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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지 않는 시대의 성장법: 결핍을 설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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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APEC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음에도 한국경제가 중대 위기를 겪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사진=뉴시스]
2025 APEC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음에도 한국경제가 중대 위기를 겪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사진=뉴시스]

대한민국 경제는 지난 반세기 동안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전쟁의 폐허에서 50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도약했다. 반도체·자동차·문화콘텐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췄고, APEC 2025 유치에 성공하며 외교적 모멘텀도 확보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지금이 대한민국의 정점이고,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는 비관적 전망이 고개를 들고 있다. 예견됐거나 이미 진행 중인 인구 감소, 핵심 인재 유출, 서비스 생산성 격차, 교육 투자 위축 등 여러 지표가 이런 인식을 뒷받침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성장 공식은 어디에 있을까. 성장은 과연 외연 확장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을까.

전통적 성장 전략: 앤소프 매트릭스

전통적인 전략 관점에서 대부분의 기업은 더 많은 자원, 더 많은 제품, 더 넓은 시장을 통해 성장을 설계해 왔다. 기업의 성장 전략을 말할 때 가장 널리 활용되는 프레임워크가 바로 이고르 앤소프가 1950년대에 제시한 성장 매트릭스다. 그에 따르면 성장 전략은 크게 네 가지다.

첫 번째는 기존 시장에서 기존 제품의 점유율을 높이는 ‘시장 침투’, 두 번째는 기존 고객에게 새로운 가치를 더하는 ‘제품 개발’, 세 번째는 기존 제품으로 새로운 지역·세그먼트에 진출하는 ‘시장 개발’, 마지막은 전혀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는 ‘다각화’다.

앤소프 매트릭스.[사진=셔터스톡]
앤소프 매트릭스.[사진=셔터스톡]

많은 글로벌 기업이 이런 확장형 성장 프레임워크를 토대로 규모를 키웠다. 현대기아차는 내연기관에서 하이브리드·전기차·수소전기차로 포트폴리오를 전환하며 전동화를 가속했고, 지구를 넘어 달 탐사 전용 로버 개발에도 나섰다. 또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인수해 로보틱스 역량을 강화하며 기계공학 기반 혁신의 새로운 성장축을 모색하는 동시에, 피지컬 AI로 센서와 제어를 통합해 모빌리티·로봇·제조를 하나의 지능형 시스템으로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외연 확장은 항상 가능한 전략이 아니다. 언젠가는 확장을 통한 성장 전략이 막히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자본이 얇아지고, 인건비가 오르고, 기술 격차가 벌어지고, 제도·지정학적 마찰이 커지는 시점이 온다. 이때부터는 다른 전략 프레임이 필요하다. 이때 유효한 관점이 바로 ‘결핍(deficiency)’을 전략으로 설계하는 시각이다.

경영학에서는 ‘결핍’이 혁신과 성장의 촉매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자원 기반 이론(Resource-Based View, RBV)에서는 기업의 경쟁우위가 내부 자원과 역량에 달려 있다고 본다. 특히 내부 자원이 가치·희소성·모방 불가능성·대체 불가능성을 갖출수록 우위가 공고해진다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결핍’은 재무·인력·기술·조직·네트워크 등 핵심 자원의 부족을 의미하며, 기업의 전략적 선택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물론 제약은 혁신을 자극하지만, 과도한 결핍은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결핍의 유형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재무적 결핍은 자금과 투자 여력이 부족한 상태다. 둘째, 인적 자원 결핍은 핵심 인재와 숙련된 인력이 모자라는 상황이다. 셋째, 기술·지식 결핍은 핵심 기술, R&D 역량, 조직 내 축적된 지식이 부족한 경우다. 넷째, 조직 역량 결핍은 혁신 역량이나 관리 시스템 등 기업 운영 전반의 능력이 미흡한 상태다.

마지막으로 네트워크·사회적 자본 결핍은 고객·파트너 네트워크, 평판, 브랜드 가치 등이 취약한 상태를 의미한다. 특히 한국 기업은 인적 자원과 기술·지식 결핍을 풀어내지 못하면 미래에 더 높은 단계의 성장으로 이어가기 어렵다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기업은 당면한 ‘결핍’을 단순한 제약이 아니라 전략적 변수로 재정의하고, 적정 수준으로 관리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결핍을 겪는 조직일수록 자원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창의적인 해법을 내놓는다. 결핍은 실제로 조직이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고유 역량을 축적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동력이 된다.

