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을 거치며 삶과 죽음을 고뇌했다는 소프라노 박혜상의 목소리는 한층 깊어졌다.
최근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한 새 앨범 ‘숨'(Breathe)을 기념해 지난 13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박혜상의 리사이틀은 죽음을 마주한 슬픔과 이를 초탈한 듯한 평온한 목소리로 채워졌다.
공연의 시작을 알린 하워드의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은 무대가 암전된 상태에서 차분하게 연주됐다. 박혜상은 어둠 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합창석 쪽에 걸린 대형 스크린에는 물속에서 부유하는 박혜상의 모습이 담긴 뮤직비디오가 상영돼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새 앨범의 첫 곡이기도 한 이 노래는 박혜상이 직접 작곡가 하워드에게 의뢰한 것이다. 하워드의 곡 ‘시편’에 세이킬로스의 비문을 넣어 편곡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악보로 알려진 세이킬로스의 비문은 ‘살아 있는 동안은 빛나라/ 결코 슬퍼하지 말라/인생은 찰나와도 같으며, 시간은 마지막을 청할 테니’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교회음악에 뿌리를 둔 명상적인 음악은 어둠 속에서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박혜상의 맑은 목소리는 곡에 성스러운 느낌을 더했다. 4분 남짓의 짧은 곡이지만, 순간적으로 올라간 고음은 객석 꼭대기까지 명료하게 전달되며 ‘삶’의 찬란함을 전했다.
박혜상이 선곡한 노래들은 오페라의 정열적인 사랑 이야기보다 첫 곡처럼 차분히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품들이 많았다.
레피체의 오페라 ‘체칠리아’ 중 ‘고마워요, 자매님들’은 체칠리아가 숨을 거두며 내뱉는 마지막 고백 장면의 노래다. 박혜상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장엄함을 담담하게 표현했다. 또 베르디의 오페라 ‘오텔로’ 중 ‘아베마리아’는 죽음을 예감한 여주인공 데스데모나가 성모상에 바치는 노래로 서정적인 선율 속 박혜상의 평온한 호흡이 돋보였다.
박혜상은 2부 중반 한국 작품인 우효원의 ‘어이가리’, ‘가시리’, ‘새야새야’를 불러 ‘한'(恨)을 풀어냈다.
한국 전통 악기인 아쟁 연주에 맞춰 고음으로 독창한 ‘어이가리’와 처연함이 짙게 밴 목소리로 감정을 가득 실어 불러낸 ‘가시리’에 객석에서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새야새야’는 특별 무대로 소리꾼 고영열과 함께 하모니를 맞췄다. 박혜상의 맑고 고운 목소리와 고영열의 숨을 참다 터져 나오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대조를 이루며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관객들은 소프라노의 고음이 높이 올라갈수록 희열을 느끼기 마련이지만, 이날 박혜상은 소프라노 특유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내는 저음과 중음의 아름다운 매력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과 삶의 충만함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박혜상의 목소리에 묻어나면서 깊은 울림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