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 칼럼] 총선 참패 한달 …아직도 갈 길 헤매는 국민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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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선 시사평론가
[유창선 시사평론가]

“소금이 맛을 잃으면 쓸데가 없어 땅에 버려지는 만큼, 국민의힘은 보수정당으로서 정체성을 확고히 하겠다.”  황우여 국민의힘 신임 비상대책위원장이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꺼낸 일성이다. 그러면서 “보수 가치를 약화·훼손해 사이비 보수로 변질돼서는 안 된다. 이러한 유혹은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국민을 혼란케 하고 분열시킬 뿐”이라고 했다. 22대 총선에서 역대급 참패를 당한 국민의힘이기에 황 위원장의 이 같은 말은 생뚱맞게 들렸다. 당연히 국민의힘이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음을 고개 숙여 성찰하고 변화와 혁신을 통해 다시 태어나겠다고 해야 할 마당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보수정당의 정체성’을 말하고 나선 모습은 지금 뭐가 뭔지 분간을 하지 못하고 있는 국민의힘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듯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4·10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참패를 당했던 것이 보수정당의 정체성이 모자라 보수층이 지지를 하지 않아서였던가. 만약 황 위원장이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면 진단이 틀렸으니 앞으로 나올 처방도 잘못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민의힘이 참패를 당한 것은 2년 전 대선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게 표를 주었던 중도층이 대거 등을 돌렸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였다. 보수층도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그동안 저마다 이런 저런 불만들을 토로하기는 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이 대승을 거둘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으로 막판에 결집하는 양상을 보였다. 문제는 중도층의 표심을 잃게 만든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의 잘못된 방향에 있었다. 만약 윤 대통령이 2년 전 대선 승리를 가능하게 했던 보수-중도 선거연합을 보존하며 국정을 운영했다면 지금과 같이 벼랑 끝에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이해하기 어려운 고집스러운 길을 택했다. 대선에서 불과 0.73%p 차이로 이재명 민주당 후보에게 이겼을 뿐이고 국회에서 여소야대 환경에 처한 소수파 정권이었다. 당연히 야당과 중도층에게 손을 내밀고 껴안는 협치와 포용의 정치를 해야 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무슨 배짱인지 야당은 고사하고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는 여권 정치인들까지 모두 변방으로 내치는 길로 갔다. 당연히 정권의 기반은 갈수록 좁아졌고, 그런 협량의 정치를 지켜본 국민들은 윤 대통령에 대한 실망이 깊어져 결국 정권심판의 선택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도 총선 참패 후 새로 취임한 비대위원장의 입에서 ‘보수정당의 정체성’ 얘기부터 나오는 광경은 지금 국민의힘이 길을 잃었다는 판단을 하게 만든다. 당내 비윤계인 윤상현 의원이 황 위원장의 발언을 향해 “마치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이후 인요한 혁신위원장이 일성으로 통합을 얘기한 것과 같다. 인 위원장도 혁신할 때라고 얘기했어야 했고 황우여 비대위원장도 지금은 혁신과 변화의 시간이라고 말했어야 한다”고 지적한 것은 충분히 일리 있다. 국민의힘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모습은 원내대표 선출을 앞두고도 나타난다. 9일 치러지는 국민의힘 새 원내대표 선출은 ‘친윤’ 3인방의 경선으로 치러지게 됐다. 당초 ‘찐윤(진짜 친윤석열)’으로 불리는 3선의 이철규 의원의 출마가 유력했지만, 총선 패배의 책임이 있는 ‘찐윤’ 원내대표의 등장은 민심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비판에 따라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에 대한 심판이 있은 직후에 다시 ‘찐윤’ 원내대표 가능성이 거론되던 국민의힘의 모습은 상식과 너무도 괴리되어 있다. 이철규 의원은 나서지 않았어도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한 인물들은 3선의 송석준, 4선의 이종배, 3선의 추경호 의원 등 모두가 ‘친윤’으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물론 ‘비윤’ 가운데서 전체 의원들을 이끌고갈 리더십을 가진 인물을 찾기 어려운 국민의힘 내부 사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선거에서 민심은 윤 대통령을 심판했는데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친윤’ 원내대표를 선출하는 국민의힘의 모습은 다시 한번 국민들의 고개를 가로젓게 만들 것이다. 국민의힘에서는 차기 당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의 선거 룰을 둘러싸고도 계파간 신경전이 뜨거워지고 있다. 영남권을 중심으로 한 친윤계는 현행 당원투표 100% 룰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비윤계는 국민 여론을 최소 50% 이상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입장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현재 국민의힘 당원 분포를 보면 당원투표의 비율이 많이 반영될수록 친윤계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지난 전당대회에서 안철수 의원, 나경원 전 의원, 유승민 전 의원 등 비윤계가 당권 도전을 포기하거나 좌초하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이 ‘당원투표 100%’ 룰이었다. 이 룰을 갖고는 민심의 지지를 받는 당 대표가 아니라 ‘윤심’의 지지를 받는 당 대표가 다시 들어설 수밖에 없다. 이는 총선 민심에 역행하는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다. 

총선 참패의 책임을 자성하며 뒤로 물러설 생각을 해야 할 친윤계가 여전히 당권 장악에 집착하는 모습 자체가 민심을 불편하게 한다. 국민의힘이 총선 참패에도 불구하고 혁신을 통한 재탄생의 기치조차 들지 못하고 이렇게 엉뚱한 모습을 보이는 데는 당의 구조적 한계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힘 지역구 당선자 90명 가운데 영남권 당선자가 65.6%(59명)에 이른다. 이는 전체 국회의원 의석 수에서 영남권 의석이 차지하는 비중인 25.5%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숫자이다. 국민의힘에서 영남권 당선자의 비중은 4년 전 총선 때의 61.5%보다도 더 높아진 것이다. 수도권에서는 참패한 국민의힘이기에 앞으로 ‘영남당’ ‘영남 자민련’ 소리를 들을 판이다. 영남권 당선자들은 지역적 특성에 따라 강경한 이념 보수의 사고를 많이 공유한다. 이들에게는 황우여 위원장의 ‘보수정당의 정체성’ 발언이 조금도 낯설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영남권 당선자들은 친윤계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국민의힘의 변화와 쇄신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총선이 끝나고 한달이 지났지만 국민의힘은 길을 잃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보수의 길을 가려했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도 지금은 물러나 있는 상태이다. 당의 변화를 추구하는 3040세대 정치인 모임인 ‘첫목회’가 만들어졌지만 원외 당협위원장들의 모임인지라 아직 힘이 미약하다. 총선에서 역대급 참패를 당하고도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집권여당의 모습은 우리 정치를 위해서도 불행한 광경이다. 이런 여당을 제 길로 이끌어갈 보수정당 내부의 리더십은 어떻게 생겨날 수 있을까. 국민의힘의 차기 전당대회가 중요한 이유이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사이버대학교 NGO학과 외래교수 ▷전 한림대 사회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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