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여정] 담담히 흐르는 시간, 오래 남겨지는 마음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춘희(김혜옥 분)는 오랜 추억이 깃든 집을 정리하고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한다. 남편이 남긴 자동차와 그랜드 피아노도 함께다. 하지만 거대한 피아노를 집 안에 들이지 못해 난감해하던 그때, 같은 아파트에 사는 민준(저스틴 민 분)이 선뜻 자신의 집에 두라고 제안한다.
독일에서 온 지휘자 민준은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찾기 위해 한국에 머물고 있다. 피아노를 닦기 위해 매일 민준의 집을 오가던 춘희는 조금씩 그와 가까워지고, 민준이 우연히 재능을 발견한 성찬(박대호 분)까지 함께하며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일상을 나눈다. 그렇게 봄날 시작된 인연은 계절과 함께 무르익고, 춘희가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마지막 여행의 시간도 가까워진다.
영화 ‘흐르는 여정’(감독 김진유)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자신만의 여행을 준비하던 춘희가 예상치 못한 인연들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영화 ‘나는보리’로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을 보여준 김진유 감독의 두 번째 장편으로,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감독조합 플러스엠상과 KBS독립영화상을 수상했다.
담담하면서도 따뜻하고, 조용하면서도 깊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뒤 마지막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춘희부터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찾아 한국에 온 민준, 홀로 살아가는 성찬까지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 아픔과 결핍을 안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슬픔을 강조하는 대신,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가까워지는 과정을 담백하게 비춘다.

나이도, 살아온 환경도, 각자 품고 있는 결핍도 다르지만, 서로에게 무언가를 바라거나 애써 채워주려고 하지 않는다. 춘희는 남편이 남긴 피아노를 내어주고, 민준은 성찬의 재능을 알아보고 이끌어준다. 성찬은 그 피아노 앞에 앉아 자신의 음악을 들려준다. 그렇게 자신이 가진 것을 자연스럽게 나누면서 세 사람은 어느새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돼간다. 선한 사람들이 조건 없이 마음을 나누고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만으로 기분 좋은 온기를 전한다.
이별을 그리는 방식도 그렇다. 춘희의 선택을 과하게 설명하거나 슬픔을 극대화하지 않는다. 그저 춘희의 선택을 존중하고, 남겨진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춘희는 떠나지만 함께한 시간은 민준과 성찬에게 남는다. 감정을 억지로 끌어올리지 않아도 곱씹고 또 곱씹게 하는 힘이 이 영화에 있다.
강릉과 양양을 담은 풍경과 클래식 음악도 영화의 따뜻하고 잔잔한 정서를 완성한다. 드뷔시와 브람스·리스트·라흐마니노프 등의 음악이 적재적소에 흐르며 인물들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잇고,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도 세 사람이 함께 보내는 시간에 편안하게 녹아든다.
배우들의 호연도 힘을 보탠다. 김혜옥은 상실과 외로움을 품고 있으면서도 삶을 향한 애정과 다정함을 잃지 않은 춘희를 섬세하고 노련하게 그려내며 깊은 내공을 보여준다. 저스틴 민도 좋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한국에 온 민준의 외로움과 사람들에게 거리낌없이 다가가는, 밝고 사랑스러운 면모를 오가며 캐릭터의 매력을 살린다.
실제 피아니스트로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 연기에 도전한 성찬 역의 박대호는 다소 투박하고 서툰 순간도 있지만, 오히려 그 점이 성찬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연기한다’는 느낌보다 실제 성찬이라는 인물을 보는 듯 자연스럽고,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는 더 빛나는 존재감을 보여준다.
김진유 감독은 “인생은 흐르고 있으니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타인을 사랑했으면 좋겠다”며 “이 영화는 춘희의 여정이기도 하지만 민준, 나경, 성찬의 여정이기도 하다. 세대를 아우르는 이야기로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러닝타임 125분, 오늘(28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