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로이커바트(Leukerbad)는 알프스 자락에 위치한 온천마을이다. 호텔마다 온천 스파시설을 마련해 봄여름가을겨울 전 세계에서 온 여행객을 받는다. 로이커바트의 매력은 온천에서 그치지 않는다. 황금색으로 물든 가들 포도밭을 보고 수백 년 역사 품은 고갯길도 두 발로 걸어서 넘었다. 로이커바트에서 온천만 하고 오기에는 너무나 아쉽다. 눈앞에 있으니 산도 한번 올라보고 아직은 미지의 세계인 스위스 와인에도 빠져 보자.
# 포도밭에서부터 오는 발레주의 가을
로이커바트를 찾아간 것은 지난 10월이었다. 이제 막 가을로 접어든 로이커바트로 가기 위해 먼저 들른 곳은 로이크(Leuk)라는 곳이다. 로이크까지 기차로 이동하고 이곳에서 다시 버스를 타야 로이커바트로 들 수 있다. 기왕 로이크까지 온 거 바로니에 와이너리(Winery C. Varonier&Sons)를 들렀다 가자.
와이너리가 위치한 곳은 바헌(Varen)이라는 마을이다. 론(Rhone)강이 내려다보이는 경사면에 위치한 바헌 마을은 와인으로 유명하다. 자투리땅마다 전부 포도나무를 심은 것이 마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 수확을 끝낸 포도밭은 노랗다 못해 누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분명 낯설었다. 싱그러운 녹색 물결만 생각했지 그 이후에 어떤 모습일지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오후 햇살을 듬뿍 머금은 포도밭은 버석거리는 노란 안개 같았다. 나른하고 따뜻했다.
바헌은 독일어권 발레주 지역에서 두 번째로 와인 생산량이 많은 곳이다. 참고로 발레주는 스위스 포도밭의 약 3분의 1이 자리한 지역이다. 바헌에서 삼대째 와인 사업을 이어가고 있는 바로니에 와이너리는 1969년 시작했다. 현재 사장으로 있는 앤디 바로니에는 유럽 곳곳에서 경험을 쌓고 2008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2010년부터 정식으로 와이너리 경영을 맡고 있다.
어제 그러니까 10월 24일에 올해 마지막 포도 수확을 끝냈습니다.
작년엔 180t을 수확했는데 100t 정도로 그렇게 좋지는 않네요.
앤디 바로니에
바로니에 와이너리에서는 18개 포도 품종을 키우고 와인은 총 45종류를 생산하고 있다. 참고로 바헌 마을에서는 자라는 포도는 모두 32개 품종이다. 10년 전부터는 유기농법에 따라 포도를 기르고 있다. 2023년에는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바이오 스위스(Bio-Suisse) 인증도 받았다고.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간단히 마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와인 시음실로 이동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두 팀이 있었다. 사람이 많으면 2대 주인인 앤디의 어머니까지도 시음 프로그램을 돕는다. 앤디 어머니와 아버지는 와인 시음실 1층 가정집에서 살고 있다. 시음을 통해 와인 6종류를 맛볼 수 있다. 여기에 각종 햄과 치즈, 빵으로 구성된 간식이 함께 나온다. 가격은 1인 32~35스위스프랑(약 5만1000~5만5000원)을 받는다.
바헌까지 갈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로이커바트 마을 내에 있는 와인바 ’알 비노(Al vino)’를 추천한다. 앤디가 운영하는 가게로 바로니에 와이너리에서 생산한 다양한 와인을 맛볼 수 있다.
# 온천의 맛을 더해주는 겜미 패스 트레킹
로이커바트 여행에 재미를 더해줄 액티비티로 겜미 패스(Gemmi Pass) 트레킹을 추천한다. 로이커바트 북쪽에 있는 겜미 패스를 걸어 발레주와 베른주를 넘나들 수 있다. 첩첩산중 마을 로이커바트는 2000m가 넘는 고봉에 둘러싸여 있다. 동쪽 토렌트호른(Torrenthorn, 2998m), 북쪽 겜미 고개(Gemmi Pass, 2322m)와 발름호른(Balmhorn, 3698m), 서쪽에 다우벤호른(Daubenhorn, 2942m) 등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산봉우리다. 그저 벽 같은 산을 스위스 사람들은 흔쾌히 넘나든다. 바위 절벽을 자세히 보면 빨간 네모에 하얀 십자가, 스위스 국기가 보인다. 클라이밍 루트를 표시한 거다. 등산로도 있다. 커다란 바위처럼 보이는 산에 어찌 길을 낸 건지, 길이 난 산비탈은 직벽에 가깝게 보여서 쉽사리 믿을 수가 없다.
겜미 패스를 처음 만든 것은 로마 사람들이었다. 이 길을 따라 그 옛날 로마 사람들은 로이커바트로 온천욕을 즐기러 왔다. 겜미 패스가 중요해진 것은 중세시대 때 일이다. 약 800년 전 이 알프스 위쪽에 살던 유럽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 이탈리아 밀라노까지 오가면서 교역을 했다. 200년 전 로이커바트 지역이 관광 명소로 개발되면서 덩달아 겜미 패스까지 주목을 받았다. 군인과 성직자, 상인들이 걷던 길을 마크 트웨인, 파블로 피카소 같은 유명 인사들이 방문하면서 로이커바트를 대표하는 명승지가 됐다.
겜미 고개는 해발고도 2344m다. 로이커바트 마을부터 산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2시간이 걸린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방법도 있다. 2012년 설치한 비교적 신식 캐빈을 타면 약 10분 만에 겜미 고개에 오를 수 있다. 다만 케이블카 운영 시간이 계절마다 달라진다. 2024년의 경우 4월 15일부터 5월 31일까지, 11월 4일부터 11월 6일까지, 11월 12일부터 12월 21일까지는 케이블카 운행을 하지 않는다.
