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최민식, 그렇게 걸어온 ‘배우’의 길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외부 평가에 흔들리기보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만의 기준을 지키는 것. 40년 넘게 배우의 길을 걸어온 최민식이 연기를 이어온 방식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맨 끝줄 소년’은 그런 최민식의 연기관이 고스란히 녹아든 작품이다. 빠른 소비가 익숙한 시대에도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길을 가자’는 마음으로 완성한 ‘맨 끝줄 소년’은 인간의 욕망과 내면을 깊이 파고들었고, 그 진심은 대중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며 호평으로 이어졌다.
최민식은 한때 촉망받던 작가였지만 오랜 열등감과 욕망에 사로잡힌 국문학과 교수 허문오를 맡아 인간 내면의 모순과 균열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욕망과 열등감이 뒤엉킨 허문오의 복합적인 심리를 촘촘하게 쌓아 올리며 다시 한번 깊은 연기 내공을 입증했다.
최근 시사위크와 만난 최민식은 허문오를 이해하기 위해 인물 안으로 들어간 과정부터 배우라는 직업을 대하는 철학, 오랜 시간 지켜온 신념,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들을 향한 진심까지 솔직하게 들려줬다.
-공개 후 반응이 좋다. 소감은.
“기분 좋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좋아할까, 이런 이야기를? 요즘은 미디어 환경도 많이 달라졌고 속도감 있는 이야기와 전개에 익숙한 젊은층이 콘텐츠를 많이 소비하지 않나. 그래서 조금 의구심도 있었다. 그런데 뭐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우리 길을 가자는 마음으로 촬영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작품의 주제 의식에 진지하게 공감하고 비판도 해주고 작품이 내포한 메시지에 대해 토론을 하더라. 좋았다. 아직까지는 이렇게 진지하고 어둡지만 인간 내면의 본래 욕망을 다룬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시는구나 싶었다. 허문오와 이강이라는 인물을 홀딱 벗겨 인간의 민낯, 욕망에 중독되고 굴절된 욕망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여드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런 의도가 어느 정도는 전달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허문오는 문학에 대한 열망과 친구를 향한 열등감이 혼재된 인물처럼 보였다. 어떤 감정이 더 컸다고 보나.
“혼재돼 있는 것 같다. 분명 허문오는 작가다. 비록 20년 전에 자기가 사랑하던 여자에 대한 소설 한 편을 낸 뒤 후속작은 없지만, 현재 대학에서 국문학을 가르치는 지식인이자 작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자로서 갖춰야 할 근본적인 덕목에서 벗어나 외형적인 출세에 너무 집착하지 않았나 싶다. 그게 사실은 비극의 단초가 됐다고 본다. 김수훈의 독설, ‘쓰고 싶은 이야기가 없으면 아예 안 쓰면 되잖아’ ‘문장 공부 다시 해야겠다’는 말 자체가 굉장한 트라우마가 된 거다. 창작물이라는 건 작가나 배우, 음악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결과물에 대한 호불호가 있고,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고 싫다고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평가에 휘둘리거나 민감해질 수밖에 없지만, 만약 자존감이 있고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었다면 친구의 독설도 ‘미친놈 다 보겠네’ 하고 넘겼을 거다. 그런데 허문오는 그 말에 오랫동안 함몰됐다.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허문오의 캐릭터다. 그렇다고 글에 대한 욕망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정말 절절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단에 섰지만, 이강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독특한 형식과 문학적 소양을 보자마자 바로 빠져들지 않나. 이야기를 향한 허문오의 열망은 살아 있었다. 결국 외형적인 출세욕과 작가로서의 근본적인 열망이 혼재된 인물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허문오처럼 열등감이 큰 인물을 이해하는 과정은 어땠나.
“내 가치관으로 판단했을 때는 말이 안 되는 지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이 역할을 연기해야 하지 않나.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려면 그 사람의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 이해 못 할 일은 없다. 내가 열등감이 없다고 말한 건 아니다. 물론 있다. 다만 스스로 조금 낙천적인 편이다. 그냥 ‘하면 되지 뭐’ 이런 거다. 왜 열등감이 없겠나. 일론 머스크도 너무 부럽다. 진짜로. 이상해 보이지만 천재 아닌가. 그 사람이 가진 재력이 부러운 게 아니라 만화 같은 일을 실제로 옮기고 실천하는 게 부러운 거다. ‘저걸 한다고?’ 싶은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지 않나. 나는 나로서 살아가니까 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편은 아닌 것 같다. 그냥 ‘너 잘났구나’ 한다. 나는 나대로의 방식이 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다.”
-실제 배우도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있나.
