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서 스마트글라스 금지 논의 확산…개인정보위도 촬영 알림 요구

전 세계 스마트글라스 출하량은 올해 1분기에만 약 225만 대를 기록해 전년 동기 대비 167% 늘었다. 시장조사기관 IDC는 올해 연간 출하량을 약 1360만 대, 2030년에는 2730만 대로 내다본다. 안경 형태의 촬영 기기가 대중 시장에 자리 잡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유럽에서는 이 기기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를 두고 규제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유럽 각국 개인정보 감독기관의 협의체인 유럽개인정보보호이사회(EDPB)는 스마트글라스의 사회적 수용성을 다룬 보고서를 준비하고 있으며, 발간 시점은 올여름으로 전해진다. 보고서는 기기가 초래할 수 있는 개인정보 위험과 유럽 차원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를 함께 검토한다. 다만 일부 회원국은 보고서를 기다리기보다 자체 대응을 서두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독일이 가장 앞서 있다. 함부르크 개인정보보호·정보자유 감독관 토마스 푹스(Thomas Fuchs)는 독일 공영방송 ARD 인터뷰에서 스마트글라스를 “위장 카메라”로 규정하고, 일상적인 물건에 숨겨진 촬영 장치를 금지하는 독일 법을 근거로 판매 금지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함부르크 감독기관은 자체 시험에서 메타(Meta) 제품의 촬영 알림 LED가 일반적인 주광 환경에서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약하다고 판단했으며, 기기가 수집한 데이터가 AI 학습에 쓰이는 방식도 들여다보고 있다. 메타의 유럽 본사가 있는 아일랜드 감독기관과도 대응 방향을 협의 중이어서, 논의가 개별 국가를 넘어설 여지가 있다. 독일 내 여론은 디지털 인권 단체 헤이트에이드(HateAid)가 공공 수영장에서 남성 이용객이 메타 글라스로 자신을 몰래 촬영했다는 여성들의 신고가 포츠담(Potsdam) 경찰에 접수된 사실을 공개하면서 급격히 악화됐다.
네덜란드에서는 디지털 시민권 단체 비츠오브프리덤(Bits of Freedom)이 스토커웨어와 스파이웨어에 준하는 수준의 규제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 단체는 네덜란드 공영방송 NOS에 “모두가 그런 안경을 쓰고 다닌다고 상상해보라. 거리에서 프라이버시를 완전히 잃게 된다”고 말했다. 프랑스 국가정보자유위원회(CNIL)는 지난 5월 스마트글라스가 “거의 보이지 않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형태의 감시를 만들어낼 “중대한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며, 이 기기를 단순한 소비자 제품으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을 냈다.
규제 움직임은 유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 뉴욕주 통합법원 시스템은 지난달 20일부터 카메라·마이크·녹화 기능이 있는 안경과 머리 착용 기기의 반입을 1240곳이 넘는 주·카운티·시·타운 법원에서 전면 금지했으며, 시력 교정용 제품도 예외로 두지 않았다. 하와이 연방법원과 노스캐롤라이나 포사이스 카운티, 필라델피아 제1사법구도 유사한 조치를 두고 있다. 미 공군은 복무 규정에서 사진·영상·AI 기능이 있는 스마트글라스의 제복 착용 시 사용을 금지하고 있고, 보안 콘퍼런스 데프콘(DEF CON) 34는 녹화 기능이 있는 메타 방식 안경의 반입을 예외 없이 막았다. 영국에서는 코믹콘 주최사 모노폴리 이벤츠(Monopoly Events)가 몰래 촬영 신고를 받은 뒤 카메라 안경 착용을 금지했다.
국내에서도 규제 기관이 움직였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지난달 말 삼성전자와 만나 연내 출시 예정인 AI 글라스의 개인정보 보호 방안을 논의했다. 핵심은 카메라나 마이크가 작동할 때 주변 사람이 이를 즉시 인식할 수 있도록 불빛이나 소리 등 촬영 알림 장치를 적용하는 방안이다. 개인정보위는 앞서 메타와도 같은 사안을 협의했으며, 하반기 중 AI 글라스와 자율주행 로봇에 적용할 개인정보 보호 원칙을 마련할 계획이다.
제조사들은 하드웨어 설계로 대응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카메라가 작동하면 외부 LED가 켜지고 안경을 실제 착용한 상태에서만 촬영이 가능하도록 설계했으며, LED를 고의로 가리거나 파손하면 카메라 기능이 즉시 중단되도록 했다. 메타 역시 촬영 시 전면 LED가 켜지고, LED가 가려지거나 훼손된 것으로 인식되면 카메라 작동을 차단한다. 다만 해외에서 촬영 알림 LED를 가리는 2달러짜리 스티커가 유통되면서 이런 장치의 실효성을 두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시험장은 또 다른 전선이다. 교육부는 이달 초 전국 시·도교육청에 AI 글라스를 시험장 반입 금지 물품에 포함하고 응시자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주의 깊게 살피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5월 전기산업기사·소방설비기사 시험에서 3명, 토익 정기시험에서 2명이 AI 글라스를 착용했다가 적발된 데 따른 조치다. 하반기 대학수학능력시험과 수시 논술전형을 앞두고도 상당수 대학은 별도 지침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육학과 명예교수는 “기술 발전으로 일반 안경과 구별이 어려운 시대가 된 만큼 결국 탐지기 도입이나 시험장 녹화 같은 새로운 대응책을 검토해야 한다”며 “앞으로 스마트 콘택트렌즈 등 더 작은 AI 기기까지 등장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기존 방식만으로는 부정행위를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각국 논의의 초점은 판매 금지 자체보다 ‘촬영 사실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라는 고지 기준에 모인다. IDC 기준 메타는 올해 1분기 세계 스마트글라스 시장의 69.2%를 점유해, 현재의 규제 논의는 사실상 한 사업자의 제품 설계를 향한 검증에 가깝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구글이 5월 구글 I/O 2026에서 안드로이드 XR 기반 AI 글라스 2종을 공개하고 연내 출시를 예고하면서, 알림 장치 기준은 특정 기업이 아니라 업계 전체가 맞춰야 할 공통 요건으로 옮겨가는 흐름이다.
XR 시장에서 스마트글라스는 이미 VR 헤드셋을 대신해 성장을 이끄는 축이 됐다. 이 국면에서 규제가 하드웨어 설계 요건으로 구체화된다면, 촬영 알림 방식은 부가 기능이 아니라 시장 진입을 좌우하는 조건이 된다. 유럽개인정보보호이사회 보고서와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하반기 원칙이 어떤 수준의 고지 기준을 제시하느냐에 따라, 국내외 제조사의 다음 세대 제품 설계도 함께 조정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