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독일 이방인의 눈에도 놀라울 정도로 화려한 건물이 조선 한복판, 그것도 덕수궁 깊숙한 곳에 있었다. 1905년 대한제국 황실의 외교 전례를 담당했던 엠마 크뢰벨은 자신의 회고록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자랑스러운 건물은 완전히 유럽식으로 지어졌다. 실내장식은 놀랄 만한 품위와 우아함을 뽐내는데, 파리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접견실은 황제의 색인 황금색으로 장식됐다. 황금색 비단 커튼과 황금색 벽지, 이에 어울리는 가구와 예술품들, 이 모든 가구는 황제의 문장인 오얏꽃으로 장식됐다. 붉은색으로 장식한 두 번째 방 또한 화려함에서 전혀 뒤지지 않았다.”
6년의 재건 공사를 마치고 지난해 말 모습을 드러낸 돈덕전 이야기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고종은 조선이 서구와 대등한 지위에 있다는 걸 보이고 싶었다. 이에 궁궐 내 여러 서양식 전각을 신축했는데, 돈덕전은 당대 대표 서양식 건물로 손꼽히는 석조전보다 6년이나 앞섰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적극적 외교를 통해 활로를 찾으려 했던 고종은 외빈과의 교류를 위해 격식 있는 건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덕 있는 자를 도타우다’라는 뜻의 ‘돈덕’은 “멀리 있는 자를 회유하고 가까이 있는 자를 길들이며, 덕이 있는 자를 후대하고 어진 자를 믿으며 간사한 자를 막으면 만이(蠻夷)도 거느리고 와서 복종할 것이다”라는 〈서경(書經)〉 구절에서 유래한다. 돈덕전이 첫선을 보인 때는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칭경 예식. 서구 열강 외신을 초대한 연회를 시작으로 건물은 다양하게 활용됐다.
대한제국의 주요 행사 시 각종 연회가 열렸고, 사신이 왕을 접견하는 장소이자 국빈급 외국인 숙소로 쓰였다. 몇 안 되는 과거 사진에서 유럽풍 가구와 침구, 커튼 등으로 장식된 침실을 확인할 수 있다. 외교 목적 외에도 고종과 순종의 생일 잔치, 야간 공연과 영화 관람 등의 이벤트가 열렸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고, 건물의 명운은 주인과 궤를 같이하며 조금씩 스러져갔다. 정점은 고종의 강제 폐위와 순종의 즉위식이었다.
“아! 짐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황태자로 있으면서 부모의 잠자리와 수라상을 살피는 일상적인 일도 언제나 미처 하지 못하였는데, 나라의 큰 정사를 대리하라는 명령이 천만 뜻밖에 갑자기 내려졌으므로 더없이 송구하여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중략) 황제가 되는 것이 즐거움은 없고 단지 두려운 생각만 들게 된다.” 순종은 돈덕전에서 즉위식을 앞두고 자책과 무력에 휩싸여 있었다. 한편 고종이 승하하기 전 마지막 생일날 돈덕전에서 순종과 아침 식사를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후 건물은 방치됐다가 일제의 덕수궁 공원화 계획의 일환으로 1920년대에 헐렸다.
비워진 땅은 아동 유원지로, 덕수궁관리소 터로 쓰임을 달리했다. 100여 년이 지나 다시 그 땅에 들어선 돈덕전의 외관은 예전과 무척 흡사하다. 벽돌 쌓기 방식은 물론 개수까지 구현해 완성한 외벽과 아치, 함석지붕과 터릿(탑), 발코니 난간에 새겨진 오얏꽃까지. 규모(건축면적)도 이전과 동일하게 맞췄다. 시굴 과정에서 출토된 벽돌과 타일, 몰딩 등을 참고해 세부 요소까지 최대한 본래와 가깝게 복원했다. 다만 실내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내부는 현대에 맞게 재설계했다. 전시실과 사무공간 등은 활용도 면에서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공적인 동시에 사사로웠던 당대의 사용 흔적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돈덕전 관련 사료 중엔 2층 발코니를 담은 사진이 있는데, 그곳엔 고종·순종·영친왕이 나란히 서 있다. 그들의 시선 어딘가에 들어왔을 회화나무는 지금도 돈덕전 앞에 있다. 원래와 같은 듯 같지 않은 이곳에서 잠시 그 발코니에 올라서보는 건 꽤 해볼 만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