“남과 비교해서 열등감을 가져본 적은 기억에 없다. 내 스스로 한계에 부딪혀 괴로웠던 적은 수도 없이 많다. 연극할 때부터 그랬다. 한계를 깨고 나가는 것, 소위 업데이트되는 것, 그게 죽을 때까지 배우와 창작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몫인 것 같다. 비단 배우뿐 아니라 글도, 음악도,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건 숙명인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나가떨어질 때도 많다. 나가떨어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그냥 함몰되면 그걸로 끝이다. 또 그런 고통이 없으면 안 된다. 이 일은. 그런데 허문오는 함몰됐다. 외부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면 비극이 되는 것 같다. 물론 외부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준점이 ‘너무 재미있대, 나는 성공했어’가 되면 그것도 모순이다. 배우에게 연극의 3대 요소 중 하나는 관객이다. 영화나 드라마도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존재한다. 그렇다고 그 평가에 휘둘리지 않아야 하는데, 그게 참 힘든 일이다. 다만 점검은 해야 한다. 어떤 점을 좋아했고, 어떤 부분에서 공감이 형성됐는지, 또 어떤 점은 이해하지 못했고 납득하지 못했는지, 서로 소통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를 가장 괴롭히는 순간은 언제인가.
“내가 봤을 때 ‘이건 아니야, 왜 내가 저렇게 했지’ 하는 건 못 견딘다. 미치도록 후회가 된다. ‘미친놈 아니야, 왜 그때 저렇게 표현했어’ 한다. 그럴 때는 술을 엄청 마시고 잔다. 또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헤헤거린다. 어떻게 보면 미친놈 같기도 하고.(웃음) 남겨놓지는 않는 것 같다. 분명히 짚고는 넘어가는데 그걸 가지고 끙끙 앓거나 너무 오래 끌고 가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나 보다.”
-수많은 작품을 하고도 여전히 새로운 얼굴을 꺼낸다는 게 놀랍다. 캐릭터를 차별화해야 한다는 고민도 하나.
“강박은 없다. 손오공이 아닌 이상 머리카락 하나 불어서 소가 됐다, 말이 됐다 할 수는 없지 않나. 작가가 쓴 대본마다 세상이 다르다. ‘파묘’의 김상덕이라는 인물이 살아가는 세상과 ‘맨 끝줄 소년’의 허문오가 살아가는 세상은 둘 다 허구의 이야기지만 분명히 다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다르다. 그 세상에 충실한 거다. 거기에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연스럽게 차별화가 되는 것 같다. 전에는 이런 역할을 했으니까, 이번에는 ‘007’ 제임스 본드 같은 멋있는 역할을 해야지 하는 건 애들 장난도 아니고 말이 안 된다. 다음 작품에서도 결핍이 많은 인간을 연기한다고 해도 그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또 다를 거다. 꼭 글 쓰는 사람도 아닐 거고, 그러면 또 다른 결핍의 모습이 나올 거다. 매 작품 주어진 세상에 철저히 녹아들어 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다 보면 자동적으로 차별화가 되겠지.”

-함께 호흡을 맞춘 최현욱은 어땠나. 강점은 무엇이라고 보나.
“잘했잖나. 진짜. 깜짝 놀랐다. 내가 저 나이에 저렇게 했나 싶을 정도였다. 정확히 알고 한 게 정말 중요하다. 내가 이 대사를 어떤 느낌으로 해야 하는지, 그걸 정확히 알고 하는 거다. 모르고 하는 친구들도 많다. 처음에 남으라고 하면서 ‘너 김세윤이 부럽지, 김세윤이 되고 싶고, 김세윤은 너한테 관심 없어’라고 하지 않나. 그러니까 이강이 ‘교수님도 아세요? 그런 마음?’이라고 찌른다. 그 대사는 김수훈과의 관계, 안은수와의 관계를 다 알고 나를 찌르는 거다. 그때 내가 당황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런 심리가 굉장히 미세하다. 그 의미를 알고 하는 것과 그냥 대사를 하는 건 완전히 다르다. 그만큼 고민을 많이 했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왔다는 거다. 얼마나 든든하고 예쁜가. 오래 갔으면 좋겠다. 이 친구가. 너무 예쁘고 잘했으니까 다른 작품에서도 지금처럼 성실하게 해서 배우로서 계속 성장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잘했다고 정신 500년 나가서 칠렐레팔렐레하지 말고.(웃음)”
-최현욱이 ‘최민식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 많은 후배 배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데, 어떤 마음으로 배우의 길을 걸어오고 있나.
