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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 못 읽는 AI가 이사회에서 표를 던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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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셔터스톡]
[사진=셔터스톡]

지난 1월 초, 미국의 한 대형 금융기관이 외부 의결권 자문사에 의존하던 관행을 깨고 자체 AI 시스템을 통해 주주권을 행사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기업 지배구조(Governance)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 기업 이사회 관점에서 이 변화는 더 근본적이다. 이제 사람만이 아니라 기계에 의해 해석되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사회는 그 의미를 아직 제대로 계산해보지 못했다.

의결권 자문사는 애초부터 권력자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규모와 조정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다. 기관투자가들이 수천 개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게 되면서, 의결권 행사는 이사 선임, 임원 보수, 인수합병, 각종 주주제안까지 광범위하게 확장됐다. 그 방대한 세계에서 책임 있게 투표하려면 시간, 전문성, 인프라가 필요한데, 많은 투자사가 이를 자체적으로 갖추기 어려웠다.

자문사는 그 공백을 메웠다. 공시 자료를 모으고, 데이터를 정리하고, 분석을 붙이고, 투표 권고안을 제시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수 업체가 시장을 사실상 장악했다. 그 영향력은 “따라야 해서”가 아니라 “따르는 게 효율적이고, 방어 가능하며, 감사(audit)에도 유리했기 때문에” 커졌다.

무엇보다 자문사는 주주들의 ‘조정 문제’를 해결했다. 주주들이 흩어져 있는 구조에선 기업 권력이 도전받지 않고 고착되기 쉽다고 본 로버트 몽크스(Robert Monks) 같은 주주행동주의자들의 문제의식이 그 뿌리에 있다. 목적은 투표를 자동화하는 게 아니라, 주주들이 집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경영진이 듣기 싫어하는 진실이 위로 올라가게 만드는 통로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판단을 전달하기 위해 만든 장치가 그 판단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자문사가 커질 수 있었던 힘은 동시에 효율과 판단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표준화된 정책은 일관성을 줬지만, 맥락은 종종 희생됐다. 복잡한 지배구조 판단, 예컨대 CEO 승계 시점, 전략적 트레이드오프, 이사회 재편 같은 문제들이 ‘찬반’의 이분법으로 압축됐다. 정치·규제 당국의 시선도 강해졌다. 이제 자산운용사들은 결국 핵심 질문에 닿았다. 의결권 행사가 수탁자 책임(fiduciary duty)의 핵심이라면, 왜 그 판단을 그렇게 많이 외주로 맡겨왔나.

그 결과 변화가 시작됐다. 자문사는 ‘원사이즈’ 권고에서 벗어나려 하고, 대형 투자사는 내부 스튜어드십(stewardship) 역량을 키우고 있다. 그리고 이제 AI가 들어왔다.

AI는 자문사가 약속했던 것들을 다시 약속한다. 규모, 일관성, 속도. 수천 건의 주총, 공시, 각종 문서를 빠르게 처리하도록 설계된다. 하지만 AI가 “판단”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판단의 위치를 옮길 뿐이다.

판단은 이제 상류(upstream)에 산다. 모델 설계, 학습 데이터, 변수 가중치, 예외 처리(override) 프로토콜에 담긴다. 그 선택들은 자문사의 투표 정책 못지않게 결정적이다. 다만 훨씬 덜 보일 뿐이다.

과거 자문사가 주주 목소리를 모아 경영진 권력에 맞서는 도구였다면, AI는 그 도전을 더 조용하고, 더 깔끔하고, 더 추적하기 어렵게 만들 위험이 있다.

이사회 입장에선 지배구조 공시의 ‘청중’이 바뀐다. 이제는 사람 분석가만이 줄 사이를 읽지 않는다. 알고리즘이 글자 그대로, 과거 데이터와 패턴대로, 맥락 없이 읽는다. 이사회가 맥락을 제공하지 않는 한, 기계는 맥락을 추론하지 못한다.

이 변화는 이사회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첫째,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평가받고 있나. AI는 공시, 실적발표 콜, 웹사이트, 언론 보도 등 공개된 거의 모든 신호를 흡수할 수 있다. 지배구조 신호는 이제 상시로 축적된다.

둘째, 어디서 오독될 수 있나. 사람이 읽을 때 통하는 뉘앙스, 신중한 표현, 점진적 약속은 기계에겐 혼란이 될 수 있다. 애매함은 ‘일관성 부족’으로, 침묵은 ‘리스크’로 읽힐 수 있다.

