문에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요즘은 20대, 30대도 연애를 하지 않고 결혼을 두려워한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앞으로 겪게 될 괴로움이 두려워 행복을 먼저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관념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고백 공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상대에게 마음을 전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그런데 이 문장은 괴로움이 있겠지만 그것을 지나야 행복이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지금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건네는 말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 역시 괴로움이나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겁을 먹고 행복을 추구하지 못했던 것 같다. 괴로움에 발을 담그기 싫어서 피하려고 했던 적도 많았다. 물론 그것이 꼭 결혼이나 출산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간적으로 더 깊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괴로움은 통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을 피한다면 계속 어린아이로 남을 수밖에 없다. 작품 속에서 순례를 다녀와야 어른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나에게도 그런 의미로 다가온 문장이었다.”

-그 문장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도 영향을 줬나.
“그 문장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작품에는 그런 뜨거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현장의 스태프들에게도 전달된다. 반대로 누군가 ‘어차피 만화잖아’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잖아’라고 말하면 작품의 온도가 금방 내려간다. 그래서 팀을 꾸릴 때도 비슷한 온도를 가진 사람들을 모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실질적인 기술도 중요하지만 작품에 대한 열정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열정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창작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가치다. 나 역시 작품을 선택할 때 내 감정이 얼마나 크게 움직이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결국 이 작품도 그 두 문장에서 시작됐다. 김류현 작가 역시 그 문장을 가장 좋아했다. 그 문장을 붙들고 끝까지 달려갔다.”
-목소리 연기를 한 배우들에게 강조한 부분은 무엇이었나.
“만화 더빙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우들에게 실제로 열다섯, 열여섯 살에 이런 드라마 역할이 들어왔고, 그 작품의 후시 녹음을 한다고 생각하며 접근해달라고 했다. 박지후가 가장 먼저 목소리 녹음을 했다. 다른 배우들의 녹음도 없었고, 성우 가이드도 없었다. 그림과 대본만 있는 상태였다. 작화를 하려면 입 모양을 맞춰야 해서 보통 연출자가 가이드를 하는데, 내 연기를 따라오지 않았으면 해서 거의 책을 읽듯이 녹음 해둔 것만 있었다. 아무런 가이드가 없는 상태였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가장 힘들었을 거다. 음악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림과 대본만 보고 연기해야 했다. 그런데 정말 준비를 많이 해왔다. 보이시한 데이지도 있었고 발랄한 데이지도 있었다. 열의가 컸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프로페셔널했다. 어떤 가이드도 없는 상태에서 박지후의 목소리로 그날 세계관이 만들어졌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김향기, 이주영은 어땠나.
“김향기는 드라마 ‘열여덟의 순간’에서 인상 깊게 본 배우였다. 소피는 모범생처럼 보이지만 내면에는 뜨거운 불꽃을 품고 있고, 극 중 가장 큰 감정의 변화를 겪는 인물인데 김향기가 가진 깊이가 그런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올리브는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카리스마와 따뜻한 리더십을 동시에 갖춰야 하는 인물이었다. 이주영의 허스키하고 독보적인 목소리가 올리브의 저항 정신과 내면의 다정함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두 배우 모두 캐릭터와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가장 까다로웠거나 공들인 장면이 있다면.
“데이지가 로봇들에게 쫓기다 고층 빌딩에서 밖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있다. 창문에 비친 모습과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이 캐릭터 위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인데, 생각보다 2D 애니메이션에서는 난도가 높았다. 인물도 그려야 하고 창문에 비친 모습도 따로 그려야 한다. 거기에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까지 표현해야 했다. 실사 촬영이라면 사람을 앉혀두고 바깥에서 빛을 움직이면 되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런 효과를 모두 직접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 장면에는 특히 공을 많이 들였다. 무엇보다 아름답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데이지가 ‘얼룩이 예쁘다고 했는데 다른 것 같아’라고 말하는 장면이기에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소피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차가운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세심하게 담아내고 싶었다.”
-음악도 인상적이었다. 새소년 황소윤 음악감독과의 협업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나.
“음악적인 부분은 전적으로 황소윤 감독에게 일임했다. 대신 이 작품이 담고 있는 감정의 결, 소피와 데이지의 관계성, 그리고 두 사람이 내면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등 드라마적인 요소를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또 내가 새소년의 음악 중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지, 황소윤의 기타 소리가 내 마음과 감정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이야기했다. 황소윤의 기타 연주에는 다른 아티스트와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작사나 작곡 같은 세부적인 부분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누가 들어도 ‘황소윤의 음악’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부탁했고, 그 음악 세계를 온전히 지키고자 했다.”
-작품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어려운 질문인 것 같다. 사랑은 사람마다 다르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도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도 있다. 상대를 웃게 해주고 싶은 사랑도 있고, 함께 있으면서 내가 웃게 되는 사랑도 있다. 형태는 모두 다르지만 결국 그것 역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는 특히 소피가 움직이게 되는 원동력으로서의 사랑을 표현하고자 했다. 모범생이고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소피가 움직이게 되는 이유기도 하다. 사랑은 결국 그립고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에 가깝다. 괴로움을 넘어서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라는 문장과도 연결된다. 완벽하지 않지만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 결국 불완전한 존재를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사랑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이 표현하고자 한 것도 그런 사랑이다. 괴로움을 넘어 더 큰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