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교수 “갈등·불통 사회 한국, 한단계 도약하려면 ‘이것’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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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 연합뉴스

미국의 어느 인디언 보호 구역에 있는 학교에 백인 교사가 부임했다. 시험을 보겠다고 하니 아이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시험을 봐야 하니 떨어져 앉아야 한다고 신임 교사가 말하자,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답했다.

“저희들은 어른들에게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함께 상의하라고 배웠는데요.”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마음에 품고 사는 일화라고 한다. 그는 최근 출간된 ‘숙론'(熟論)에서 우리나라가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선 이런 인디언 아이들의 자세와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살다 보니 사회는 갈등의 연속이다. 자원은 한정돼 있는데 그걸 차지하려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압축성장을 통해 빠르게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한국은 긴 시간에 걸쳐 천천히 발전해온 여타 선진국에 견줘 갈등 양상이 더 심각한 편이다.

최 교수의 진단에 따르면 일단 이념 갈등이 팽배한다. 좌와 우로 나뉜 여론은 심하게 균열해 있다. 땅덩어리는 비좁은데 지역감정은 두드러진다. 계층과 빈부 갈등은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더욱 심화하는 양상이다. 남녀 갈등은 비교적 최근에 불거진 이슈지만 후폭풍이 거세고, 저출생 심화에 따른 세대 갈등은 한국 사회를 파국으로 견인할 잠재적 핵폭탄이다. 이 밖에도 지구 온난화 속에 불거지는 환경 갈등, 이민자 증가에 따른 다문화 갈등 등 어려 갈등이 칡(葛)과 등나무(藤)처럼 서로 얽혀서 대한민국을 옥죄고 있다.

최 교수는 이렇게 여러 층위가 복잡하게 뒤얽힌 갈등 상황을 풀어내고,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선 소통과 ‘숙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숙론이란 여럿이 특정 문제에 관해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상대를 제압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나와 상대의 생각이 다른지 숙고해보고 자기 생각을 다듬는 행위를 말한다. 그것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는 과정이다.

그는 책에서 “‘소통은 원래 안되는 게 정상’이라는 게 내가 얻은 결론”이라며 “우리는 너무나 쉽게 소통이란 조금만 노력하면 잘되리라 착각하며 산다. 그러나 소통은 당연히 일방적 전달이나 지시가 아니라 지난한 숙론과 타협의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결과물”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7일 서울 종로구 원서동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도 숙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라는 말이 있다”면서 “한국에선 모든 게 극렬하게 표출된다. 모든 갈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령, 광화문은 촛불로, 그로부터 몇백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시청 앞은 성조기로 물든다. 어떤 사안에 대해 극렬하게 다른 생각이 거의 같은 공간에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정책이 발표된 지 30분이 지나지 않아 인터넷 공간에선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갈등 국면이 펼쳐지기도 한다.

최 교수는 “불통에 따라 낭비되는 예산이 수십조에 달한다는 KDI( 한국개발연구원) 연구 결과도 있다”면서 “우리 사회는 소통에 대한 노력이 너무 안일하다. 소통하려면 상대를 파악하고, 상대가 원하는 걸 준비하고, 수락할 때까지, 악착같이 끝까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불통 사회를 소통 사회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면 한국은 또 한 차례 약진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그는 “한국 사회를 20~30년 이상 관찰했는데, 지금 웬만한 분야에선 거의 세계 최고 수준에 다다랐다. 대부분의 분야에서 잘하고 있다”며 “다만, 구슬을 꿰는 걸 못 하고 있을 뿐이다”고 말했다.

구슬을 꿰기 위해선 타인에 대한 공감과 소통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이는 숙론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최 교수는 강조했다.

“거리로 뛰어나가기 전, 인터넷 공간에 배설하기 전,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시대가 이제 된 것 같습니다. 그런 방법(숙론)만 조금 배우면, 우리 사회는 금방이라도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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