케이블카에 탑승하고 정상까지는 약 10분이 걸린다. 종착점에 다다를 때쯤 주의를 기울이니 지그재그로 여러 번 꺾인 등산로가 눈에 들어왔다. 실제로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많이 보였다. 그저 감탄사만 뱉고 있는 우리 일행을 보고 현지인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취리히에서 왔다는 그는 “나는 1년에 두 번씩 저 길을 따라 겜미 고개에 오른다”고 말했다.
겜미 고개 위 케이블카 정류장에는 각종 편의시설이 몰려 있었다. 숙박이 가능한 롯지, 절벽으로 삐쭉 튀어나온 전망대와 큰 규모의 식당과 사우나 시설까지 갖췄다. 식당에서 밥을 먹은 다음 겜미 패스 트레킹을 시작했다. 나무가 전혀 없는 주변 풍경을 보고 있자니 마치 다른 행성에 온 듯한 이질감이 들었다. 생경했던 풍경이 익숙해질 때쯤 다우벤제(Daubensee)가 보였다. 주변이 온통 돌산에 둘러싸인 호수 다우벤제는 잿빛이었다. 물이 말라 수심이 얕은 부근에는 바닥이 드러났다.
겜미 패스는 발레주 로이커바트와 베른(Vern)주 칸더슈테그(Kandersteg) 잇는다. 겜미 패스 트레일은 사람에 따라서 부르는 구간이 다르다. 누구는 로이커바트부터 칸더슈테그까지 약 20㎞에 달하는 길을 걷기도 한다. 20㎞ 중 순수히 두발로 걸어야만 하는 구간은 겜미 롯지부터 순뷔엘(Sunnbüel)까지 약 9㎞이다.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2시간 30분, 중간중간 사진도 찍어가면서 걸으면 3시간 정도 걸린다.
다우벤제를 지나 길 중간쯤에 호텔 슈바렌바흐(Hotel Schwarenbach)이 나타났다. 무려 1742년부터 자리를 지켰다는 호텔 슈바렌바흐는 본래 세관 건물로 지어졌다. 관광업이 발전하면서 호텔로 바뀌었고 프랑스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1802~1870), 쥘 베른(Jules Verne, 1828~1905),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1893),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과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러시아 정치인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 등 유명인사들이 겜미 패스를 걸으며 호텔 슈바렌바흐를 들른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모파상은 이곳에 머물렀던 경험을 토대로 단편 소설 ‘여관(The Inn)’을 썼다. 알프스의 황량한 겨울 산속 여관에 고립된 산장지기의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독에 사로잡힌 인간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너무나 세세하게 담아낸 탓에 누구는 이 소설을 ‘미스터리’ ‘공포’ 장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소설 속 슈바렌바흐는 마치 귀신의 집 같은 분위기다. 겨울 동안 두 명의 산장지기가 이곳을 지키는데 한 명이 실종되고 남은 한 명이 슈바렌바흐에 남아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 속에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행히 슈바렌바흐를 찾아갔을 때는 가을이었다. 다만 소설 이야기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아 겨울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면서 걸었다. 건물 뒤로 병풍처럼 펼쳐지는 돌산의 색과 비슷한 호텔 슈바렌바흐는 보호색을 입힌 듯했다. 따스한 가을볕이 감도는 슈바렌바흐는 소설 속 ‘귀곡산장’ 같은 이미지와는 정반대였다. 산장 호텔은 아직도 그 기능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호텔 투숙객 손님은 줄고 레스토랑과 카페를 이용하는 손님이 늘어난 것이 달라진 점이다. 지금만큼 교통이 좋지 않은 시절 슈바렌바흐는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필수로 묵어가야 할 곳이었지만 지금은 3~4시간만 걸어도 고개를 지나갈 수 있다.
슈바렌바흐를 지나고부터는 완만한 내리막이다. 이곳에서부터 순뷔엘 케이블카 정류장까지는 4㎞ 거리다. 길을 걷다 보면 발레주와 베른주의 경계가 되는 곳에 나온다. 큼직한 바위에 긴 설명 없이 각 주의 상징 문장을 그려 넣었다. 베른주 문장은 빨간색, 노란색 띠 바탕에 혀를 내밀고 네발로 걷는 곰이 그려져 있고 발레주 문장은 빨간색, 하얀색 바탕에 별 13개를 새긴 모양이다. 이 지점부터는 왠지 주변도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육중한 바위산은 그대로지만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를 채우는 풍경이 달라졌다. 경사면으로 난 길이 끝나고 분지 지형에 접어들자 나무와 수풀이 많이 보였다. 케이블카 정류장을 앞두고 한두 번 오르막만 잘 통과하면 일정 마무리. 앞서 설명했듯 걸어 내려가는 방법도 있지만 무릎 보호를 위해 케이블카를 탔다.
장장 3시간이 걸린 겜미 패스 하이킹. 상업적 목적을 위해 만든 길은 세월이 흘러 여행길로 바뀌었지만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호텔과 위압적인 풍경만은 예전 그대로다. 스위스 알프스야 어딜 가나 아름답겠지만 이만한 스토리가 있는 길은 드물다. “여기까지 와서 온천만 하면 정말 아쉽지…로이커바트의 진짜 매력은 저 산에 있거든.” 현지인들이 입 모아 자랑하는 이유가 있었다. 묵직해진 다리를 이끌고 산을 내려오자 온천 생각이 간절해졌다. 등산과 온천, 한국인이 너무나 좋아하는 두 가지를 다 모은 로이커바트를 발견한 것은 이번 스위스 여행에서 가장 큰 선물이었다.
스위스(로이커바트)=홍지연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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