또한 부족한 부분을 외부 파트너와의 협력(파트너십·라이선스·공동 개발)으로 보완하게 해 외부 협력의 가치를 확대시킨다. 결핍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핵심은 하나다. 결핍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기업의 성패를 가른다.

‘결핍’이 만드는 전환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기업들은 결핍을 피하지 않고 성장을 위한 지렛대로 활용해 왔다. 자본 제약은 투자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계획적으로 자본을 키우는 훈련이 됐다. 부족한 인적 자원은 역할 단순화와 산업 자동화로 이어져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

기술·노하우 공백은 외부 지식을 적극 흡수하고 국산화를 통해 내부에 체화하는 이중 경로로 메웠다. 조직의 미성숙은 구조와 의사결정을 재설계해 민첩성과 회복탄력성을 높였다. 약한 대외 네트워크와 신뢰는 고객 경험의 디테일과 현지화로 보완했다. 결핍은 성장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장의 경로를 바꾸게 했다.

자본이 얇다면 낭비를 줄이고 핵심에 집중해 더 적은 투입으로 더 큰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가령 넷플릭스는 시장이 급격히 온라인 스트리밍 시대로 전환되면서 라이선스 콘텐츠 비용이 급증했고, 재무적 결핍에 직면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1년 첫 가격 인상을 추진했다가 시장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약 80만 명의 구독자가 이탈했다. 주가도 77% 하락해 지금까지 넷플릭스 사상 최악의 경영 의사결정으로 꼽힌다. 이후 넷플릭스는 2013년 자체 제작 오리지널 콘텐츠 전략으로 전환하며 기존 비즈니스 모델을 스스로 잠식했다. 단기적으로 손실을 감수했지만, 장기적으로는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리더가 됐다.

핵심 인력이 귀하다면 제품과 조직을 단순화해 소수 정예가 깊게 파고들 수 있게 해야 한다. 왓츠앱(WhatsApp)은 작은 팀으로 불필요한 기능을 덜어내고 자동화를 극대화해 적은 인원(50명 내외)으로도 대규모 트래픽을 감당했다. 텔레그램(Telegram)은 지금도 약 30명 규모의 팀이 전문성을 바탕으로 문제 해결에 집중해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고 있다. 인적 자원 결핍은 효율과 집중을 강제하고, 그 압력이 제품의 단순함과 운영의 탁월함으로 이어진다.

조직이 민첩하지 못하다면 먼저 진단이 필요하다. 의사결정이 지연되고 부서 간 사일로가 두텁다면, 위계를 낮추고 권한을 현장에 위임해 의사결정 속도를 되찾아야 한다.

레고(LEGO)는 2000년대 초 혁신을 과도하게 좇다가 조직 복잡성이 커지고 의사결정이 느려지며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 레고는 조직을 간소화하고 프로세스를 재설계했으며, 고객 중심 문화를 강화하며 전략적 초점을 옮겼다. 동시에 7000여 개에 달하던 제품 포트폴리오를 축소하고 비핵심 사업을 정리했다. 그 결과, 글로벌 톱 브랜드 위상을 되찾았다.

[사진=셔터스톡]
[사진=셔터스톡]

다만 내부 단순화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한국의 경우 국내 인재 풀 자체가 얇아지는 상황이라 외부 인재에 대한 개방이 필수다. 이민자로 유입되는 인재는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으며 검증된 회복탄력성과 다양한 관점을 지니게 되고, 이는 조직의 혁신성과 실행력을 높일 수 있다.

기술과 지식 결핍을 메우는 해법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외부와 연결해 빠르게 배우는 길, 다른 하나는 핵심을 안으로 끌어와 내재화하는 길이다. 관건은 둘 중 하나만 택하기보다 흡수 역량을 중심에 두고 상황에 따라 비중을 조절하는 것이다.

P&G는 방대한 제품 포트폴리오로 유명하다. 하지만 내부 R&D만으로는 신제품 출시 속도를 높이기 어렵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Connect & Develop’ 전략을 통해 전 세계 스타트업·연구소·발명가와 직접 연결했다. 그 결과 개방형 혁신이 전체 제품 혁신의 35% 이상과 수십억 달러 매출을 만들어내는 엔진으로 자리 잡았다.

반대로 애플(Apple)은 반도체 칩 의존이 자사 제품 성능과 효율의 제약으로 돌아오자, 2010년부터 자체 설계를 본격화했다. ARM 라이선스를 활용하되 설계는 100% 내재화해 장기적으로 기술 독립성과 성능 우위를 확보했다.