“내가 좀 과대평가됐다. 스스로에게 냉정해지려고 많이 노력한다. 외부의 기준에 나를 맞추기 시작하면 허문오처럼 되는 것 같다. 그걸 따라갈 수도 없고. ‘명량’도 하고 ‘올드보이’도 하고,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금방이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만 그런 허세를 덜어내려고 많이 노력한다. 되게 이기적인 작업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과연 대중을 위한 일인가 생각해 보면, 그건 결과론적인 것 같다. 내가 출연한 영화를 많은 분들이 보고 행복을 느끼고,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건 감독도 있고 함께 작업한 모든 사람의 결정체다. 그런데 연기라는 것만 뚝 떼어놓고 보면 이건 나를 위한 일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내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하는 일이다. 사람을 알고 싶고, 도대체 인간이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다. 허구의 세계, 때로는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이유도 결국 그걸 알고 싶어서다. 그래서 나 잘 먹고 잘살자고 하는 일이다. 딱 까놓고 얘기해서. 내가 행복해지고자, 내 삶의 의미를 찾고자 그걸 열심히 할 뿐이다. 물론 잘했다고 상도 주고, 상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외부의 평가가 좋게 나오면 감사한 일이다. 다만 거기에 너무 연연하지 않으려고 한다. 많이 자유로워졌다.”
-여전히 식지 않는 비결은 무엇인가.
“작업할 때가 좋다. 제일 행복하다. 우리 집사람은 ‘나는 그럼?’이라고 해서 맨날 혼난다.(웃음)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없다. 학교 다닐 때 아르바이트를 한 것 말고는 사업도, 직장 생활도 해본 적이 없다. 이 일 말고는 다른 걸 해본 적이 없고 오직 이 일만 하며 살아왔다. 이제는 좋고 싫고를 떠난 문제다. 부부 관계에 비유하면 부부싸움은 많이 했지만 이혼은 안 한 것 같다. 갈등도 많았고, 왜 나는 이것밖에 이해하지 못할까 고민도 많이 했다. 그래도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한 일이니까. 행복하다. 앞으로도 더 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것도 더 많다. 주변에 이야기 좀 해달라.(웃음)”

-지금도 배우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 있다면.
“나를 가르쳐준 선배, 선생님이 있었다. 연극 공연이 끝나고 부모님, 친구들이 오잖나. 사진도 찍고. 그런데 분장을 안 지운 채 저녁을 먹는다거나 밖에 나갔다가 정말 많이 혼났다. 선생님은 ‘리어왕을 하든 햄릿을 하든, 주연이든 아니든 거울 앞에서 분장을 하는 순간 그 인물로 들어가는 거다,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거다, 그게 얼마나 경건한 일인지 아느냐’고 하셨다. 연습하다가 무대에서 떡볶이 먹고 어묵에 소주 마시다가도 혼났다. 세트도 우리가 세우고 조명도 다는데 불시에 오셔서 보신 거다. 무대 위에서 술 마시는 걸 보시고 정말 심하게 혼내셨다. 요즘은 그런 선생님이 없다.
그건 허세가 아니라 내 직업에 대한 철학이다. 남들이 인기 배우라고 인정해 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스스로 이 직업에 대한 자존감을 가지고 일하느냐다. 뭐 이렇게 까다롭게 구느냐고 할 수 있지만 그게 내 직업에 대한 자부심인 거다. 선생님은 항상 ‘무대는 우주’라고 하셨다. 또 다른 세상, 또 다른 우주를 표현하는 곳이고 무대는 곧 성전이라는 거다. 영화를 찍든 드라마를 찍든 연극을 하든 성심성의껏 준비하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것, 설령 기술적으로나 내면적으로 부족하고 대중과 충분히 소통하지 못했더라도 창작을 대하는 정성과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 스태프가 자신의 SNS에 제작진과 함께 짐을 옮기는 배우의 뒷모습을 공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작발표회에서도 프로듀서와 조감독을 직접 호명하며 박수를 부탁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평소 현장을 대하는 배우의 태도가 느껴졌는데.
“내가 그랬나? 그냥 즐거워서 한 일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렇게 고마운 일이 없다. 내가 60대 중반인데 지금까지도 이렇게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예전에도 느꼈지만 요즘 들어 더 절실하게 느끼는 건 현장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과 제작진을 보면 되게 감동적이라는 거다. 누가 등 떠밀려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다. 자기가 좋아서 나와 개고생을 하고 있는 거다. 그런 모습을 보면 즐겁다. 내가 이 친구들과 같이 하나의 작품을 위해 움직이고 있구나, 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게 느껴져서 좋다. 현장은 힘들다. 아무리 주 52시간이라고 해도 힘든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런데 힘들다고 인상을 쓰고 있다고 안 힘든 게 아니다. 가급적이면 힘든 건 힘든 거고, 같이 재밌게 작업하자는 거다. 내가 신나서 한 거지. 다른 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