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자(들)] 1974년을 지나, 지금에 닿다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6발의 총성, 발견된 4개의 탄환 그리고 공식 기록에서 사라진 두 발의 행방. 1974년 8월 15일, 제29회 광복절 경축식. 전 국민이 지켜보는 생중계 현장에서 영부인이 저격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용의자가 체포되고, 사건은 국가적 비극으로 기록되며 서둘러 종결된다.
하지만 현장 경호를 담당했던 형사 철구(유해진 분),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보던 신문사 사회부 부장 재환(박해일 분), 그날의 혼란을 직접 목격한 신입 기자 영일(이민호 분)은 발표된 수사 결과와 실제 정황 사이에서 석연치 않은 의문을 발견한다. 모두가 목격했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던 그날, 세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진실을 좇기 시작한다.
영화 ‘암살자(들)’은 1974년 8월 15일 발생한 영부인 저격 사건의 의혹과 배후를 추적하는 작품이다. 제51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으로, ‘8월의 크리스마스’ ‘덕혜옹주’ ‘천문: 하늘에 묻는다’ 등을 선보인 허진호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유해진이 사건 현장에 있었던 중부서 경감 철구를, 박해일과 이민호가 각각 사건을 취재하는 신문사 사회부장 재환과 신입 기자 영일을 연기했다.
뜨겁지만 요란하지 않다. ‘암살자(들)’의 뜨거움은 거세게 폭발하기보다 담담하게 쌓이고 서서히 차오른다. 자칫 힘이 과하게 들어갈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도 허진호 감독은 특유의 담백하고 절제된 연출을 놓치지 않는다. 전작들과 비교하면 한층 뜨거워졌지만, 감정을 앞세워 관객을 몰아붙이는 대신 차분하게 사건과 인물을 좇으며 힘을 축적한다. 그래서 더 묵직하고, 그래서 더 뜨겁게 와닿는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을 끝까지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 상당하다. 영화는 그날의 미스터리를 하나씩 좇아가지만, 어느 하나를 정답이라 단정하지 않는다. 진실에 가까워질 듯 다시 멀어지는 과정에서 흩어진 단서와 엇갈리는 정황을 하나씩 맞춰가는 추리의 재미를 안기며, 답이 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궁금증과 집중을 끝까지 놓지 않게 한다.
그 중심에는 사건보다 사람이 있다. 철구와 재환, 영일은 같은 진실을 향하지만 출발점도, 그것을 좇는 이유와 방식도 다르다. 동료가 억울하게 끌려가는 것을 목격한 철구는 형사로서 현장에 남은 흔적을 좇고, 베테랑 기자 재환은 공식 발표에서 발견한 모순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현장에서 사건을 직접 목격한 신입 기자 영일 역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의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직접 움직인다. 서로 다른 위치에 선 세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하나의 사건은 여러 얼굴을 드러내고, 이야기도 한층 입체적으로 뻗어나간다.
인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만의 색깔을 잃지 않는 점도 좋다. 단순히 설정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가 차곡차곡 쌓아온 인물들의 신념을 결정적인 순간의 행동으로 증명한다. 특히 영일이 흥미롭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여유와 능글맞은 면모를 지녔지만 기자라는 일에는 누구보다 진심이다. 자신의 배경을 취재에 활용하는 능청스러운 모습은 뜻밖의 웃음을 만들어내다가도,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몸을 사리지 않는 선택을 통해 그동안 쌓아온 진심에 힘을 싣는다. 재환과 철구 역시 마찬가지다. 각자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움직이는지 행동으로 보여주기에 이들의 선택이 더욱 깊게 와닿는다.
영부인 저격 사건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당시의 시대상으로 뻗어나가는 과정도 흥미롭다. 김대중 납치 사건을 비롯해 1970년대를 관통한 굵직한 사건들이 이야기 곳곳에 녹아들고, 인물들의 취재가 이어질수록 그날의 총성이 놓여 있던 시대의 풍경도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역사를 알고 있다면 실제 사건과 영화적 상상력이 맞물리는 지점을 따라가는 재미가 있고, 잘 알지 못해도 진입장벽은 높지 않다. 영화 자체만으로 충분히 이야기에 빠져들게 한다.

침묵이 강요된 시대에도 끝까지 묻고 기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때때로 지금의 풍경과 겹쳐진다. 어렵게 지켜낸 민주주의가 다시 흔들리는 시간을 지나온 지금이기에, 진실을 기록하기 위해 움직이는 이들의 모습은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특히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이르면 영화가 차곡차곡 눌러온 뜨거움이 비로소 차오른다. 우리가 어떤 시간을 지나 지금에 도착했는지, 그렇게 어렵게 지켜온 가치 앞에서 왜 다시 위태로운 순간을 마주해야 했는지 되묻게 한다.
완급조절도 탁월하다. 시대의 비극과 권력의 폭압을 다루면서도 시종일관 심각한 얼굴만 고집하지 않는다. 개성이 뚜렷한 인물들이 부딪히고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웃음이 터지고, 자칫 무겁게 가라앉을 수 있는 이야기에 리듬을 더한다. 그렇다고 웃음이 사건의 무게를 희석하지도 않는다. 진지함과 유머 사이의 균형을 놓치지 않으면서 극을 힘 있게 끌고 간다.
배우들은 호연을 펼친다. 유해진은 우직하게 사건을 파고드는 철구에 특유의 인간미를 더한다. 힘을 과하게 주지 않으면서도 묵직하게 중심을 잡고, 극이 뜨거워질수록 존재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박해일은 냉철하고 집요한 베테랑 기자 재환에 꼭 맞는 얼굴을 보여준다. 절제된 연기로 인물의 신념을 설득력 있게 쌓으며 재환을 더욱 단단하게 빚어낸다. 이민호의 활약도 반갑다. 여유롭고 능글맞은 영일의 매력을 자연스럽게 살리면서도 기자로서의 진심까지 놓치지 않는다. 가벼움과 진지함을 능숙하게 오가며 캐릭터의 입체적인 면모를 제대로 살려낸다.
다만 지나치게 많은 특별출연은 ‘옥의 티’다. 반가운 얼굴부터 반갑지 않은 얼굴까지 쉴 새 없이 등장하는데, 그 수가 과해 몰입을 방해한다. 특히 일부 출연자의 등장은 작품 자체보다 그를 둘러싼 논란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아쉬운 선택이다. 러닝타임 131분, 오는 23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