셋째,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지나. AI 기반 의결권 행사에는 보편적 ‘항소 절차’가 없다. 최종 책임은 자산운용사에 있겠지만, 이의제기 경로는 불투명하고 비공식적이며 느릴 수 있다. 특히 루틴한 안건일수록 그렇다.

즉, 이사회는 이렇게 가정해야 한다. 알고리즘이 우리 지배구조를 잘못 해석하더라도, 전화할 분석가가 없을 수 있고, 투표 전에 기록을 바로잡을 통로도 뚜렷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시나리오를 떠올려보자 가령 이사회 의장이 과거 지배구조 논란에 연루됐던 다른 회사 임원과 ‘이름이 같다’고 하자. 공개 정보를 스캔하던 AI가 두 사람을 혼동해, 이사 선임을 앞두고 지배구조 리스크를 조용히 상향 조정한다.

동시에 이사회는 대형 인수합병 과정의 안정성을 위해 CEO 승계를 1년 늦춘다. 의도는 합리적이고 계획적이지만, 그 이유는 공시·콜·투자자 대화에 흩어져 있다. AI는 이 지연을 ‘지배구조 약점’으로 깃발(flag) 처리한다.

주총 며칠 전, 제3의 블로그가 이사회 독립성을 문제 삼는 추측성 글을 올린다. 근거는 약하지만 공개돼 있다. AI는 사람 검토 전에 그 글을 먹고 반영한다. 이사회는 오류를 보지 못한다. 대화할 분석가도 없다. 남는 건 사후에 확인하는 투표 결과뿐이다.

이 모든 것은 악의적 행위자가 없어도 발생한다. 규모, 자동화, 애매함이 만나는 순간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이사회가 자산운용사의 AI 설계를 통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알고리즘에 맞춘 ‘최적화 공시’를 하려 들어서도 안 된다.

대신 지배구조를 다르게 운영할 수는 있다. 이미 일부 이사회는 더 명료한 ‘서사형 공시(narrative disclosure)’를 시도한다. 지배구조 철학, 트레이드오프의 기준, 판단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더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알고리즘이 “그걸 좋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여전히 시스템을 설계·감독·예외 처리하기 때문이다.

명료함은 오독 위험을 낮춘다. 일관성은 사람 검토 비용을 낮춘다. 맥락은 자동화 속에서도 판단이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인다.

물론 모든 결정을 다 공개하라는 뜻은 아니다. 과잉 공시는 또 다른 리스크를 낳는다. 다만 어떤 판단은 맥락 없이는 안전하게 이해될 수 없고, 어떤 판단은 추론에 맡겼다간 위험해질 수 있다는 점을 더 의식적으로 구분하자는 말이다.

또한 이사회는 투자자 커뮤니케이션도 다시 봐야 한다. 이제 대화의 초점은 ‘정책과 결과’에만 머물 수 없다. 프로세스를 묻고 확인해야 한다. 사람 판단이 어디서 개입하는지, 무엇이 리뷰를 촉발하는지, 사실관계 분쟁은 어떻게 다루는지, 오류는 얼마나 빨리 수정될 수 있는지. 핵심은 AI를 마스터하는 게 아니다. 지배구조 의사결정이 기계에 의해 매개될 때, 책임이 어디에 놓이는지 이해하는 일이다.

AI 보조 투표 환경에서는 익숙한 전제들이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침묵은 중립이 아닐 때가 많고, 애매함은 무해하지 않을 때가 많다. 시간·플랫폼·공시 전반에 걸친 일관성은 ‘지배구조 자산’이 된다.

이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프록시 결과가 이제 이사회가 “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 이미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전환을 가장 잘 통과하는 이사회는 점수나 체크리스트를 최적화하는 곳이 아니다. 판단을 기록하고, 트레이드오프를 설명하고, 사람이 읽어도 기계가 읽어도 무너지지 않는 지배구조 스토리를 만드는 이사회다. 이는 기술 과제가 아니다. 지배구조 과제다.

/  Jane Sadowsky & 김다린 기자 quill@fortunekorea.co.kr

제인 사도스키(Jane Sadowsky)는 10년 넘게 기업 및 비영리 단체 이사회에서 독립 이사로 활동해 왔으며, 현재도 글로벌 이사회 3곳에서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에버코어 파트너스(Evercore Partners)에서 투자은행 부문 시니어 매니징 디렉터(Senior Managing Director)이자 전력·유틸리티 그룹(Power & Utility Group) 총괄로 커리어를 마친 뒤 은퇴했으며, 현재는 모엘리스 앤드 컴퍼니(Moelis & Co.)의 시니어 어드바이저(Senior Advisor)로 활동 중이다. 이 글에 담긴 견해는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포춘(Fortune)의 공식 입장이나 신념을 반드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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