요약하면, 부족할수록 바깥에서 빨리 배우되 기술·지식의 핵심은 안으로 깊게 심어야 한다. 외부 연결과 내부 내재화를 병행할 때 비로소 결핍은 약점이 아니라 성장의 촉매가 된다.

네트워크와 사회적 신뢰가 약하면 고유한 포지셔닝과 생태계 전략으로 다수를 끌어들여야 한다. 에어비앤비(Airbnb)는 비즈니스 초기에 ‘낯선 사람’에 대한 불신을 직접 촬영한 숙소 사진, 리뷰·신원 확인·보증 같은 신뢰 장치로 해소해 미성숙했던 네트워크에 대한 신뢰도를 높였다.

TSMC는 자체 제품이 없다는 결핍을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 중립적 파운드리’라는 정체성으로 전환해 고객 성공을 자사 성장과 연결했다. 신뢰가 부족할수록 제3자 중립성과 투명한 규칙을 앞세워 많은 참여자가 안심하고 모일 수 있는 장(場)을 먼저 설계해야 한다.

이 원리는 기업을 넘어 국가 경쟁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외부로 시야를 닫는 순간 학습과 네트워크 축적이 둔화되고, 시간이 갈수록 세계와의 격차가 벌어진다. 2000년대 이후 일본의 해외 유학 감소가 경쟁력 저하의 단서로 자주 언급되는 이유다.

해법은 아웃바운드와 인바운드를 동시에 열어 글로컬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밖으로는 시장을 배우고, 안으로는 글로벌 인재·자본·아이디어를 끌어들여 순환형 학습 루프를 시스템화해야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과 한국 기업은 인적 자원 결핍과 기술·지식 결핍을 해결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 성장으로 이어지기 어려운 국면에 서 있다. 리더십은 결핍을 위험으로만 보지 말고 성장 동력으로 전환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결핍을 인정하고 이를 혁신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핵심 원칙은 네 가지다. 첫째, 결핍은 조직에 선택을 강제해 우선순위를 명확히 한다. 둘째, 제약은 창의성을 자극한다. 셋째, 외부 협력은 결핍을 보완해 확장성을 높인다. 넷째, 장기적인 관점만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보장한다.

구체적인 과제를 풀어 쓰면 이렇다. 먼저 각 조직이 겪는 결핍을 막연한 감각으로 두지 말고 지표로 수치화해야 한다. 인력·기술·자본·네트워크 같은 역량의 축별로 현 수준을 진단해 “어디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대시보드로 주기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다음으로는 선언에 그치지 않고 핵심 가치를 기준으로 자원과 시간을 재배치한다. 무엇을 하지 않을지, 어디까지 줄일지도 함께 정해줘야 핵심가치로의 집중이 힘을 갖는다.

동시에 외부 연결로 내부를 키우는 체계가 필요하다. 파트너십·라이선스·공동 개발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밖에서 필요한 지식을 배우고, 들여온 역량을 안에서 다시 흡수해 재구성하는 선순환을 만들어야 한다. 조직 운영 측면에서는 민첩성을 우연이 아니라 시스템화 하는 것이 과제다. 의사결정 구조, 피드백 주기, 실험 방식에 민첩성을 내장해 환경 변화에 빠르게 반응하는 체질로 바꿔야 한다.

마지막으로 고객과 임직원이 겪는 경험을, 단순 편의 수준을 넘어서는 ‘의미 있는 경험’으로 설계해 브랜드와 조직 정체성을 강화해야 한다. 성장 방향을 잡을 때는 모든 영역을 무작정 키우기보다, 경쟁우위를 만들 수 있는 핵심 영역만 과감하게 대형화하는 ‘Bigger but Vital’ 원칙을 택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작게 가져갈 것과 크게 가져갈 것을 분명히 나누는 선택이 필요하다는 거다.

미래 시장에서도 자사의 결핍은 전략적 방향을 바꾸는 핵심 변수이자 전략 계획 수립(Strategic Plan)의 출발점이다. 한국 기업은 표면적인 글로벌 진출은 이뤘지만, 진정한 글로벌 확장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때로는 비워내고 좁히는 전환이 조직을 더 멀리 데려간다. “무엇을 더할까”가 아니라 “무엇을 과감히 비울까”를 선택해야 한다. 이 선택이 향후 10년의 경쟁우위를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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